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정범: 세 개의 공동과 각각의 언어인 공감, 고백 그리고 증언(엄기호 연구활동가)

이 영화에는 ‘공동’이 세 번 등장한다. 그리고 그 세번의 공동을 만들어내는 각각에 대응하는 언어가 있다. 이 글은 공동과 그 각각의 언어가 무엇인지를 보고 영화/글을 쓰고 읽는 우리는 각각의 처지에서 어떤 언어로 무엇의 장치가 되어 어떤 정치를 수행하고 있는지를 돌아보려고 한다. 

첫 번째는 참사가 일어나기 전에 용산 철거민들과 여기에 연대하러 온 다른 지역 철거민들 사이의 ‘공동’이 있다. 두 번째는 참사가 일어난 후 정부에서 이들을 하나로 묶어 처벌하기 위해 붙인 죄목이자 이 영화의 제목인 ‘공동정범’의 그 ‘공동’이다. 그리고 마지막에 김석기를 떨어뜨리기 위해 경주 시내를 돌아다니는 영화의 주인공들 사이에서 희미하게 그림자처럼 보이는 ‘공동’이다.

첫 번째의 ‘공동’을 보자. 이들은 ‘같은’ 철거민으로서, ‘전철연’이라는 같은 조직의 구성원으로서 공동이다. 그래서 이들은 서로를 ‘동지’라고 부른다. 동지란 같은 운명을 공유한 사람이며 같은 곳을 바라보는 사람이다. 그래서 이 공동의 운명을 나눈 사람들이 서로의 어려움을 나누고 각자의 재주로 서로에게 도움을 주는 ‘공동’의 행동을 취한다.

망루는 그 ‘공동’의 상징이다. 이 망루 자체가 공동의 ‘짓기’를 통해 만들어졌다. 전기를 아는 사람이, 용산 당사자가 아니지만 같은 철거민이고 같은 투쟁을 하는 동지로서 전기를 따오고, 또 누구는 다른 그 망루에 자기의 힘을 보탰다. 싸움은 용산에서 일어난 용산의 일이었지만, 그 용산의 일에 마음과 힘을 보태는 것은 철거민 모두의 ‘공동’의 일이었다.

그러나 그 ‘공동’은 정말 공동이었을까? 아니었다는 것이 중간 중간 철거민들의 인터뷰에서 드러난다. 그들은 말한다. 일이 그렇게까지 진행될 것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고 말이다. 게다가 그렇게 농성을 하는 계획도 몰랐다고 말한다. 그래서 이들은 자신들의 공동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자신들에게도 투명하게 ‘공동’이 아니었다는 것을 참사 이후에 알게 된다.

여기서 이 ‘공동’의 허상이 드러난다. 운명을 공유하는 것으로서의 공동에는 핵심과 주변이 있을 수 없다. 공동의 생명은 위/아래도, 핵심/주변도 아닌 둥글게 마주 앉는 평등이다. 둥글게 마주 앉아 모든 것을 ‘같이’ 결정했을 때 그 공동은 책임을 같이 지는 ‘공동’이 된다. 그 책임은 일을 같이 논의하고 결정했다는 의미에서 ‘공동’ 책임이 되는 것이며 또한 서로가 서로에게 책임을 진다는 의미에서 비로소 ‘공동’이 된다.

그럼 이번에는 이 공동을 만들어내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자. 좋게 말하면 입장이고 나쁘게 말하면 이해관계다. 철거민이라는 공동의 입장이 공동의 이해를 만들어내고 그것이 용산과 다른 지역이라는 공간을 가로지르며 ‘공동’을 만들어낸다. 그렇기에 이 ‘공동’은 간단하게 자동적으로 만들어진다. 이해관계가 같거나 혹은 입장이 같으면 이 영화에서도 반복적으로 서로를 부르는 말인 ‘동지’가 되고 이 동지들은 차이를 넘어 ‘연대’하게 된다.

입장과 연대 그리고 공감에 대해 가장 많이 인용되는 말 중의 하나가 돌아가신 신영복 선생님이 하신 ‘입장이 같다는 것은 비를 같이 맞는 것’이라는 말이다. 비를 같이 맞는 것은 말하지 않지만 같은 곳에 서 같은 어려움을 겪는 것이며 이게 연대라는 것이다. 이 말은 쉬운 말로 연대를 말하는 것을 경계하며 연대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상기시키는 말로 곧잘 인용되곤 한다.

