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정범: 국가폭력을 직시하며 고통을 통한 연대의 정당성을 묻다.

많은 이들이 이야기한 것처럼 공동정범은 지금까지의 ‘사회’파 다큐멘터리가 가지고 있던 문법을 깨뜨렸다. 보통 이런 ‘사회’파 영화들이 가진 기본적인 서사가 있다. 선량하게 살던 사람들의 삶이 국가와 자본에 의해 파괴되고 피해자들은 그 고통에 절규한다. 화면 가득한 절규를 들으며 눈물을 흘리기도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그 모습을 보며 내 자리가 어디인지를 분명하게 알게 된다. 피해자의 ‘편’, 혹은 피해자의 ‘곁’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피해자들이 아니라 이들이 피해자라는 단수여야 한다는 점이다. 설혹 그 피해자들 안에 차이가 있다고 하더라도 봉합 가능한, 즉 큰 틀에서 국가나 자본에 의해 피해를 입은 피해자라는 단수로 봉합가능한 차이여야 한다. 이런 점에서 차이를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그 차이는 차이 같지 않은 차이로 무시되기 때문에 피해자들은 결코 복수일수가 없다. 단수로 존재해야 한다.

그런데 이 영화는 이 문법을 완전히 깨트렸다. 그 가정 자체를 부정하면서 영화는 전개된다. 이 피해자‘들’ 사이의 차이는 ‘봉합’ 가능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이들의 고통은 국가로 인해 시작되었지만 삶에서 이들이 겪고 느끼고 분출하는 분노와 고통은 국가보다는 오히려 그 국가의 폭력을 ‘함께’ 겪었던 사람들과의 반목 때문에 생긴다. 이전에 이들을 ‘하나’로 묶어주던 ‘동지’라는 관계/언어는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

‘관계’가 박살났다. 이것이 국가가 가한 가장 큰 폭력이라는 것이 이 영화가 다른 사회파 영화와 달리 잘 보여주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영화는 국가가 행사한 폭력은 관계를 박살난 것에 그치지 않는다. 하나의 관계만 박살낸 것이 아니다. 당사자들은 그 이후 ‘우리처럼’ 관계를 맺는 것이 불가능하다. 인‘간’을 박살내어 그가 더 이상 사람일 수 없게 하는 것, 그것이 존재 자체에 가하는 국가 폭력의 핵심이다.

인간은 사람과 사람의 사이를 말한다. 이 사이를 두고 우리는 다른 사람을 만난다. 그런데 우리는 다른 사람을 만날 때 어떤 얼굴로 만나는가? 사람은 결코 다른 사람을 맨 얼굴로 만나지 않는다. 항상 우리는 다른 사람을 ‘가면’을 쓰고 만난다. 그리고 이 ‘가면’에는 언제나 사회로부터 오는 이름이 붙어 있다. 이들이 처음 만났을 때는 ‘동지’라는 이름으로 그 가면을 쓰고 만났다. 영화를 보는 우리는 ‘시민’ 혹은 ‘민중’이라는 가면을 쓰고 이들을 만난다.

사람이 가면을 쓰지 않고 그저 ‘나’로 다른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그 만나는 사람도 그저 ‘그’로서 만날 수 있는 경우는 대단히 한정적이다. 영화에서 나오는 것처럼 신이나 동물, 식물 그리고 아주 희박하게 사랑하는 사람정도다. 교회에서 통성기도, 무속에서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로 말을 하는 것이 바로 그 관계를 가능하게 하는 언어가 없다는 것을 말해준다. 언어 이전의 언어로만 소통이 가능한 것이다. 그 언어는 침묵이거나 혹은 의성어나 절규와 같은 ‘소리’다.

첫 번째로 이 영화에서 우리가 목격하게 되는 것은 이들 사이에 더 이상 가면이 가능하지 않다는 점이다. 예상을 넘어서는 국가의 폭력은, 그 국가의 폭력 앞에서 이들을 묶어 놓았던 가면인 ‘동지’를 박살냈다. 동지가 서로 같은 뜻을 나누고, 서로 그것을 이루기 위해 함께 하는 것이라면, 이전에 쓴 글에서 말했듯 국가의 폭력은 이들의 ‘동지’라는 가면이 그저 ‘가면’에 불과하다는 것을 폭로했다. 가면이 아니라 얼굴로서의 그런 동지는 애시 당초 있지도 않았다.

