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3년 6월 11일, 팃쾅둑(Thich Quang Duc)이란 불교 승려가 전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그는 베트남 사이공의 번잡한 거리 한가운데서 가부좌를 한 채 자기 몸을 불살랐다. 몸이 타들어가는 동안 그는 깊은 명상에 잠긴 듯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결국 죽음에 이르렀다. 당시의 광경을 보도한 뉴욕타임스의 기자는 이렇게 썼다.

“난 그 광경을 다시 보려했다. 하지만 한번으로 충분했다. 불꽃이 인간에게서 나오고 있었다. 그의 몸은 천천히 사그러 들었고, 쭈그러들었고, 그의 머리는 검어지고 있었다. 공기에서는 인간의 살을 태우는 냄새가 났다. 인간은 놀랍게도 빨리 탔다. 내 뒤에서는 이제 모여들고 있었던 베트남 사람들의 흐느낌 소리가 났다. 나는 너무 충격을 받아서 울 수도 없었고, 너무 혼란스러워서 메모를 하거나 질문을 할 수도 없었고, 너무 당황해서 생각조차 할 수가 없었다. … 불에 타면서 그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고, 어떤 소리도 내지 않았기에, 그의 평정은 그 주변의 통곡하는 사람들과 극명하게 대조됐다.”

그를 이어 스물아홉 명에 이르는 비구와 비구니들(그중에는 세 명의 미국인도 포함됐다)이 팃쾅둑의 소신공양을 뒤따랐다. 왜 그랬을까?

왜 그들이 자기 몸을 불살랐는지를 설명하는 글이 오늘 읽어볼 팃낙한 스님의 편지이다. 소신공양이 이어지던 와중에 팃낙한 스님은 그것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 마틴 루터 킹 목사에게 공개편지를 쓴다. 편지를 쓴 목적은 또 있었다. 저명한 인권운동가요, 휴머니스트인 킹 목사에게 전쟁에 대해 침묵하지 말라고, 시민권 운동 밖으로 떨치고 나와서 전쟁반대의 목소리를 분명히 내라고 촉구하기 위해서였다.

킹 목사는 고심 끝에 침묵을 끝냈다. 그는 <베트남 너머>라는 유명한 연설로 화답한다(이 연설문은 <인권문헌읽기>에서 소개한 적이 있다). “침묵은 곧 배반을 의미하는 때가 온다.”는 표어에 완전히 공감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는 킹 목사는 베트남전에 대한 반대, 미국정부의 정책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단호하게 낸다.

이 연설에서 킹 목사는 케네디 대통령의 말을 인용하는데 “평화적 혁명을 불가능하게 하는 사람들은 불가피하게 폭력 혁명을 일으키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덧붙인다. “하루빨리 시작해야 합니다. 재물 중심의 사회로부터 인간 중심의 사회로 변화하려는 노력을, 기계와 컴퓨터, 수익 동기와 재산권을 사람보다 더 중요하게 여긴다면, 인종차별주의와 극도의 물질주의, 군국주의라는 세쌍둥이 거인을 극복할 수 없습니다.” 이 연설을 한 후 정확히 1년 후에 킹 목사는 살해된다.

2010년 5월 31일 대한민국, 문수 스님이 낙동강 둑방에서 자기 몸을 불살랐다. 남긴 유서와 가사에는 “이명박 정권은 4대강 사업을 즉각 중지․포기하라”, “이명박 정권은 부정부패를 척결하라. 이명박 정권은 재벌과 부자가 아닌 서민과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을 위해 최선을 다하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위 사진:<그림> 판화가 이철수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충격적인 일이었다. 개인적으로 나는 민주화투쟁 과정에서 분신했던 수많은 이들이 떠올랐다. 특히 단 시간 내에 많은 분신이 이어졌던 때가 91년이었다. 당시 모 대학의 선전부장이었던 난, 맡은 역할 때문에 누구보다도 제일 먼저 분신소식과 그들이 남긴 유서와 영정사진을 받아들게 되는 원치 않는 경험을 해야만 했다. 그들의 장례식 영구차에 붙일 이름 석 자를 붓글씨로 써야 했던 것도 나의 일이었다. 추모제를 하고 있는 와중에 또 다른 죽음의 소식이 전달되는 날도 있었다. 이십여 년이 지난 지금, 또다시 듣게 된 분신, 소신공양이란 단어는 세월을 되돌리는 느낌을 줬다.

