처음으로 인사를 드립니다. 아래 글은 제가 최근에 우연히 쓰게 된 글입니다. 아시다시피, 탈인간중심주의적 녹색 운동이라는 것이 얼핏 보면, 인권 (인간의 권리) 운동과 거리가 약간 있는 듯하지만, 생명권은 인권의 핵심이며, 지금 우리에게 요청되고 있는 녹색 운동은 미래 세대 전체의 인권을 위한 것이기도 하매, 이 공간에도 다소간은 의미가 있지 않을까 하여 올립니다. 저에 대한 소개는 제가 운영하는 블로그 소개로 대신하겠습니다: http://vates.tistory.com/  앞으로 자주 찾아뵐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이 글의 저작권은 저에게 있지 않으며, 이 글을 읽으시는 분께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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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삶에서 가장 경계되어야 할 것은 무엇일까
? 탐욕? ()? 무지? 불가에선 이 셋을 탐진치 삼독이라 하여 경계하지만, 내 생각엔 이것보다, 혹은 그렇지 않다면, 이것에 버금갈 정도로 무서운 것은 따로 있다. 그것은 바로 자동성이다.

 

자동성? 자신도 모르게 자동적으로 어떤 행위나 사고를 하게 되고 마는 것이 자동적인 행위/사고라면, 자동성은 그 행위/사고에 깃든 성질이다. 이 성질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철학의 뿌리라 부른, 세계의 존재에 대한 경이, 타우마차인 (Thaumazein)’에 정극편에 있는 것으로, 철학, 사유, 예술의 공적이다. 나아가 이것은 선() 수행자가 가장 경계하는 바이기도 하다. ()이란 시간이 느껴지지 않는 현존적 체험에 머무는 것이매 그러하다.   

 

사물/타인과의 만남, 교감에서 아무러한 경이감을 느끼지 못하는 이, 아 이것/사람은 원래 그런 것/사람이었지, 그런 것/사람이지, 하고 당연하게받아들이는 이가 바로 자동성에 물든 이다. 그리하여 자동성에 물든다는 것은 곧 깊이 생각하지 않고, 깊이 지각/체험하지 않으며, 쉽게 가정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이는 지각 과정에서 창조의 씨앗을 꺼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도 하지 못하고, 나아가, 어쩌면, ‘삶을 산다고 말할 수조차 없다. 자동적으로 체험되는 것은 세계에 남지 않고, 엄밀히 말해, 체험되지 않은 것, (살아지지 않은 것), 체험을 통해 존재로서 체험자의 존재세계에 드러나지 않은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는 어떤 이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왕왕 듣는다: 이제는 우리도 녹색을 생각할 때가 되었다. 새 정부가 녹색 성장을 국정의 한 기조로 채택한 만큼. .  .

 

이렇게 말하는 이는 녹색 성장 앞에 자동적으로 붙는 수식어인 <저탄소>자동적으로 붙인다. 그저 자동적으로’ <저탄소 녹색 성장>인 것이다.

 

문제는 누군가 이렇게 <녹색> <저탄소>와 같이 상대적으로(!) 새로운 개념이나 말을 접하여, 그것이 무엇인지, 무엇을 함의하는 것인지 스스로 생각해보지 않고’ ‘자동적으로’, 남들이 쓰니까 나도 어쩐지 써야 할 것 같은 본능에 의해서 쓰고 말 때, 그 개념에 함의된 문제가 그 사람 자신의 실존적 문제로 자리잡을 수는 결코 없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 사람에게선, 자신의 실존적 삶의 변화 없이, 기존의 반()-녹색적인 삶의 스타일에, ‘녹색이 하나의 폴더나 파일처럼 아무런 모순 없이 추가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기이한 사태가 바로 지금 우리가 <녹색 성장> <녹색 산업>을 말하는 정부, 기업 내 관료, 직원들, 혹은 이 이슈를 다루는 기자들의 언술태도 그리고 녹색을 향한 삶의 태도에서 목격하는 바다.

 

그러나 무엇이 녹색인가? 무엇이 저탄소인가? - 이런 질문이 보다 심각하게 제기되어야 한다.

지금 세계 이곳 저곳(시민사회와 정부)에서 언급되는 녹색은 농기계 혁명 당시에 회자되던 녹색 혁명녹색이 아니며, 고리(고려)적부터 있어왔던 자연친화, 자연과의 화락, 자연보호사상 수준의 녹색이 아니다. 그것은 지구생태계에 가해져 온 나쁜발자국을 이제는 거꾸로 줄이는 방향으로 이동한다는 의미에서, 지난 수백 년간의 근대 철학/과학 패러다임을 넘어서는 탈근대적 녹색인 것이며, 어쩔 수 없이 탈산업주의적 녹색이 될 수밖에는 없다. 그리고 말할 필요조차 없이, 이 생태발자국 측정의 기준이 탄소배출량이므로 -탄소혹은 탄소 감축이 지금 문제가 되는 탈 근대적 녹색의 핵심인 것이다. 

 

따라서 자신의 실존적 삶의 모든 부면, 지각과 행동의 장에서 자동적으로 실천되는 생태발자국 찍기를 멈추려고 혹은 거기에 변화를 일으켜보려고 노력하지 않은 채, ‘녹색을 이야기하는 것은, 그 녹색의 색감이 어떤 것이든, 전부 아전인수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한국사회에서 녹색을 근자에 말하기 시작한 이들에게서 우리가 목도하는 것은 어떤 가치 있는 실천이 아니라 이러한 제 논에 물대기들뿐이다.

