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뉴스를 접하다보면 한국에 9.11이 터졌나 하는 착각이 든다. 미국의 역사에서 이전 시대에도 정치적 반대자들에 대한 음모적 탄압의 사례가 많지만 9.11이후 그것은 정말 노골적이라 국제인권사회의 지탄을 받았다. 9.11 이후 미국사회에서는 소위 ‘테러와의 전쟁’이란 이름하에 전통적인 시민적 및 정치적 권리의 핵심이 도전받는 일이 많이 벌어졌다.

정부정책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애국심에 의문을 제기함으로써 반대자들을 관용하지 못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조성한다. 결사에 대한 죄를 부과함으로써 정치적 행동을 무력화시킨다. 정부 정보에 대한 접근을 제한하고 비밀주의를 강화함으로써 언론과 대중, 심지어 의회조차도 정부를 견제하기 위한 노력을 하는 걸 방해받는다. 단지 불순한 견해를 갖고 있다는 비밀 정보만을 이유로 시민들에 대한 수사에 착수하는 일이 다반사가 된다. 비밀사찰, 이메일 등에 대한 도감청, 연설 방해, 집회방해, 시민단체의 후원자 캐기, 비시민권자(국내거주 외국인)에 대한 단속과 구금․추방을 강화하기, 시민불복종 행동에 국내 테러라는 딱지 붙여 처벌하기, 인터넷 시대 정치 활동가들에 대한 전자 개인 기록 구축하기, 노벨평화상 수상경력까지 있는 시민단체에까지 “범죄를 일삼는 극단주의자”라는 딱지 붙이기, 툭하면 언론보도를 제한해 달라고 요구하며 언론 길들이기, 이에 굴하지 않는 비판적 언론인들의 밥줄 자르기, 정부가 허위정보 발표를 남발하고 의회에 대한 답변을 거부하기 등이다.(더 자세한 내용은 낸시 챙 지음, 유강은 옮김, 『정치적 반대세력을 침묵시키기』, 도서출판 모색, 2006 참조)

들여다볼수록 남의 일 같지 않은 일이 아닐 수 없다. 한국에서는 최근 소위 ‘밥줄공안시대’라는 말이 나오고 있다. 뭔가 분명하진 않지만 뭔가 권력층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기 때문에 교단에서 쫓겨나고 마이크를 뺏기고 무식하거나 극단론자라는 식의 인물평에 오르고 검찰과 경찰의 수첩에 오르게 된다고들 느낀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말한다. 이런 일들이 목표하는 바는 소위 ‘알아서 기게 만들기’라고. ‘알아서 기기’를 좀 더 공식적인 언어로 하면 ‘자기 검열의 강화’이다. 평생을 검열과 씨름한 체코의 한 작가는 ‘자기 검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세 가지 형태로 구분하여 말한 적이 있다.

첫 번째는 검열과의 싸움이다. 쓰고 싶은 것을 쓰고 말하고 싶은 말하면 절대로 출판도 공연도 가능하지 않으리란 걸 알기 때문에 우회적인 표현을 쓰는 것이다. 자기 사회에 대한 진짜 감정을 직접 표현하지 못하고 우화나 터무니없는 얘기나 환상 같은 얘기로 위장하여 표현하는 것이다. 그렇게 말해도 알아들으려 하는 사람들은 찰떡같이 알아들으리라 생각하고 그리 하는 것이다. 이런 식의 검열과의 싸움에 장점이 하나 있다면 검열을 피할 수 있다는 것과 감춰진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 사람들이 더 열심히 생각할 수 있다는 점이다. 같은 선상에서 요즘 한국의 네티즌들은 ‘반대한다’고 쓸 말을 ‘찬성한다’는 식으로 씀으로써 검열과 싸우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두 번째는 생존 또는 출세를 위한 검열이다. 이것은 다소 복잡하고 슬픈 형태의 자기검열이다. 생존의 수단으로 사용될 때 뭔가에 반대해 말하는 건 어렵다. “죽거나 감옥에 가라, 또는 너의 지위를 영원히 잃어라”라고 도대체 누가 타인에게 명백하게 말하겠는가? 명백한 금지는 없었지만 용기가 부족하거나 두렵기 때문에 스스로 자기검열을 하게 된다. 정치적으로 수용될 수 없거나 단지 불편하게 느껴지기만 할지라도 직업을 잃을지 모른다는 걸 잘 알기 때문에 자기검열을 하게 된다. 자기검열의 대가로 살아남기는 하지만 자신의 고결성을 잃게 된다. 이런 게 슬픈 종류의 자기 검열이다.