그들은 하나같이 원했을 것이다. 사람들이 더 행복하고 더 즐거워하길, 더 공감하고 더 사랑하길, 민주주의와 인권의 적들에 대해 더 각성하고 깨어있기를, 생명을 만끽하길, 더 나은 생활을 누리길, 자신들의 역사를 기억하되 되풀이하지 않기를….

사회적으론 어땠을까? 한편에선 끝없는 의도적 침묵이 이어졌고, 한편에선 흐느낌과 다짐이 이어졌다. 문수 스님 소신공양 이후 추모제와 선거가 있었고 그 외에도 많은 일들이 있었다. 일일이 확인할 수는 없지만 그 와중에 어디선가 수많은 이들이 ‘공개편지’를 썼다고 생각한다. 공개편지는 누구에게 수신됐을까, 답신은 누구에게서 어떻게 올까, 강변에서 연서를 기다리고 기다리던 연서를 뜯어보는 심정으로 우리 모두 기다리고 있다. 포클레인이 내려치는 강변에서 내가 이름도 모르는 뭍 생명들은 <4대강 너머>를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다.

위 사진:<그림> 판화가 이철수


팃낙한 스님이 마틴 루터 킹 목사에게 보내는 편지(An Open Letter from Thich Nhat Hanh to Martin Luther King, Jr., 1965년 6월 1일)

1963년 베트남 스님들의 소신공양은 서구 기독교의 양심으로 이해하기에는 어쩐지 좀 어렵습니다. 언론들은 그때 자살이라고 했지만, 본질적으로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것은 항의라고도 할 수 없습니다. 분신 전에 남긴 유서에서 그 스님들이 말하고 있는 것은 오로지 압제자들의 마음에 경종을 울리고 그들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으며, 베트남 사람들이 겪고 있는 고통에 대하여 세계의 관심을 호소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스스로를 불태운다는 것은 자신이 말하려는 바가 아주 중요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불태우는 일보다 더 고통스런 일은 없습니다. 이런 종류의 고통을 겪는 와중에 뭔가 말하는 것은 최고의 용기, 솔직함, 결단, 진심을 갖고 말하는 것입니다. 대승불교의 전통에서 수행된 것으로, 승려가 되려는 사람은 수계식 중에 비구의 250 계율을 준수하며, 승려의 삶을 살며, 깨달음을 얻어, 자신의 생을 모든 중생의 구제를 위해 바치겠다는 서약을 하면서 자기 몸의 작은 한 부분 이상을 태울 것을 요구받습니다. 물론 혹자는 편안한 안락의자에 앉아서 이런 것들을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승가 공동체 앞에 무릎을 꿇고 불타는 고통을 경험하면서 이런 말들을 할 때는, 온 맘과 정신의 진정성을 표현하는 것이며 아주 큰 무게를 담는 것입니다.

베트남 승려는 자신을 불태움으로써, 베트남 인민을 보호하기 위해 최대의 고통을 감수할 수 있다고 온 힘과 결단을 다해 말하는 겁니다. 하지만 왜 분신으로 죽어야만 하는 걸까요? 자신을 불태우는 것과 그로 인해 죽음에 이르는 것 사이에는 단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본질에는 차이가 없습니다. 너무 많이 불사른 사람은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생명을 거둔다는 것이 아니라 불태운다는 것입니다. 소신공양하는 사람이 진정으로 목적하는 바는 의지와 결단의 표현이지, 죽음이 아닙니다. 불교의 신념 속에서 생은 60년 또는 80년 또는 100년의 기간에 한정된 것이 아닙니다. 생은 영원한 것입니다. 생은 신체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생은 보편적입니다. 따라서 자신을 불태움으로써 의지를 표현하는 것은 파괴의 행위를 저지르는 것이 아니라 건설의 행위를 수행하는 것입니다. 즉, 인민을 위해 고통 받고 죽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살이 아닙니다. 자살은 다음과 같은 원인들을 가진 자기 파괴의 행위입니다:
• 살아갈 용기와 어려움에 맞설 용기의 부족
• 생의 패배와 모든 희망의 상실
• 비존재(non-existence, abhava)에 대한 욕망