이렇게 같은 입장이 되어 비로소 서로를 ‘동지’라고 부르고 ‘연대’할 수 있게 하는 언어는 무엇일까? ‘공감’이다. 이미 철거민들은 같은 망루에 서지 않더라도 같은 처지이다. 같이 비를 맞지 않더라도 이미 다른 곳에서 같은 비를 맞고 있는 사람이다. 그렇기에 서로의 처지를 너무 잘 알고 있고 그 처지에서 비를 같이 맞고 피하기 위해 망루를 짓고 함께 또 비를 맞는다. 그렇기에 같은 처지라는 입장의 동일함에서 아픔을 공유하고 함께 이기려고 것으로서의 ‘공감’이 ‘공동’을 만들어낸다.

이 영화는 이 ‘공감’을 확 쳐낸다. 같은 고통을 공유하고, 같은 처지에서 같은 비를 맞은 사람들이 모여 더 큰 비를 같이 맞으며 ‘같은’ 고통을 경험했다고 하더라도 서로 공감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공동’이 만들어지지도 않는다는 것을 용산 참사 현장에 있던 이들을 통해 보여준다. 같은 아픔을 겪고 비를 같이 맞았다고 공감은커녕 반목과 불신만 생긴다. 서로의 아픔을 공유하기는커녕 그것을 더 공유할 수 없다는 것만 확인한다. 

그 결과 처지의 같음에서 연대하던 ‘공동’의 사람들은 낱개로 파편이 되어 밀려난다. 자신들의 공동이 허상이고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부터 자신들이 얼마나 고독으로 밀려났는지를 말이다. 사람을 믿을 수 없고, 사람을 가까이 할 수 없고, 사람에게 말을 할 수 없다. 차라리 벽을 보고 이야기하는 것이 편하다. 신에게 귀의하는 것이 편하다. 이 모든 것이 나의 잘못이라고 말하고 용서를 받는 것이 영혼에 파스를 바른 것처럼 시원하게 한다. 말도 못하지만 자기가 손을 주는 만큼 정직하게 잘 자라는 식물과 달팽이만이 위로가 된다. 

이것을 통해 우리는 공감에 대한 반대편의 진실에 도달한다. 아픔에 대한 동참을 통해 연대를 만들어내는 공감은 같은 처지가 아닌 사람들 사이에서나 가능하다는 것이다. 즉 아픔을 공유하고 함께 할 때, 함께 아픔을 겪는 이들 사이에 공감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아픔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 아픔을 같이 겪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서나 ‘공감’은 가능하다. 같은 일을 겪으며 아파본 사람은 안다. 그것이 절대 나눌 수 없는 고통이라는 것을 말이다.

고통의 나눔, 공감은 신과 달팽이, 그리고 식물하고 가능한 것이지 인간 사이에서는 가능하지 않다. 이것은 인간 존재의 근본적 외로움 따위의 말이 아니다. 반대로 고통을 통한 공감, 고통을 통한 연대라는 것이 그 수사의 따뜻함과 아름다움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불가능한 것인지, 그 불가능을 직시하지 못할 때 얼마나 추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당신이 누구의 고통에 공감하고 그 고통에 함께함을 통해 연대하고자 한다면 신처럼 되거나, 달팽이처럼 되거나 혹은 식물이 되어야 한다. 

많은 이들이 상찬하고 있는 이 영화의 ‘성취’가 여기에 있다. 고통과 연대, 공감에 대해 함부로 이야기하지 말라. 그러 공감은 당신이 신/달팽이/식물이 되지 않는 이상 가능하지도 않거니와 사람과 세상을 더 추하게 만들 뿐이다. 같은 운명의 사람들이, 같은 어려움과 아픔을 겪은 사람들 사이에서도, 아니 오히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아픔을 통한 연대는 공감이 아니라 불신과 반복의 지옥도를 만들어낸다.

