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글은 격월간 <사람> 2011년 11-12월호에 실린 겁니다.
[엄마에게 쓰는 편지 10] 미워도 다시한번 집회와 시위를 (류은숙)


내가 학생이었을 때, 큰 데모가 있을거란 뉴스가 나올 때면 어김없이 엄마는 날 붙잡고 당부를 하곤 했지. 오늘 어디 가냐고. 뉴스 보니까 데모한다는데 그런 위험한데 가지 말고 일찍 들어오라고 말이야. 그럴 때 엄마 맘은 어릴 때 물가에 나가 놀지 말라고 말할 때와 마찬가지였을 거야. 그리고 대개 난 엄마에게 거짓말을 했지. 엠티를 가거나 문상을 가기 때문에 못 들어올 거라고 말이야. 큰 집회 때 방송사 카메라가 주변을 돌면 나와 친구들은 앞다투어 카메라를 피해 고개를 박았어. 특히 지방에서 올라온 친구들은 혹시나 신문방송에서 부모가 자기를 발견할까봐 걱정되어 전전긍긍했지. 집회 중간에 갑자기 후다닥 소리가 나며 자리가 뻥 뚫리는 일들이 있었어. 그건 부모님이 데모하는 자식을 잡으러 들이닥치는 일이었어. 그렇게 집으로 잡혀 들어간 친구들은 오랫동안 학교에 나오지 못하곤 했지. 집회시위는 그렇게 호환마마처럼 무서운 것이었어. 전부를 걸어야 사랑이란 유행가 가사처럼 인생의 뭔가를 다 걸어야 하는 일로 여겨졌지.

그렇게 무섭고 욕먹던 집회와 시위들이 지금은 한국 사회를 발전시킨 자랑스런 역사로 기억되고 있어. 옛날에 시위했던 일은 여야를 막론하고 정치인들이 자랑하는 경력 중 하나야. 하지만 현재의 집회와 시위들은 여전히 지청구를 먹고 있어.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아니 예전보다 훨씬 더 호환마마처럼 무서운 일로 여겨지고 있어. 요즘 집회 시위 때문에 사람들이 겪는 수난은 한두 가지가 아니야. 시위 현장에서 사진 찍혔다면서 경찰에서 오라 가라 하고 경찰서에 잡아갔다 풀어주는 수준이 아니라 벌금을 때려. 벌금으로도 모자라 손해배상이라는 이름으로 엄청난 액수의 돈을 청구하기도 하고, 전혀 봐줄 수 없는 범죄인 취급을 하기도 해. 집회와 시위의 참가자들이 외친 내용에 대해서는 무시하면서 ‘직업 시위꾼’이라고 조롱하거나 전혀 생각해본 적도 없는 일인데 ‘그럴 거면 북에 가서 살라’는 엉뚱한 대꾸가 돌아와.

얼마 전 희망버스가 서울에서 행사를 가졌어. 희망버스가 뭐냐 하면, 자기 돈과 시간을 내서 누구를 응원하러 가는 운동에 붙은 이름이야. 부산에 큰 조선소가 있는데 거기에는 배 만들 때 쓰는 크레인이란 높은 기계가 있어. 아마 아파트 몇 층 높이는 될 거야. 그 중 하나에 사람이 올라가서 시위를 한지 일 년이 다 돼가. 쇠로 만들어진 기계의 조종실에서 먹고 자며 더위와 추위를 땅위에서보다 곱절로 겪고 있는 것이야. 왜 그런 고생을 사서 하느냐하면 말이지, 그 조선소에서 배 만드는 노동자들이 엄청나게 잘리고 회사로부터 사람취급을 못 받았거든. 그에 항의해서 잘린 사람들을 복직시키고 일하는 사람대접 좀 잘하라고 오십대 아줌마 노동자와 그를 응원하는 아저씨 노동자 몇 사람이 거기 올라간 거야. 올라가서 겨울과 봄, 여름을 지냈고 또 겨울을 맞이하려고 해. 희망버스는 그 사람들에게 힘을 주기 위해 전국에서 사람들이 자기 차비를 내고 버스를 대절하여 그곳에 가서 같이 밤을 지새우고 응원하는 일에 붙여진 이름이야. 몇 차례나 희망버스가 부산에 갔는데 그 중 한번은 서울에 모여서 행사를 가졌어.

