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아직' 인간이 아니다

영화 <추격자>는 연쇄살인범과 그를 쫒는 전직 형사의 이야기를 담은 액션 스릴러물이다. 영화는 누가 연쇄살인범인지를 미리 다 보여주고서도 극적 긴장감을 떨어뜨리지 않아 관객들을 ‘갖고 논다’는 평을 들을 정도로 2008년에 개봉된 영화중에서 수작으로 꼽힌다. 이 영화는 2003년부터 2004년까지 21명을 살인하여 한국을 떠들썩하게 한 유영철 사건에서 모티브를 따 사이코패스인 살인자를 ‘포주’이면서 동시에 ‘추격자’인 안티히어로의 대결구도가 주된 줄거리이다.
이 영화를 학생들과 함께 보며 ‘누가 인간이고, 누가 짐승인가’라는 것을 중심으로 하여 토론을 하였다. 2009년에 터진 강호순 사건에서 처음으로 죄가 확정되기 전에 강호순의 얼굴이 언론에 공개되면서 논란이 된 ‘범죄자의 인권’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가며 인권이라는 말이 그리 쉽고 만만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학생들에게 환기시킬 목적이었다.
사실 강호순 사건을 다루는 한국의 보수 언론의 태도는 대다수가 대단히 이중적이었다. 사실 ‘진보’ 언론에서는 인권은 원칙의 문제이며 원칙은 절대 예외를 두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하며 나름 일관성을 유지하려고 하였다. 얼굴을 공개하면서 조중동을 필두로 한 보수언론들은 ‘짐승에게 무슨 인권인가?’라고 단언하였다. 강호순은 인간의 탈을 쓴 짐승이며 짐승의 인권을 보호한다는 이름으로 인간의 분노를 억압하지 말 것을 선동하였다.

그런데 강호순을 짐승이라고 단언하던 이 보수언론들도 끊임없이 강호순에게서 인간적인 면모를 찾기 위해서 부던히도 노력하고 있었다. 강호순이 ‘내 얼굴이 공개되면 내 학생들은 어떻게 살라고...’라는 말을 하던가 혹은 ‘책을 써서 학생들에게 인세를 주겠다’는 말을 했을 때도 한편에서는 뻔뻔하다고 성토를 하면서도 다른 한편에서는 그에게도 인간적인 면모가 있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사실 사이코패스는 다른 인간에 대한 공감능력이 전혀 없는 사람이다. 그가 학생들을 이름을 지속적으로 거론한 가장 큰 이유는 그것이 자신을 돋보이게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학생들을 염려한다면 그는 이미 사이코패스가 아니기 때문이다. 언론들은 사이코패스가 공감능력이 전혀 없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왜 스스로 그것을 부정하려고 하였을까? 이런 이야기를 학생들과 하면서 ‘인간’과 ‘인간적인 것’의 차이와 간극에 대해 토론하면서 우리가 한 편에서는 ‘구체적인 인간’은 어떻게 죽이면서 ‘추상적인 인간’은 왜 살리려고 하는지, 인간에 대한 우리들의 이중적인 태도를 한 번 학생들과 토론하려는 의도였다. 학생들에게 ‘이 살인자는 인간인가 짐승인가, 그리고 이 영화에서 인간이라고 부를만한 사람이 있다면 누가 인간인가?’라는 토론 주제를 제시하였다.
그런데 학생들의 쪽글을 받아보면서 나는 내가 처음에 가지고 있었던 생각을 많이 수정해야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우리는 흔히 요즘 학생들이 도덕과 윤리도 없고, 인간과 생명에 대한 존중심도 전혀 없는 엉망진창이라는 생각을 많이 한다. 그런데 학생들이 정의하는 인간과 짐승의 결정적인 차이는 ‘도덕심’이었다. 학생들은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이유는 다른 인간을 존중하고 배려할 줄 아는 것이며, 그것이 사회를 지키고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단언하였다.