그 가면이 깨어진 순간 이들은 서로의 얼굴을 볼 수 없다. 누군가는 바로 거기가 출발점이 아니겠냐고 말하겠지만 그런 ‘민낯’에서 출발하여 새로 서로에게 지금까지 존재하지 않던 새로운 ‘가면’을 만드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이 영화가 탐색하여 발견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바로 이 가면이 박살난 이후 관계에 대한 가능성이다. 이들은 어떤 가면을 쓴 얼굴을 서로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서로 그 가면을 쓴 얼굴을 대면하면서 그 가면 뒤의 민낯을 떠올리며 역겨워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바로 이 가능성을 찾기 위해 참사의 당사자들도, 끝 무렵에 등장하는 인권활동가들도 애를 쓴다.)

어찌 보면 자기 자신도 한 번도 제대로 대면해보지 못했던 추한 자신의 얼굴, 그 민낯을 감당하지 못하는 것은 당사자들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이들 사이의 관계를 박살낸 국가권력이 향하는 종착지가 있다. 바로 더 이상 이들이 가면을 쓰지 못하게 하는 것, 혹은 가면을 쓰고 있으면서 언제나 자산이 가면을 쓰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게 하는 것. 그래서 당사자들이 서로에게 그리고 스스로에게 구역질하게 만드는 것. 이것이 존재에 가하는 최종적인 폭력이다. 그 결과 이들은 가면을 쓰지 못하거나 가면을 써도 스스로에게 역겨운 존재가 되어 괴로워할 수밖에 없다.

여기서 우리는 아주 낯익은, 아우슈비츠에 던졌던, 아우슈비츠의 생존자들이 던졌던 동일한 질문을 만난다. 이것이 사람인가? 가면이 벗겨진 존재, 더 이상 쓸 가면이 하나도 남겨져 있지 않는 존재, 그래서 발가벗겨진 이 존재들은 과연 사람인가? 사람이 모든 이름을 박탈당하고 발가벗겨 졌을 때, 그래서 그저 사람에 불과하게 되었을 때 인간이 아니라 비인간으로 전도되어 버렸던 아우슈비츠처럼 가면이 박살나고 더 이상 가면을 쓸 수 없게 된 이‘ 사람들은 사람인가?

가면이 깨어진 자는 서로에게 ‘어쩔 수 없이’ 폭력을 가한다. 그들이 서로에게 가하는 참혹한 폭력은 서로에게 ‘진심’을 묻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에 잔인하이 있다.사람에게 진심은 믿어주거나 서로에게 있다고 가정하기에 물어보지 않을 때 존재한다. 진심에 대해 그것이 진심이냐고 묻는 순간부터 아주 희박한 경우를 제외하고 진심은 존재할 수 없다. 진심은 답할수록 그것이 진심이 아니라는 것만 확인할 수 있다. 진심으로 사과하라고 요구하고 사과했을 때 문을 박차고 나가는 영화의 한 장면처럼 말이다.

진심을 묻지 않고 믿어줄 수 있는 것은 우리가 그의 맨 얼굴이 아니라 그가 쓴 가면이 역할을 할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가면을 쓴 우리 모두는 ‘위선자’이다. 스스로도 자기의 맨얼굴을 다른 가면으로 가린다는 점에서도 위선자이고 다른 사람의 진심을 진정으로 확인하지 않고 믿는 척 한다는 점에서도 위선자다. 그러나 이 ‘위선’은 단어가 풍기는 느낌과는 달리 나쁜 위선이 아니다. 오히려 사람이라는 ‘나약한’ 존재는 가면을 쓰고 위선자가 됨으로써 자기를 보호할 수 있으며 동시에 다른 사람을 배려할 수 있게 된다. 사회는 이런 위선자들이 펼치는 일종의 가면무도회이다.