두 번째의 공동은 정부에 의해 만들어진 ‘공동’이다. 용산 참사의 총책임을 맡아야하는 정부는 참사의 피해자인 이들에게 ‘공동정범’이라는 죄를 뒤집어 씌운다. 왜 하필 이들에게 부과한 죄목이 ‘공동정범’이었을까? 정부가 이들에게 ‘공동’의 혐의를 씌운 것은 영화에서 말하듯이 앞으로의 투쟁을 봉쇄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었다. 앞으로 같은 일이 벌어진다면 투쟁에 나선 사람 모두에게 책임의 위계를 묻는 것이 아니라 공동의 책임을 묻겠다는 것 말이다. 이렇게 두 번째의 공동은 행위자들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공동이 아니라 행위자를 위협하기 위해서 정부로부터 만들어지는 강제된 범죄자로서의 ‘공동’이다.

또한 바로 이 ‘공동’으로부터 이미 연루되어 처벌을 받게 되는 사람들은 분열시키고 반목하게 하는 힘이다. 앞에서 이야기한 첫 번째의 공동이 깨지면서 동시에 두 번째의 공동이 부과되면 연루되어진 사람들은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묻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왜 저 자와 똑같이 처벌받아야 하는가? 저 사람의 책임은 어디에 갔는가? 그가 먼저 자신의 책임을 고백한다면 그 이후에 나는 그와 함께 하겠다.

이 영화가 묻는 것이 바로 이 부분이다. 첫 번째의 공동이 깨어지고 두 번째의 공동이 강제될 때 공동의 의미는 무엇이고 어디에 있느냐는 것이다.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한마디로 공동은 없다는 것이다. 다른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한 것처럼 이 영화에는 그런 공동을 가능하게 하는 ‘영웅’도 등장하지 않으며 다른 이를 공동으로 엮어내는 ‘거룩한 희생자’도 없다. 다만 서로 반복하고 불신하며, 공동이라고 믿던 것이 공동이 아니었음을 증명하는 이야기들만 나온다.

이 영화는 말한다. 공동이라는 것은 얼마나 불가능한 것인지를 말이다. 그리 쉬웠던 공동이, 참사 이후에는 오히려 한 번 만나는 것조차 힘든 것이 된다. 한 쪽에서는 만나는 것을 반대하고 방해하는 사람이 있다고 분노한다. 다른 쪽에서는 그렇게 만나는 것이 무슨 ‘공동’이냐고 묻는다. 한 쪽은 만나서 소주도 한 잔하고 서로 마음을 터놓아야 다시 공동을 만들 수 있는 것 아니냐고 묻는다. 다른 쪽은 그런 공동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날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만나는 그런 공동만이 진짜 공동이 아니냐고 되묻는다.

정권이 이 ‘공동’을 만들어내는 언어가 ‘고백’이다. 재판의 와중에 범죄인들에게 요구되는 것이 바로 고백이다. 고백을 통해 먼저 자기의 죄를 털어놓아야 한다. 그런데 범죄인들이 자기의 죄, 즉 개별의 낱낱의 죄를 토해놓지 않는다. 그럴 때 그 낱낱을 묶어 한꺼번에 죄를 물을 수 있는 것이 바로 ‘공동정범’이라는 죄목이다. 앞의 공동이 허상이었다면 이 공동은 권력의 올가미다.

그러나 영화에서 우리는 이 ‘고백’이 정권뿐만 아니라 참사의 당사자들에게서도 반복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용산에 연대하러 갔던 철거민들은 ‘진실’을 알고 싶다는 말로 고백을 요구한다. 그들은 누가 망루 안으로 들어가라고 말했는지, 누가 맨 먼저 뛰어내렸는지 등이다. 이를 통해 누군가가 이것이 내 책임이라고 말하고 시인한다면 그 고백에 기초해서 다시 공동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자신들은 그 모든 일에 그저 휩쓸린 사람이기 때문에 전체에 대해 책임을 질 사람이 입을 열어야 한다고 말한다. 진실이 고백되었을 때 비로소 ‘함께’ 할 수 있고 ‘공동’은 복원될 수 있다.