학생들은 인간은 ‘실수에서 배우고, 나쁜 짓을 한 것을 후회하고 반성하며 좀 더 나아지려는’ 존재이며 동정하는 마음이 없는 것은 짐승보다 더 하위라고 지적하였다. 인간은 ‘본능적 욕구를 참으면서 사회를 유지’하는 존재이며, 이것이 '인간이 침팬지와 유전자 유기배열이 94.8%가 일치하지만 다를 수 있는 근거'가 된다. '늑대인간의 손에 키워진 아이는 인간으로 죽은 것이 아니라 늑대로 죽었다'고 한 학생은 이야기한다. 결국 인간이란 인간들 사이에서 세상속에서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 속에서 살아가기 위한 인격성과 사회성을 갖추지 못했다’면 인간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학생들이 인간에 대한 공감능력을 인간의 가장 큰 능력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점은 포주이자 추격자에 대한 평가에서 더욱 명료하게 들어난다. 학생들은 대부분 이 영화에서 가장 인간적인 인간으로 포주-추격자를 꼽았다. 학생들의 말로는 이 인간도 ‘쓰레기’이기는 매한가지이지만 스토리가 전개되면서 자기가 착취하던 여성에 대한 연민과 그 딸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면서 목숨을 아끼지 않은 것이 바로 그가 인간이라는 증거라고 이야기하였다. 처음에 그가 추격을 시작한 이유는 ‘자기 재산인 성매매여성을 가로챈 인간으로부터 재산을 되찾아 오려는’ 순전히 금전적인 것이었지만 서서히 성매매 여성과 그녀의 딸이라고 하는 ‘사람을 구해야한다는 이유’로 바뀌어 가는 모습에서 학생들은 ‘인간’을 발견하였다.
학생들과의 이런 토론은 나로 하여금 인간과 인간이 되는 것에 대한 우리의 교육이 어떤 문제점을 가지고 있는지를 돌아보게 하였다. 먼저 학생들의 이런 생각을 읽고 토론하면서 우리 도덕 교육이 왜 망하고 있는지를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학생들은 이미 충분히 도덕적이며, 인간이 도덕적으로 살아야한다는 것을 안다. 그런데 거기에 너희가 도덕적이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를 하는 것으로는 결코 학생들에게 진지하고 의미 있게 다가갈 수가 없다. 이미 자신들도 그렇게 살아야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데 거기에 무엇을 더 더해야하나? 여기에 더 더하는 것은 사족에 불과하다.
또한 학생들이 도덕적으로 살아야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것은 소용없고 실천을 하게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주장도 문제가 많기는 매한가지이다. 사유를 실천과 분리하는 것을 통해서는 결코 자신에 대한 진지함에 도달할 수 없다. 만약 학생들이 너무 잘 알고 있음에도 문제가 되는 것이 그것을 실천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때려서라도 알고 있는 것을 실천하게 하기위해서 몽둥이를 들어야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위의 토론을 통해서 사유는 학생들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놓치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게 하는 과정이라는 점을 알게 되었다. 실천은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던 것들이 무엇을 구체적으로 놓치고 있는지를 진지하게 사유하면서 촉발될 수 있다.
아이들이 잘 알고 있으면서 놓치고 있는 것을 잡아내기 위해 학생들의 쪽글에 묻혀 있는 여러 가지 가능한 이야기들 중에서 학생들의 사고를 좀 더 끌어갈 수 있는 것으로 ‘공감 능력’을 잡았다. 사실 요즘 학생들이 타자에 대한 공감능력이 없다고 많이 이야기되는 터라 그들의 공감능력이 구체적으로 누구에게는 작동하고 누구에게는 작동하지 않는지를 같이 생각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것을 이어보기 위해서 학생들에게 일단 잠재성과 활력, 그리고 환대라는 말을 소개하였다.