그러나 가면이 깨어진 자는 더 이상 위선자가 될 수 없다. 그는 가면이 깨어졌기에 더 이상 사람을 못 만나거나, 사람 아닌 존재만 만나거나, 혹은 서로에게 네 얼굴은 가면이라고 폭로하거나. 마지막으로 자신이 쓴 것이 가면이라는 것을 알면서, 요구되는 그 가면에 충실해버리거나 할 수 있을 뿐이다. 앞의 두 경우가 도피라고 한다면 뒤의 두 경우를 우리는 ‘위악’이라고 부를 수 있다.

가장 비극적인 것은 이 영화에 나오는 한 ‘문제적’ 인물처럼 위선을 부리는 것조차 그것이 스스로 자기 자신에게 가하는 ‘위악’이 된다는 점이다. 그는 사회가 요구하는 것에 ‘유일’하게 충실한 사람이다. 피해자로서, 당사자로서 그는 자로 잰 것처럼 움직인다. 그러나 그의 얼굴에서 참사의 다른 당사자뿐만 아니라 관객들조차 바로 눈치 챌 수 있다. 진심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그는 충실하되 영혼이 없는 것처럼 그것이 진심이 아니라는 것까지 충실하게 드러낸다. 위선인 것처럼 보이는 그것조차 그가 자신에게 가하는 위악이다.

이것이 국가가 가한 가장 잔인한 폭력이다. 삶의 터전을 부수고, 관계를 박살냈다. 이 이후로도 인‘간’으로 살아가는 것을 가능하지 않게 만들어 더 이상 사람으로 살아갈 수 없게 만들었다. 참사의 당사자들을 스스로 내가 과연 사람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영원한 고통으로 밀어넣었다. 또한 그 고통이 영원하기에 좀처럼 그 고통에서 벗어나 가면을 쓰고 사람을 만나지 못하게 함으로서 인‘간’이 되지 못하게 한다. 자신의 존재가 말살되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계속 살아가야하는 것보다 더 큰 고통이 어디에 있는가?

영화는 같은 질문을 관객에게도 던진다. 이들의 고통을 목격하고 있는 우리는 이들과 어떻게 만나야할 것인가? 이 영화를 보며 관객은 깨닫게 된다. 이전에 이런 사회파 영화를 보며 그들을 만나던 가면으로는 이 영화에서 더 이상 이들을 만날 수 없다는 것이다.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시민이라는 ‘익숙한’ 가면을 쓰고 이들을 만나기 위해서는 당사자들 역시 역시 피해자라는 단수의 ‘익숙한’ 가면을 써야한다. 그런데 그들이 겪는 ‘피해’의 핵심이 바로 이 ‘가면’이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게 이 영화다. 따라서 관객들 역시 영화를 볼 때 다른 가면을 써야한다. 무슨 가면? 그러니 관객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지점에서 이 영화를 통해 우리는 우리에게 ‘연대’라고 부르는 것이 언제 결정적으로 취약해지는지를 알게 된다. 우리가 저항한다고 하는 ‘국가’에 의해 그 가면이 깨어져버렸을 때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국가가 저항을 분쇄할 때 가장 공을 들이는 것이 더 이상 ‘동지’가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저항하던 국가에 의해 ‘동지’가 파괴된 사람들과 우리는 어떻게 ‘동지’가 될 것인가? 그것은 가능한가? 이 영화가 출발하고 있는 것이 바로 여기이며, 사람들이 멈추고 싶은 것이 바로 여기다.

여기서 사람들은 싸늘하게 말할 수밖에 없다. 그건 너네 문제다. 그러니 당신들이 알아서 해결하라. 우리 앞에서는 싸우지도 말 것이고, 내보이지도 말아 달라. 당신들이 해결하고 난 다음에, 혹은 당신들이 해결하는 모습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우리는 연대하겠다. 당신들이 불화한다면 우리는 멈출 수밖에 없다. 그러니 우리의 역할을 위해 당신들의 역할에 충실해 달라. 우리의 역할을 위해 당신들의 가면을 써 달라. 그러니 관객들은 말할 수밖에 없다. “그것까지 알고 싶지는 않다.”고.