그러나 반대쪽에서는 절대 그것을 말할 수 없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용산 참사 현장에서 벌어진 ‘사실’에 대한 이야기일수는 있지만 ‘진실’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가 피해자로서 모든 혐의를 부인한 것도 바로 그 이유라고 말한다. 자기가 책임이 있다고, 아니 더 큰 책임, 혹은 원초적인 책임이 있고 책임을 져야한다고 말을 하는 순간 진짜 책임을 져야하는 권력이 빠져나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앞의 사람들이 말하는 진실은 진실이 아니라 사실이며, 그 사실에 집착하는 한 진실은 빠져나가버린다며 완강히 거부한다. 그에게 고백은 진실로 나가는 문이 아니라 진실을 덮는 것일 뿐이다.

진실과 사실, 혹은 한 쪽의 진실과 다른 쪽의 진실이 대립하고 그 간격이 커질 때 오리무중이 되는 것은 진실 그 자체다. 사실의 퍼즐들을 맞춘다고 진실이 되는 것도 아니고 진실이 사실 모두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는 것도 아니지만 사실과 진실이 대립하고 만남의 장이 사라지면서 사실을 조작하여 진실을 허구로 만들어낸 쪽이 사람들의 시야에서 사라진다. 정권이다. 사실도 필요 없고 진실도 필요 없는 쪽이 이긴다. 그래서 이들은 오로지 정부에 의해 만들어진 정범으로서의 ‘공동’만 남는다.

진실을 통해 공동을 만들어내는 언어로서의 고백. 여기서 우리는 세 번째 고백을 요구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감독과 관객이다. 아마 한국의 다큐멘터리 대부분이 취하는 방법이 이것일 것이다. 카메라는 집요하게 인터뷰를 하는 사람이 ‘고백’할 것을 요구한다. 그래서 카메라는 인터뷰를 할 때 항상 얼굴을 찍는다. 그가 하는 말이 진실인지 아닌지를 카메라는, 그리고 카메라를 통해 관객은 그 얼굴을 통해 가늠하려고 한다. 

이 영화를 보면서도 아마 많은 관객들은 인터뷰에 참여한 사람들의 눈동자와 표정을 살피며 그 고백의 ‘진실’ 여부를 판단하려고 하였을 것이다. 다큐멘터리의 카메라는 고백의 도구다. 우리 모두는 그들을 ‘취조’하는 형사, 즉 국가기관이다. 국가기관이 허접하기 때문에 우리가 그 국가를 대행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고백은 국가가, 동료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관심 있는 우리 모두가 요구하며 모두를 국가로 만든다. 

이 영화에 대한 가장 큰 상찬은 바로 이 고백을 강요하는 취조의 도구로서의 카메라이기를 그만둔다는 것이다. 물론 영화는 집요하게 인터뷰이를 몰아붙인다. 그래서 그들의 진실을 살핀다. 그러나 (정성일 평론가가 지적한 것처럼) 딱 한번을 제외하고는 그 진실을 고백하는 순간 – 즉 눈물의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 일부로 카메라를 돌리지는 않는다. 카메라는 고백의 장치가 되는 것을 완강히 거부하고 있다.

고백은 ‘죄인’이 자신의 책임을 인정하는 것만이 아니다. 흔히 토로라고도 말하는 고백은 인터뷰이를 ‘피해자’로 완성한다. 인터뷰이들이 최종적으로 카메라 앞에서 보이는 것은 자신이 겪은 아픔이 얼마나 고독한 것인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것이 ‘눈물’로 상징된다. 고통은 말할 수 없다는 것, 그리고 그것은 온전히 홀로 겪어야 하는 고통이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을 통해 피해자는 피해자로 완성된다. 숭고한 피해자로 말이다. 

대부분의 인터뷰-참여관찰을 통한 서사가 달려가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고통을 호소하는 피해자를 고통은 말할 수 없는 것이라는 고백을 하는 숭고한 피해자로서 재현/완성하는 것으로 서사는 숭고하게 끝난다. 피해자가 숭고해져야 서사도 숭고해진다. 서사가 숭고해져야 서사를 읽거나 보는 이도 숭고해진다. 이 숭고에 동참하는 것으로 ‘공감’이 발동하고 ‘공동’이 만들어진다. 