 

왜 그러할까? 어떻게 이러한 일이 가능할까? 필자가 보기엔 그것은 자동성탓이다. ‘녹색을 자동적으로 받아들인 탓이다. 놀라움, 집중, (), 사유의 과정을 생략한 채, ‘녹색의 가치를 기존의 패러다임에 무모순적으로 추가될 수 있는 하나의 덤으로서의 가치로서 받아들인 탓이다. 그리하여 탈근대 녹색’ ‘저탄소나의 것’ ‘나의 실존적 생활의제가 되지 못하며, 삶의 순간들은 전혀 변화되지 않은 채, 몸과 분리된, 주둥이와 펜, 키보드만 녹색’ ‘녹색앵무새 놀이를 하고 마는 것이다. 물과 기름인 녹색(근대 이탈)’성장(근대 집착)’을 함께 붙여놓고 행복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녹색은 본디 이중적이다. 자연과의 조화라는 녹색의 이념을 싫어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 그러나 비가시적인 생태계파괴와 가시적이고 직접적인 문명 혜택의 감소 (나와 내 가족의 막대한 불편) - 이 양자 중 하나를 자유롭게 택하라 할 때, 후자를 선택할 이는 또 많지 않을 터이다. 달리 말해, 전자를 드러내 후자의 길을 요청하는 탈근대 녹색을 좋아라 할 이는 많지 않다. 이것은 에드워드 윌슨이 말한 바대로, 우리 인간이 아직도 육식을 선호하는 부족 동물인 탓일 터이다. 우리 인간은 자연세계를 아직도 인간을 위한 먹을 것 으로 보고 있다는 말이다. 

 

이것은 녹색이 보편적 가치이긴 하나, 인간복지 (‘더 맛있는 것’)를 우선시하는 인간중심적 태도의 기각을 요청하는 탈근대 녹색은 대중들로부터 크게 외면당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러한 이중적 태도를 함께 만족시키려는 어정쩡한 입장인 <녹색 성장>과 같은 대중정치전략은 단기적으로는 대중의 호응을 얻는 성공적인 전략일 수는 있어도, 사태가 보다 심각한 수준으로 우리 시야에 드러나고 말 때, 자기파괴적, 미래파괴적성격을 드러내, 결국 그 역사적 과실이 엄중히 평가될 것이다.

 

잊지 말자. 현 정부는 영원하지 않다. ‘녹색 성장도 금방 끝나고 만다. 그러나 우리 미래 세대는 그 다음 정부, 그 다음 다음 정부를 넘어 계속 탄생될 것이고, ‘녹색 성장이 남긴 거대한 파괴적 발자국은 미래 세대의 삶의 마당에 계속해서 찍힐 것이다.

 

따라서 녹색 성장이라는 환상의 보자기를 쓴 유아이자, 녹색 앵무새인 현 정부를 넘어, 보다 장기적인 안목에서, 우리 대중들이 자발적으로 나서서 스스로와 미래 세대를 보호하는 수밖에는 지금은 다른 길이 없다. 정부여 이제 깨어나라, 라고 외치지 말자. 정부여, 왜 그리 아둔한가, 라고 외치지 말자. 정부여, 녹색 선진국들을 보라, 과학자들의 말에 경청하라, 라고 외치지 말자. ‘녹색에 관한 한, 그렇게 한가한 태도를 취해선 안 된다. 이 문제에 관한 한, 우리들 스스로가 말하고, 조직하고, 준비하고, 반대하고, 찬성하고, 그 숱한 자동적 녹색에 대한 테라피에 우리 스스로 직접 나서야 한다. 우리가 바로 차기 녹색 정부를 준비해가야 한다.  

 

그러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들만은 자동적으로종알대는 녹색앵무새 대열에 합류해서는 안 된다. 자동적으로 녹색하지 않는다는 것은 위에서 지적한 녹색의 이중성을 깊이 생각해본다는 것을 말한다. 그리하여 지금 요구되고 있는 녹색, 문명의 이기를 탄소배출량을 줄이는 방식으로 계속 누리는 것(‘녹색 성장’)이 아니라, 문명의 이기를 덜 누리며 지금보다 훨씬 더 불편한 삶을 감내하겠다는 새로운 삶의 태도라는 것을, ‘실존적 수준에서깨닫는 것을 말한다.

우리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끔찍하게 찍어대고 있는 탄소
(생태)발자국 (이를테면, 지금 이 글을 인터넷을 통해 볼 때, ‘가 켜둔 전기 탓에 공기 중에 배출될 이산화탄소!!) 에 깜짝 놀라게 된다는 것을 말한다. 그리하여 크리스챤적 의미의 재생과 같은 재탄생의 체험으로 나아가게 된다는 것을 말한다. ‘보는 폰광고를 보고 온실가스를 먼저 생각하며 절로 눈살 찌푸리게 된다는 것을 말한다. 이는 곧 문명에 대한 새로운 눈() 을 갖는다는 것을 말한다. 알고 생각하고, 놀라고 깨닫는 것이 곧 살 길을 열어주는 때가 있으니 지금이 바로 그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