그런데 이런 요구가 연대일 수 있는가? 가면이 박살나서 고통 받는 사람에게, 그리고 그들의 가장 결정적인 고통의 원인 중의 하나인 그 ‘익숙한’ 가면을 다시 쓰기를 원하는 것이 운동이고 연대인가? 피해자의 가장 큰 비극은 피해자로서만 살아야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그는 참사를 알리기 위해서, 진상을 규명하기 위해서 언제나 피해자이기만 해야한다. 여성학자 정희진이 말하는 것처럼 피해자는 피해자로서만 주체화된다.

연대의 잔인함은 한 걸음 더 나간다. 연대를 한다는 우리가 그들에게 가하는 잔인한 폭력은 그들이 피해자로만 박제된 삶을 살아야하는 것뿐만 아니라 피해자가 아니라 연대한다는 우리를 ‘환대’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거꾸로 말하면 그들이 피해자로서 피해에 대해서만 말하는 것이 그 피해에 연대하는 우리를 환대하는 것이 된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우리를 환대하기 위해 그들은 피해자로만 살아야 한다. 한 친구가 말한 것처럼 참사의 당사자들이 늘 언제나 똑같은 얼굴로 다른 사람들이 올 때마다 ‘피해자’가 되어 ‘환대’한다. 우리가 그들을 ‘환대’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우리를 ‘환대’해야 한다. 이것이 연대인가?

그럼 이 영화는 연대의 불가능성을 보여주기 위해 깨어진 가면 이후, 그들의 ‘민낯’을 보여주는 그런 영화인가? 전혀 아니다. 이 영화를 주로 그런 식으로 해석하는 것은 이 영화에 대한, 그리고 이 영화가 나오기까지의 사회운동의 고민에 대한 완전한 모독이다. 만일 우리가 이 영화를 그런 식으로 해석하며 ‘민낯의 중요성’ 운운한다면 우리는 완전히 반동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그것이야말로 ‘운동’이 지나간 자리를 허무와 폐허로 만들어 버리는 위악에 지나지 않을 것이고 국가 폭력이 쌍수를 들고 환영하는 일일 것이다.

가면이 깨어진 이들의 민낯을 포르노처럼 드러내는 것은 영화의 의도도 아니고, 적어도 내가 아는 한 이 감독들의 운동이 지향하는 것도 아니다. 그럼 무엇일까? 무엇보다 이 영화는 고통의 심연을 들여다보고 있다. 참사가 한 존재에 가하는 고통의 심연을 들여다본다. 그러면서 이 영화는 놓치지 않는다. 존재가 말살당한 채 죽어있는 상태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참사의 책임자는 누구인가? 자칫 참사의 당사자들에게 매몰되어 놓치지 쉬운 이 질문을 이 영화는 끝가지 붙들고 있다. 드러내야하는 민낯은 이들이 아니라 바로 국가라는 것을 말이다. 그들의 얼굴을 보며 내가 이것까지 알아야하느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이 영화는 바로 그 ‘이것’의 뒤에 있는 국가의 민낯을 폭로한다.

또한 관객에게도 질문한다. 참사의 당사자들을 ‘피해자’로서만 만나고 그들이 ‘피해자’로서 우리를 환대하며 우리가 ‘문제’라고 생각하는 ‘문제’만 해결하려고 하는 너희는 정당하냐고 말이다. 이런 ‘우리’들의 연대는 겉으로는 우리가 그들에게 손을 내밀고 그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환대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들이 연대하려는 우리를 환대하기를 바라는 그 익숙하고 편안한 연대인 것은 아니냐고 말이다. 편안하고 감동적으로 고통과 연대하는 것, 그것이 연대인가? 그 연대는 정당한가? 스스로의 정당성을 허물지 않고 당사자의 정당성을 묻는 연대는 정당한가? 연대는 스스로의 정당성을 허물고 질문할 때 비로소 가능한 것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