우리들의 공감능력은 우리 안에 잠재되어 있는 능력이지 이미 밖으로 다 들어난 것이 아니다. 이 잠재되어 있는 능력을 밖으로 끌어내는 능동적인 힘이 활력이다. 우리의 잠재된 공간능력이 활력이 되어 밖으로 분출되어 나왔을 때 우리는 남을 환대하게 된다. 환대는 나의 장소에 그를 환영하는 것이다. 그에게 나의 장소에서 살 수 있도록 허락하고 나의 장소를 그와 공유하며 ‘우리의 장소’로 만드는 것이 환대의 행위이다. 결국 구체적으로 누구를 환대하고 누구를 환대하지 않는가는 잠재능력인 공감이 언제는 작동하고 언제는 작동하지 않는가를 구체적으로 드러내 보여준다.
아이들은 자신들의 난삽한 언어가 철학자들의 개념과 통한다는 말에 눈을 반짝인다. 여기에서 내가 발견한 우리의 편견중의 하나가 아이들은 개념어를 싫어한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많은 경우 빠지는 또 하나의 잘못된 유혹이 ‘비판과 정리’이다. 사유는 개념의 운동이다. 그런데 사유를 촉발시키면서 개념을 제공하는 것을 학생들이 어려워하고 따분해한다며 ‘만담’만 하다가 끝나는 경우가 많은데 이것은 일방적인 주입식 교육만큼이나 문제다. 그것을 경험나누기라고 미화하는 경우가 있는데 학생들의 지적 성장을 막는 아주 잘못된 방식이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오히려 나는 이런 수업을 진행하면서 개념을 적절하게 제시함으로써 사유를 확장을 촉진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단 그 개념의 제시가 학생들의 견해를 밖에서 비판하고 정리하는 것이어서는 안된다. 우리가 의지해야하는 사유의 출발점은 학생들의 상투적 생각이 열어놓는 확장 가능성이다. 학생들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사고를 확장하여 구체적인 상황에 놓고 분석할 수 있는 좋은 개념들을 제시해 주는 것이다. 이럴 경우 학생들은 자기 사고를 극한까지 끌고 가서 자신의 생각이 어떻게 스스로 곤혹에 처하면서 전복되는지를 보면서 자발적으로 사유에 매혹된다. 그리고 이 매혹이 학생들의 사유에 대한 잠재력을 활력으로 이끌어낸다.
학생들과 함께 우리들이 환대할 수 있는 존재들과 환대할 수 없는 것들, 또 제한적으로 환대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지에 대해서 리스트를 만들어보았다. 흔히 많이 이야기하는 우리 시대의 타자들, 즉 이주노동자나 성소수자, 그리고 다양한 형태의 ‘이방인들-괴물’에 대해서 얼마나 공감을 하고 살아가는지, 그리고 공감하지 않는다면 왜 그런지에 대해서 토론하였다. 그중에서 성소수자에 대한 이야기는 논리적이라가보다는 감정적이고 종교적인 이유가 많아서 토론을 하기에는 적절하지 않았다. 대신 이주노동자에 대한 이야기가 나름대로의 논리를 가지고 다양한 의견으로 갈렸다.
학생들의 견해는 우리사회의 일반적인 의견들과 다르지 않다. 물론 극단적으로 그들 모두를 추방해야한다는 견해는 없었다. 그들도 인간이니 우리는 인간으로써 그들 모두를 환대해야한다는 소수의 학생들과, 그들도 인간이지만 우리 사회의 시민은 아니기 때문에 적절한 선에서 환대해야한다는 의견으로 갈렸다. 수업에서 실험한 것은 이들의 어떤 정치적으로 맞는 견해인지를 판가름하는 것이 아니라 각 견해를 극단적으로 끝까지 밀고가 보았을 때 어떤 곤혹스러운 상황에 우리가 처하게 되는지를 학생들과 함께 토론하는 것이었다.
학생들이 제시하는 가장 중립적이고 합리적으로 보이는 견해는 일단 우리는 이주노동자를 환대해야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환대는 한국경제를 해치거나 한국민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범위로 제한되어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환대를 하다가 우리 사회 전체가 붕괴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견해를 끝까지 밀고 갔을 경우에 부딪치게 되는 곤혹스러운 상황에는 나찌의 사례가 있었다. 나치는 인간이기에 앞서 내가 ‘속한’ 공동체의 이익이 우선이라는 것을 극단적으로 주장하였다. 내 이웃이 유대인이고 그가 자신이 유대인임을 숨겨주었을 때 나치 치하의 ‘독일인’이 되기 위해 그를 고발하여야 할 것인가, 아니면 인간으로 남기 위하여 그와 함께 처벌받아야할 것인가.