고백을 통해 용서할 수 없는 타락한 죄인과 누군가와 결코 나눌 수 없는 고통을 토로하는 숭고한 피해자가 만난다. 타락한 죄인과 숭고한 피해자는 한 쌍을 이룬다. 그 쌍을 만들어내는 언어가 바로 ‘고백’이다. 이 고백을 통해 이윤을 챙기는 것은 그들에게 진실을 강요하는 국가이며 그들의 얼굴을 통해 진실을 재판하는 관객이다. 고백은 국가와 관객을 하나로 묶는다.

그렇다면 공동은 정말 불가능한 것인가? 그렇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기도 하다. 관객은 이 영화의 끝에서 다시 새로운 공동의 그림자를 본다. 진상을 밝히기 위해 이들이 다시 둥글게 모여 앉는다. 첫 번째 모임은 고성과 반복으로 더 큰 상처만 남긴다. 그리고 두 번째 모임에서 이들은 비로소 둥글게 앉아 ‘이야기’를 나눈다.

첫 번째에서는 서로에게 진실을 추궁하던 이들이 두 번째 모임에서는 사실을 가지고 조각을 맞추기 시작한다. 이때 이들은 머리를 맞댄다. 왜냐하면 모두가 자기의 기억, 즉 각자의 사실이 전체에 대한 진실이 아님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누구보다 그 날의 전체, 즉 진실에 대해 목마른 사람들이 그들이기에 서로의 조각에 기대 각자의 조각을 내놓고 빠진 부분을 찾아간다. 그 과정에서 공동‘정범’을 부인하기 위해 말하지 않던 것과, ‘공동’정범임을 부인하기 위해 상대에게 추궁하던 것을 내려놓는다. 위와 아래, 안과 바깥이 아닌 둥근 공동의 작업이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김석기에 맞서기 위한 공동의 행동을 편다.

여기서 우리는 허상으로서의 공감과 국가 장치로서의 고백을 넘어 서로를 만나게 하고 ‘공동’을 가능하게 하는 새로운 언어를 만나게 된다. 나는 이것을 ‘증언’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흔히 증언을 자기가 경험한 것을 말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자기가 자기의 증인이 되는 것, 그러나 나는 이미 자기가 자기를 증언할 때 이것을 국가처럼 보고 그 진실을 판단하려는 카메라와 관객이 개입하는 순간 증언이 증언이 아니라 국가 장치인 고백이 되어버린다는 것을 앞에서 말했다.

증언은 내가 나에 대해, 내가 겪은 것을 타자 앞에서 말하는 것이 아니다. 증언은 내가 아니라 남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 영화의 말미에 인권활동가 박래군과 함께 비로소 만난 참사의 당사자들이 하는 것은 서로의 기억을 맞추는 것을 통해 서로를 ‘폭로’하는 것도 서로에게 ‘고백’을 강요하는 것도, 자기를 ‘토로’하는 것도 아니라 서로에 대해 ‘증언’하며 서로의 기억을 북돋아주고 진실을 드러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게 하는 것이다. 당사자들의 증언이 당사자들에 대한 폭로나 당사자의 고백과 다른 지점이 여기에 있다. 진실을 두려워하지 않고 용기를 내게 하는 것, 그것을 나는 증언이라고 부른다. 

물론 이 증언은 위태롭다. 고통을 공유한 사람들끼리도 타인에 대한 증언이 타인에 대한 폭로가 되는 것은 한순간이다. 또한 아무리 용기를 북돋는다고 하더라도 진실을 마주 대하는 두려움은 증언을 거부하게 한다. 증언의 이름으로 거짓이 만들어지기도 한다. 그렇기에 서로에게 진실을 향한 용기를 북돋는 증언은 매우 힘들고, 아주 희박하다. 증언은 폭로로, 고백으로 타락하기 딱 좋다. 당사자들에 의해서도 그렇지만, 진실을 기록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도 말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물어야하는 것이 바로 기록하는 자, 영화라면 감독일 것이고 책이라고 하면 저자, 둘을 묶어낼 수 있는 전통적 언어로는 지식인/활동가일 것이다. 결국 이 이야기는 돌고 돌아 민중 혹은 피해자 혹은 서발턴을 기록하는 자로서의 지식인/활동가의 언어, 지식인의 윤리에 대한 이야기가 된다. 사르트르와 사이드, 그리고 스피박 등이 궁극적으로 물을 수밖에 없었던 자기 자신에 대한 이야기, 영화/글쓰기의 윤리, 아니 그 글쓰기의 정치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 