주말에 식당알바를 해야 하는 나는 일 끝나고 밤중에서야 희망버스 행사에 갔어. 여름 끝자락인데도 열대야가 있어서 지독하게 더운 밤이었어. 시내에서 행진하여 서대문 독립공원까지 가는데 숨이 턱턱 막히고 아스팔트 지열은 숯불 같았어. 공원에서 사람들은 노숙을 할 참이었어. 다음날도 알바를 해야 했기에 나는 잠시 거기 있다가 자리를 떴어. 다음날 아침 알바하러 버스를 타고 독립공원을 지나는데 여기저기 누워있는 사람들이 보였어. 뉴스를 보니 청와대를 향해 인왕산을 오를 계획이었는데 경찰이 등산로를 막아서 못 올라가고 있다는 거였어. 내가 버스에서 본 모습은 산에 못 오른 사람들이 공원에서 기진맥진해서 쉬고 있는 거였어. 그때 버스 안에 있던 승객 두 사람이 낄낄대며 이런 대화를 나눴어.

“저 인간들 좀 봐라.”
“되게 할 일 없는가봐. 한심하다. 한심해.”
“저런 사람들 머릿속에는 뭐가 들었는지 모르겠더라.”
“그러게 말이야, 한번 물어보고 싶어. 제정신이냐고.”

그들의 빈정거림에 내 얼굴이 화끈거렸어. ‘아줌마들 같으면 이 더위에 씻지도 못하고 잠도 못자고 저렇게 고생하는 게 할 일 없어서 그러는 것 같냐?’는 말이 목구멍까지 꽉 찼지만 혀를 끌끌 차고 한숨을 쉴 뿐이었어. 똥 씹은 표정으로 버스를 타고 가는 내내 엄마한테 걱정 끼치며 내가 참여했던 수많은 집회와 시위가 떠올랐어.

제일 많이 떠오른 건 더위와 추위, 배고픔과 갈증, 그리고 냄새야. 뙤약볕 아래에서 신문지를 접어 만든 우스꽝스런 모자로 간신히 얼굴에 그늘을 만들고 종일 버티는 건 고역이었어. 추울 때도 역시 신문지였는데, 시멘트 위에 깔고 앉은 신문지로는 올라오는 냉기를 막을 수 없어서 “이러다 우리 전부 치질 걸리겠다.”는 농담을 하곤 했지. 그럴 때 우리의 끼니는 보따리 김밥 장사들에게 의존했는데 그 김밥에선 여름에는 약간 쉰 냄새가 났고 겨울에는 하드 같았어. 시금치가 아닌 부추와 단무지만 달랑 든 김밥을 주머니 사정이 형편없던 우리는 채 한 줄씩도 먹지 못했어. 몽당연필 같은 김밥 한 덩이를 나눠 들고 되도록 오래오래 씹었지. 음료수도 부족했지만 화장실 갈 형편이 못되는 상황인지라 목이 말라도 마실 것을 애써 참아야 했어. 그리고 하루가 아니라 몇날 며칠 이어진 시위일 때는 입 냄새와 땀 냄새를 쫓아야 했어. 최루탄 냄새가 더 지독했기 때문에 우리의 몸 냄새는 사실 맡으려야 맡을 수 없는 것이었을지 몰라. 바람 한 점 없는 한 여름에 최루가스를 맡으면 죽는 게 이런 거구나 하는 고통을 느꼈어. 한 번은 너무 독하게 가스를 마셔 거의 오바이트를 할 지경이어서 ‘내가 다시는 시위에 나오나봐라’하고 맘먹기도 했지만 또 그 자리에 다시 서 있곤 했어. ‘미워도 다시 한 번’ 같은 심정이었어.

그렇게 배고프고 덥고 춥고 냄새나는데 꾸역꾸역 모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뭘까? 일부러 고행을 하는 종교의식도 아니고 누가 상주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엄마 입버릇처럼 그런다고 밥이 나오고 떡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학생 때 데모를 할 때는 배부르고 등 따스우니까 저런 일을 한다는 비난을 많이 들었어. 데모가 대학생의 특권인 줄 아느냐고 말이야. 물론 처음에는 대학생의 특권이라 여겨지던 데모에 참가하는 게 무슨 주인공이 된 기분이었던 것도 사실이야. 내가 학생 때는 데모하지 않는 대학생이 비정상으로 여겨질 만큼, 대학생의 배지 같은 게 데모였으니까 말이야. 그리고 우리의 목소리가 세상을 이끈다는 오만한 생각을 했던 것도 사실이야. 지금처럼 대개가 대학생이라 대학생을 전혀 유별나게 보지 않고 오히려 비싼 등록금과 취업난에 찌든 가여운 청춘으로 바라보는 게 아니라 그때는 대학생을 지성인이요, 사회를 이끄는 세력으로 봐주던 시절이었으니까. 대학생이라는 것 자체가 특권이었고 대학생들 스스로가 자신들의 목소리를 중요하다고 자부한 것도 사실이었어. 그런데 그런 우쭐함은 아주 잠깐이었어.