세 번째는 표현하는 사람에게 전적으로 책임을 지우는 단계의 자기 검열이다. 표현한 사람을 내치는 것은 단지 작품에 대한 검열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시민으로서 금지하고 추방해버리는 것이다. 이것은 동시에 심오한 해방이 될 수 있다. 금지당하고 추방당함으로써 더 이상 자기 검열을 생존이나 출세의 방편으로 생각할 필요조차 없다. 더 이상 떨어질래야 떨어질 데가 없는 바닥이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과 자신의 작업에 대해 그리고 자신이 바닥에서 바라보고 있는 사회에 대해 책임감을 느끼기 시작한다. 이 지점이 해방감을 경험하게 되는 이상한 지점이다. 표현하길 원하는 모든 것, 진짜로 느끼는 모든 것을 갑자기 쓰기 시작한다. 돈을 못 받더라도 어떤 지위를 얻지 못해도 출판조차 하지 못할지라도 해야만 하는 일이기 때문에 해야 하는 방식으로 글을 쓰게 된다.

위 사진:유엔 고등판무관으로 활동한 그녀에 대한 설명이 유엔 홈페이지에 있다.(http://www.ohchr.org/EN/AboutUs/Pages/Robinson.aspx)

현재 한국 사회는 지금 어떤 종류의 자기 검열을 겪고 있는 것일까? 입만 열면 ‘좌빨’이 되고 제거돼야할 ‘불순인물’ 또는 ‘불순세력’이 돼버리는 현실은 분명 정상이 아니다. 이런 현상이 더욱 위험한 것은 사람들의 입을 막아서 인간다운 생존을 추구할 노력을 억누르는데 있다. 올 초 용산참사가 벌어졌을 때 철거민을 향해 ‘도심 테러리스트’ 운운했던 게 그 생생한 증거이다. 나아가 우리 사회의 진짜 위험원인이 뭐고, 고쳐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보지 않고 ‘헛된’ 적을 지목해서 불안과 공포를 조성하고 희생양을 만들어낸다. 그 희생양은 두말할 것도 없이 사회경제적 약자들이다. 표면에선 몇 몇 지식인과 유명인들이 유탄을 맞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정작 희생양은 사회경제적 소외에 대해 표현하고 고칠 길이 가로막힌 사람들이다.

오늘 읽어볼 인권문헌은 메리 로빈슨(Mary Robinson)의 글이다. 그녀는 1997년부터 2002년까지 유엔 인권고등판무관을 지냈다. 그 이전에는 아일랜드 대통령을 7년간 지냈는데, 국가원수로서는 최초로 집단학살과 인도주의적 위기를 겪은 르완다와 소말리아를 방문한 인물이다. 9.11이후 그녀는 소위 ‘테러와의 전쟁’을 빌미로 인권을 후퇴시키는 조치를 강하게 비판했다. 이에 대한 강연과 글을 여러 차례 발표했는데 오늘 읽어볼 글은 그 중 하나이다. 현재 한국사회가 벌이고 있는 ‘인권과의 전쟁’ 상황에서 곱씹어봐야 할 지적이라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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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 인간 발전, 인간안보를 연결하기

… 남아공 헌법재판소의 재판장 아더 차스칼손이 표현한 대로 “우리는 맨 처음부터 파수꾼이 돼야만 한다. 첫 단계에서 용인한다면 다음에 올 모든 단계는 훨씬 더 법의 지배를 침식하고 인간 존엄성을 무시할 것이다.”

시민의 자유를 급속히 침식하고 이민법을 오용하게 된 9.11의 여파 속에서 미국 의회와 언론은 파수꾼이 되는데 실패했다. 또한 이라크의 아부 그라이브 교도소의 수인 학대에서 명백히 드러났듯이 인간 존엄성을 무시했다.