‘우리’는 고백을 강요하는 국가 장치의 일부가 될 것인가, 아니면 공감에 대한 환상을 유포하는 '사회'의 이데올로그가 될 것인가. 저 국가 정치를 거부하는 것이라면 이 영화는 무엇을 ‘증언’하고 있는가? 이 영화는 고백과 공감의 정치를 거부하고 증언의 ‘장치’로서의 ‘정치’를 하고 있는가? 감독들은 관객에서 무엇을 보았다고 증언하고 있는가? 그리고 이 영화를 본 관객으로서의 우리는 이 영화에 대해 또 무엇을 증언할 것인가? 과연 증언의 ‘공동’은 만들어지고 있고, 만들어질 것인가?

첫 번째의 허상으로서의 공동, 두 번째의 올가미로서의 공동에 이은 이 세 번째 희미하게 등장하는 이 공동은 증언의 공동일까? 그렇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할 것이다. 진실은 여전히 밝혀지지 않았고 사람들의 마음은 치유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것은 김석기라는 ‘악’에 맞서기 위한 잠정적인 휴전일 수도 있을 것이다. 말을 서로 나누자고 하지만 말할 수 없는 것을 소주의 힘을 빌려 빙빙 말할 수밖에 없는 이들과, 그런 말이 무슨 의미가 있냐는 싸움이 반복될 수 있을 것이다. 그 안에서 ‘공동’이 아닌 ‘고립’이 더 심화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우리가 공동에 대해 그리 쉽게 첫 번째로 돌아갈 수 없는 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이 영화 이후에 우리는 다시는 첫 번째의 공동을 공동으로 여길 수 없게 되었다. 또한 쉽게 저들의 농간에 말려 두 번째의 공동을 받아들일 수도 없게 되었다. 첫 번째의 공동이 ‘동지’와 ‘연대’라는 이름의 공동이었다면 두 번째의 공동은 ‘우리 안의 박근혜’류 따위의 공동이다. 첫 번째의 공동은 언제나 위와 아래, 핵심과 주변으로 나눠진 공동이었으며 두 번째의 공동은 고상하고 성찰하는 척 하는 공동이었지만 그 공동은 언제나 저들에 의해 ‘정범’으로 묶이는 공동에 불가능하다는 것을 말이다.

그렇다면 세 번째의 공동은 무엇인가? 이 영화는 그림자처럼, 마지막에 지나가듯이 희미하게 보여주지만 그 공동은 뚜렷하다. 그 누구도 진실을 소유하고 있지 않으며, 그 소유하지 않은 진실은 누구에 의해 독점되며 선포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각자가 가진 사실/진실의 파편들로 머리를 맞대고 퍼즐을 맞추며 나가야하는 하나의 과정이라는 것을 말이다. 가운데를 비우고, 서로 머리를 맞대고 진실을 향해 조각을 맞춰가는 것, 이것을 민주주의라고 말하고 그것을 사회운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주인공도 아니고 중심인물도 아니지만 이 영화에서 필연적으로 등장할 수밖에 없는 인물/운동이 있다. 그가 등장하지 않았다면 이 영화는 정성일이 말한 것처럼 길이도 맞지 않고 서사도 일관되지 않은 여러 에피소드들의 조각들로 산만하게 흩어질 것이다. 다소 엉뚱하게 느껴지겠지만 영화의 말미에 반짝 등장하여 고백과 공감을 넘어 서로에 대해, 진실에 대해 용기를 내게 하는 인권활동(가 박래군)이다. 그가 이 과정에 대한 증언자로 되고, 희미하게나마 사람들을 증언자로 묶어내고 있었다. 여기가 인권활동의 자리가 아닐까. 

나는 인권활동의 위태로움을 늘 경험하는 인권활동가 동료들이 우리의 언어가 무엇이고 우리가 무엇이 되어야하는지를 되묻기 위해 꼭 보았으면 한다. 우리가 미끄러지지 않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