집회와 시위에 참가하면서 나는 많은 사람들을 알게 됐어. 흔한 농담에서 ‘공돌이’, ‘공순이’란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쓰던 우리는 집회와 시위에서 작업복을 똑같이 입은 사람들을 만나게 됐어. 그들은 공돌이, 공순이란 말 대신에 노동자라는 말을 썼어. ‘여러분도 일을 하고 봉급을 받게 되면 다 노동자인 사람’이라고 했어. 그렇게 말하는 그들의 모습은 당당했어. 자신들이 일하는 처지와 환경이 어떠한지, 왜 그런 대접에 분노해야 하는지를 조목조목 말했어. 그런 말들은 내가 학교에서 읽는 어떤 책보다도 감명 깊었어.

장애인들과 말을 섞고 같이 밥을 먹게 된 것도 집회와 시위를 통해서였어. 초등학교 때부터 학교에서 내가 만난 장애인 친구는 단 한명도 없었거든. 아주 약한 소아마비 말고는 학교를 다니는 장애인을 볼 수 없었으니까. 집회에서 만난 장애인과 화장실을 같이 가고, 휠체어가 들어갈 수 있는 식당을 찾아 헤매면서야 사회가 만들어낸 장애의 고통을 알 수 있었어. 지금도 한 겨울에 장애인들과 집회를 하다 보면 마음이 참 아파. 털모자와 목도리로 꽁꽁 싸매고도 추워서 발을 동동 굴리며 나는 계속 왔다 갔다 하는데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중증장애인들은 입술이 시퍼렇게 되고 몸이 뻣뻣하게 굳어가면서 제 자리를 지키고 있어. 그 사람들이 때론 온몸으로 땅바닥을 기고 발음 안 되는 혀 대신에 온몸에 경련을 일으키며 구호를 외치는 모습에 전율을 느끼곤 해. 그 사람들의 말은 TV에서나 라디오에서는 들을 수 없어. 국회의사당에서도 볼 수 없어. 더 좋은 세상이 되면 안 그렇겠지만 지금은 그 사람들의 말을 듣고 보려면 집회와 시위에 나가야 해. 그래야 그들을 만날 수가 있어. 나보다 어린 청소년들, 국적과 피부색이 다른 사람들, 그리고 헤아릴 수 없는 이유로 다른 사람들을 ‘우리’로 만나 겪을 수 있는 것도 집회와 시위야.

그래서 집회와 시위는 내가 모르던 사람들이 등장하고 그들의 얘기가 터뜨려지는 무대야. 내가 알려하지 않던 사연과 진실을 품고 있는 보물 상자야. 그런 보물 상자를 소중히 여기는 사회라면 자신들이 무시하던 사람과 사건에 맞닥뜨려 자기 사회를 돌아보고 문제를 점검하고 고칠 거야. 하지만 그런 보물 상자를 위험물질 취급하고 자물쇠를 채우는 사회는 신호를 무시하고 돌진하는 특권차량 운전자와 같을 거야.

모든 인권 중에서도 특히 ‘목소리를 낼 권리’는 모든 사람의 당연한 권리여야 한다고 말할 수 있어. 혼자서 글 잘 쓰고 웅변을 잘하고 주목받을 수 있는 사람도 있겠지만 우리들 대부분은 뭉쳐서 소리를 내도 들릴까 말까한 처지에 있어. 그래서 집회와 시위는 함께 목소리를 낼 권리인 거야. 지금 우리가 권리라고 말하는 것들은 죄다 한 때는 특별한 사람들만 누리는 특권이었던 것들이야. 특권이었던 것을 누구나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로 만드는 힘은 특권 때문에 홀대받은 사람들이 가만있지 않는데서 나오는 거야. 특권을 모두의 권리로 만드는 것은 권리를 끌어내리는 것이 아니라 권리의 가치를 높이는 일이야.

집회와 시위를 내가 처음에는 대학생의 특권의식으로 시작했을지 모르지만 나는 금방 그게 아니란 걸 깨닫게 됐어. 집회와 시위는 지금의 사회질서 속에서는 목소리를 무시당하는 사람들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창구야. 엄마는 ‘너 아직도 데모에 나가냐’고 할지 모르지만 이것이 내가 집회와 시위를 시간이 갈수록 더 소중히 여기는 이유야.