추상적으로 생각하였을 때 인간과 독일인의 관계는 집합과 부분집합의 관계이다. 그래서 인간이 되는 것과 독일인이 되는 것이 서로 모순적이지 않았다. 그러나 학생들이 이야기하는 구체적인 ‘현실-이주노동자들을 다 환대하는 것은 ‘현실적’이지 않다는 그 ‘현실’-’에서 인간과 독일인의 관계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는 대립적 관계가 되어버렸다. 이 길을 따르면 우리는 자신의 논리에 의해 스스로가 인간이 되는 것을 포기하고 독일인‘만’ 되는 것을 선택하게 된다. 이럴 경우 우리들의 인간에 대한 환대는 결국, 국경이나 국적에 갇힌다. 우리의 인간에 대한 공감능력은 보편적 인간에 대한 공감능력이 아니라 국경, 국적, 성별, 성, 인종, 종교에 의해 차별화된 공감에 불과한 것이 되어버렸다.
반대로 모든 이주노동자들을 다 받아들이고 환대해야한다는 학생들의 주장도 극단적으로 전개하여 어떤 곤혹에 우리가 처하게 되는지를 따져보았다. 등록이건 미등록이건 이주노동자들을 다 받아주어야 한다는 것에 대해 찬성하는 학생들은 ‘인도주의적-그들도 인간이다!’이고 ‘자유주의적-그들에게는 자유가 있다!’는 입장이다. 그렇다면 그들도 인간으로서의 보편적 권리를 제한없이 다 가져야한다. 이를테면 여기에는 가족구성권과 같은 것이 있다.
처음에는 당연히 그들에게도 가족을 구성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을 하다가도 그 가족의 의미가 우리와 달라지는 순간부터는 이것이 그리 만만하지 않다는 곤혹스러움에 빠졌다. 예를 들어 필리핀이나 많은 동남아시아의 전통적인 가족이 50명이 넘을 수 있는 확대가족이라는 점을 생각해 보았다. 그가 인간이라면 그의 다른 문화적 권리도 인정해야하는 것이며, 그렇기 위해서는 핵가족이 아니라 확대가족의 형태를 유지하는 것을 존중해야한다. 그러나 아무리 환대를 한다고 하더라도 우리 사회와 다른 그들의 문화, 예를 들면 일처다부제 같은 것을 무조건적으로 다 받아들일 수는 없다. 또한 경제적인 문제도 크다. 만일 무조건적으로 다 받아들이면 그들의 위한 교육과 의료 등 사회복지에 대한 비용은 누가 감당할 것인가가 또 하나의 가장 큰 문제이다.
인간이 다른 존재를 순수한 인간으로 제한 없이 환대한다는 것은 이처럼 그에 따르는 비용을 감당하는 일이다. ‘그들도 인간이다’는 주장이 그리 만만하고 쉽지 않은 주장인 것이다. 더욱이 여기에는 지금의 나의 공동체를 부정해야하는 위험도 따른다. 따라서 ‘그들을 제한없이 환대하자’는 이야기는 결국 세금도 많이 내어야하고, 때로는 내 공동체로부터 목숨도 위협받을 수도 있는 것을 감당해야하는 엄청난 일이 되고 만다. 이런 토론의 끝에 한 학생이 한숨을 내쉬며 한 말이 진리이다. ‘인간이 되는 게 절대 쉬운 일이 아니군요.’ 결국 결론은 우리는 인간이 될 가능성과 그 능력은 잠재력으로 가지고 있지만 그것이 모두를 향해 열려 있는 활력이 아니라는 점에서 ‘아직 인간은 아닌 존재’이며 우리는 성이나 성별, 인종과 종교, 그리고 국적 등의 우리를 둘러싼 다양한 정치에 의해서 인간이 되는 길을 방해받고 있다는 것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