현재의 안보 문제에 대한 우리의 답은 확고하고 심사숙고하며 일관된 것이어야만 한다. 국제법률가위원회(ICJ)는 좋은 출발을 보여줬다. 2004년 8월 ICJ의 격년 회의에서 전 세계에서 온 160명의 국제 변호사들은 테러리즘과의 전투에서 인권과 법의 지배를 지지할 것에 대한 선언(일명 베를린 선언 Berlin Declaration)을 채택했다.

“테러리즘 억제를 위한 조치를 채택함에 있어, 국가는 형사법과 국제법의 핵심 원칙과 국제인권법, 난민법 및 인도주의 법의 구체적 기준과 의무를 포함한 법의 지배를 엄격히 지켜야 한다. 이들 원칙과 기준과 의무는 테러리즘에 대해 국가가 취할 수 있는 행위의 허용가능성과 정당성의 경계를 정하고 있다. 테러리스트의 행위가 역겨운 성질의 것이라 해도 국가가 국제적 의무, 특히 기본적 인권의 보호라는 국가의 의무를 무시할 수 있는 근거나 구실이 될 수는 없다.” (www.icj.org)

지속적으로 변하는 외교정책 환경 속에서, 소위 테러리즘과의 전쟁이라 부른 것으로 인한 인권의 이익과 비용에 대한 명백한 판단이 곧 분명해질 것이다. 나는 9.11 공격을 위반자를 재판에 회부하기 위해 국제적인 군사, 경찰, 정보의 협력을 요구하는 “반인류적 범죄”라 하지 않고, “테러리즘과의 전쟁”을 요구한 것이 전략적 실수였다고 지속적으로 주장해왔다.

중대한 사건에 대한 우리의 대응을 형성하는데 있어 언어는 결정적이다. 사건을 규정하는 언어가 대응의 성격을 결정한다. 9.11은 “반인류적 범죄”의 관할 하에 있다. … 그런데 “테러와의 전쟁”이란 용어가 사용되었다. 이것은 직접적이고 사악한 함의를 가졌다. 이런 규정은 미묘한 강조점의 변화를 가져왔다. 질서와 안보가 다른 모든 고려사항보다 으뜸이라는 것이고, 이는 민주주의와 인권의 축소와 관련된다.

언제가 돼야 테러와의 전쟁은 승리할 수 있느냐는 질문이 도출된다. 영원한 평화를 위한 영원한 전쟁인가?

미국과 유럽에서 강조점은 국가안보와 테러와의 전쟁 행위에 있다. 그러나 적나라한 현실은 이미 폭력, 질병, 극빈에서 오는 일상적 위험에 시달리고 있는 수백만 사람들에게 9.11이 어떤 영향도 미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들의 불안은 어디서 다음 끼니를 구하나, 어떻게 죽어가는 아이의 약을 구할까, 총을 가진 범죄자를 어떻게 피할까, 10살짜리 AIDS 고아로서 살림을 어떻게 꾸려 갈 것이냐이다.

지난 6년간 전 세계에서 대략 2만5천여 명이 테러리스트의 공격으로 사망했다. 이 숫자를 같은 기간 기아, 말라리아, 그리고 기타 예방 가능한 질병으로 죽은 사람들의 수와 비교해보라. 이런 질병으로 죽는 수는 하루 2만 5천여 명에 가깝다.

진정으로 안전한 세상을 위하여 우리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채택해야 한다. 즉, 우선순위를 옮기는 것, 인간안보의 성취이다. 이것은 인권과 인간발전에 대한 새로운 헌신, 세계의 모든 곳 모든 사람들에 대한 공통의 책임감을 요구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경로의 변경이다. 새로운 접근은 인간과 지구의 안전을 규정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더 넓은 이해 속에서 시작된다. 취약성이 커질수록 인간의 상호의존성이 늘어가며 우리는 이와 균형을 이루는 정책을 만들어야 한다. 남반구와 북반구의 정부들 모두 국가안보를 넘어서서 안보를 광의의 의미로 이해하는 생각과 정책을 확대해야만 한다.