이런 자기 파괴는 불교에서 가장 심각한 죄 중의 하나로 간주됩니다. 자신을 불사르는 승려는 용기를 잃은 것도 희망을 잃은 것도 아닙니다. 비존재를 욕망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 반대로, 그는 아주 용감하고 희망에 차 있으며 미래의 좋은 것을 열망합니다. 그는 자신을 파괴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는 타인을 위한 자기희생 행위의 좋은 결과를 믿습니다. 부처님의 전생담인 자타카(Jataka)에서, 굶주려서 자기 새끼를 먹어 치우려하는 사자에게 자기 몸을 내준 부처님처럼, 소신공양하는 승려는 전 세계 인민의 관심을 요청하고 도움을 구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함으로써, 최고의 자비를 수행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소신공양한 승려들이 압제자의 죽음을 목적한 것이 아니라 압제자들의 정책을 바꾸는 것을 목적했다고 나는 진심으로 믿습니다. 그들의 적은 인간이 아닙니다. 그들의 적은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무관용, 광신, 독재, 탐욕, 증오와 차별입니다. 나는 또한 진심으로 믿습니다. 당신(마틴 루터 킹 목사)가 버밍햄, 앨라배마 등에서 주도한 평등과 자유를 위한 투쟁은 백인을 겨냥한 것이 아니라 무관용, 증오, 차별을 겨냥한 것이란 걸 말입니다. 인간이 아니라 이것들이야말로 진짜 인간의 적입니다. 우리의 불운한 조국에서 우리는 절실하게 애쓰고 있습니다. 인간의 이름으로도 인간을 죽이지 말라고요. 제발 도처에 있는 인간의 진짜 적들, 우리의 마음과 정신 속에 있는 진짜 적들을 죽이라고요.

지금, 우리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열강의 대적 속에서, 수백 수천의 베트남 농민과 어린아이들이 매일 생명을 잃고 있습니다. 우리의 땅은 이미 이십년이 된 전쟁으로 무자비하게 비극적으로 찢겨졌습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당신은 평등과 인권을 위한 가장 고된 투쟁에 몰두해왔기 때문에, 당신은 베트남 인민의 형용 불가능한 고통을 충분히 이해하고 공유할 수 있는 사람들 중 하나입니다. 세계의 위대한 휴머니스트들은 침묵에 머물지 않을 겁니다. 당신도 침묵을 유지할리 없습니다. 미국은 미국의 정치적․경제적 독트린이 정신적 요소들을 박탈하도록 놔두지 않을 강력한 종교적 기반과 영적 지도자들을 가졌다고들 말합니다. 당신은 이미 행동을 취해왔고, 칼 바르트(Karl Barth)의 표현대로, 당신속의 신께서도 또한 행위하시기 때문에 당신은 침묵할 리가 없습니다. 그리고 생명 존중을 강조한 앨버트 슈바이처(Albert Schweitzer), 사랑할 용기를 강조한 폴 틸리히(Paul Tillich), 그리고 매카이(Mackay), 니부어(Niebuhr), 플레처(Flethcher), 도널드 해링톤(Donald Harrington). 이 모든 종교적 휴머니스트들과 더 많은 이들은 한 인류가 베트남에서 감내해야만 하는 것 같은 수치의 존재를 옹호하지 않을 겁니다. 최근에, (1965년 4월 20일, 사이공에서) 팃 지악 탄(Thich ch Giac Thanh)이란 젊은 불교 승려가 소신공양을 했습니다. 베트남 사람들이 겪고 있는 고통, 이 불필요한 전쟁으로 야기된 고통에 대한 세계의 관심을 요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전쟁은 결코 필요치 않다는 것을 당신은 압니다. 또 다른 젊은 불교도, 휴 티엔(Hue Thien)이란 비구니가 같은 방식으로 같은 의도로 자신을 희생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의지는 실현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보고 제지했기에 성냥불을 켤 틈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어느 누구도 전쟁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전쟁은 무엇을 위한 겁니까? 그리고 누구의 전쟁입니까?

어제 수업시간에, 내 학생 중 한 명이 기도 했습니다: “부처님, 우리가 서로에게 피해자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도록 우리가 각성하게 도와주십시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무지와 타인들의 무지의 피해자입니다. 타인들의 권력 의지와 지배에 대한 의지 때문에 우리가 상호학살에 더 빠지는 일을 벗어나게 도와주십시오.” 불교도로서 당신에게 편지를 쓰면서, 나는 사랑에 대한 나의 신념, 교감에 대한 신념, 세계의 휴머니스트들에 대한 믿음을 고백합니다. 세계의 휴머니스트들의 생각과 태도는 누가 인류의 진짜 적인가를 발견하는데 있어 모든 인류의 지침이 돼야만 합니다.

1965년 6월 1일
낙 한(Nhat Han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