내가 아일랜드 대통령으로서 인식하기 시작(예를 들어 소말리아와 르완다 방문으로)했고 유엔에서의 5년 임기동안 확신하게 된 것은 인간의 모든 불안의 실제적 원인이 개인적 또는 집단적 차원에서 변화를 이끌 수 있는 역량의 부족, 즉 투표나 어떤 식으로든 국가적 의사결정에 대한 참여에서 배제되는 것과 경제적․사회적 소외라는 점이다. 변화의 열쇠는 인민들이 스스로의 삶을 확보하도록 자력화하는 데 있다. 이것을 위해 인민은 지역에서나 전국적으로나 자신들의 정부가 책무성을 갖도록 할 수단을 필요로 한다.

인간안보에 대한 광의의 이해를 아마티아 센과 사다코 오가타가 공동의장인 ‘인간안보에 관한 독립위원회(independent Commission on Human Security)’가 검토했다. 이들의 보고서(Human Security Now, 2003)는 국가안보로부터 인민의 안보, 즉 인간안보로 변환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설명한다.

여기서 인간안보의 두 개의 핵심 개념은 ‘보호’와 ‘자력화’이다. 첫 번째 ‘보호’란 국가의 책임(때로는 국제사회의 책임)으로서 … 인권을 증진하고 소수자의 권리를 보호하고 모든 집단이 대표될 수 있는 정치적 조정을 수립하는 것이다. … 두 번째 ‘자력화’란 자신을 위해 그리고 타인을 위해 행동하는 인민의 능력이다. 자력화된 인민은 자신의 존엄성이 침해받을 때 그에 대한 존중을 요구할 수 있다. 자력화된 인민은 일할 수 있는 새로운 기회들을 창조하고 지역에서 많은 문제들을 다룰 수 있다. 그리고 타인의 안전을 위해 결집할 수 있다.

이 개념은 인권 공동체와 법학자들이 함께 결합할 수 있고 혁명적인 사례를 증진할 수 있는 개념이다. 본질적으로 우리는 풀뿌리 운동을 보다 가시적으로 만들고 풀뿌리 운동에 기반할 필요가 있다. 풀뿌리 운동은 부당한 지구적 거버넌스에 도전하고 자신들의 정부가 식량, 안전한 물, 건강과 교육에 대한 권리를 차별 없이 실현하는데 더욱 더 책무성을 갖도록 인권의 구조를 사용한다.

아마티아 센은 찬사 받은 그의 저작 ‘자유로서의 발전(1999)’에서 말한다.

“때때로 실질적 자유의 결핍은 경제적 빈곤과 직접적 관련이 있다. 경제적 빈곤은 굶주림을 면하고 충분한 영양을 공급받으며, 치유가능한 질병에 대한 치료를 받고, 적절한 옷과 주거를 제공받고, 또한 깨끗한 물과 위생적인 시설을 누릴 자유를 박탈한다. 또 다른 경우 부자유는 공공시설과 사회 보호의 부재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예컨대 생태학적 프로그램, 의료보호나 교육시설을 위해 조직된 기구, 지역 평화와 질서 유지를 위한 효과적인 제도가 없는 경우가 그러한 예이다. 그리고 정치적 권리와 시민적 자유를 부정하고 공동체의 사회․정치․경제적 생활에 참여할 자유에 대해 제한을 가하는 권위주의적 정권 때문에 자유에 대한 침해가 직접적으로 생긴다.”

자유와 인간안보를 이런 식으로 연결 짓는 것은 자원 할당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다. … 발전을 위한 지원은 연간 6백억 달러, 선진국의 연간 농업보조금은 3천억 달러, 군사지출은 9천억 달러로서 여전한 불일치가 있다. 2015년까지 새천년발전목표(MDG: 2000년 유엔특별총회가 채택한 것으로 2015년까지 절대빈곤과 기아의 근절, 초등의무교육 실시 등 8개항에 걸쳐 국제사회의 달성목표를 제시했다) 실천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연간 5백-6백억 달러가 더 필요하다. MDG에 대한 추가 지출이 세계를 보다 안전하게 만든다면 좋은 투자가 아니겠는가?

2003년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이란의 시린 에바디의 인권 보편성에 대한 강조를 부각시킴으로써 결론을 지으려 한다. … “우리의 인권을 존중하지 않으면 우리의 인간성을 해칠 뿐이다. 이런 근본적 진실을 깨뜨리지 말자. 우리가 그것을 깨뜨린다면 약자들은 기댈 곳이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