또 다른 이유는 뭐라 정확하게 짚을 순 없지만 사람들에게 미안해서야. 미안하고 책임감을 느껴. 뭔가 잘못돼가고 있는 일에 대해서 누군가 목소리를 내긴 내야 하는데,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이 외롭지 않도록 한 사람이라도 더 같이 있는 게 좋다는 생각이야. 그렇게 모이는 우리들 목소리의 방향은 두 개인 것 같아. 한 방향은 우리말에 귀 기울이지 않는 쪽을 향해서 지르는 것이고 한 방향은 우리 자신을 향한 것이야. 저쪽을 향해서는 ‘너희가 아무리 강해도 세상만사를 100% 너희 뜻대로 할 수는 없다, 우리가 여기에 살아 있다’고 알리는 것이고, 우리를 향해서는 ‘너만 그런 고민 하는 게 아니었어. 나도 그랬어. 우리 서로 경쟁자로만 알고 살아왔는데 지금은 뭔가 같이 할 수 있을 것 같아.’라고 서로를 토닥이는 거야. 집회와 시위 속에서는 국가대항 스포츠 경기 때 느꼈던 ‘우리’와는 다른 성격의 ‘우리’라는 걸 느껴볼 수 있어.

집회와 시위를 하다보면 정부나 시위 반대자들이 하나같이 하는 말이 ‘말로 하라’는 것이야. 법 어기지 말고 교통방해하며 소란 떨지 말고 고상하게 말로 하라는 것이야. 하지만 그들이 말로 대접하는 것은 자신들이 만든 무대에 설 수 있는 사람의 말 뿐이야. 엄마도 그 우화 알지? 서로 집에 초대해서 음식을 내놓은 두루미와 여우 이야기 말이야. 두루미는 여우를 초대해 놓고는 긴 주둥아리의 호리병에 음식을 내놓아. 여우의 주둥이로는 좁은 구멍의 호리병에 든 음식을 먹을 수가 없어. 마찬가지로 여우는 두루미를 초대해놓고는 납작한 접시에 음식을 담아 내놓고 두루미의 주둥이로는 접시의 음식을 먹을 수가 없어. 마찬가지야. ‘말로 하라’고 하면서 말할 수 있는 무대와 방식을 일방적으로 정하는 쪽이 있고, 그런 쪽에서 자기 기준에 맞지 않는 쪽의 말을 말로 대접하지 않고 무시하기 때문에 이 사회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취하는 방식이 집회와 시위야. 집회와 시위는 모두에게 권리이지만 무엇보다도 가난한 사람들이 가질 수 있는 정직한 말보따리라고 생각해. 말을 독점한 사람들이 싫어하는 집회와 시위를 통해 말 못해온 사람들이 얻고자 하는 것이 바로 ‘말로 할 수 있는’ 기회와 통로야.

엄마가 신뢰하고 좋아할만한 분은 목사님일 테니까 내가 목사님 얘기를 할게. 인권운동의 역사에서 유명한 사람 중에 마틴 루터 킹이란 목사님이 있어. 불행히도 젊은 나이에 암살당했어. 정부가 싫어하는 얘기를 하고 정부가 하는 전쟁을 비판했기 때문에 그리 됐다고 여겨지고 있어. 그 목사님이 죽기 전 마지막 설교를 했던 교회에 가본 적이 있어. 내가 뉴욕에 인권연수 갔을 때 다니던 학교 바로 옆이 그 교회였거든. 그 교회 문가에는 내가 어렸을 때 엄마가 방에 걸어뒀던 골고다의 기도하는 예수 그림이 걸려있었어. 엄마가 좋아하던 그림의 원본을 그곳에서 보니 괜히 반가웠어. 그 목사님은 목숨을 위협하는 데모에 나갈 때마다 기도를 하고 나갔다고 해. 아마 그 그림이 보여주는 것처럼 간절한 기도였을거야. 한 번은 그 목사님이 데모를 하다가 옥에 갇힌 일이 있었어. 그런데 동료 목사들은 옥에 갇힌 그 분을 돕기는커녕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했어. 과격분자니 어쩌니 말이야. 다른 사람들도 아니고 동료 성직자들에게 비난을 당했으니 그 목사님이 얼마나 속상했겠어. 동료 성직자들의 비난에 대해 그 목사님은 감옥에서 아주 긴 편지를 썼어. 그 중에 이런 말들이 있어.

‘왜 말로 안하고, 왜 협상을 안 하고 데모를 하느냐’는 비난에 대해 킹 목사는 이렇게 말했어. 협상이야말로 데모를 하는 목표라고 말이야. 협상을 거부하는 사회에 맞서서 시위를 하는 것이고 그것을 통해 위기와 긴장감을 높여서 협상을 거부하는 사회가 더 이상 협상에 응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것이 데모의 의미라고 했어. 사회에서 다뤄야 할 쟁점들을 제대로 부각시켜서 흐지부지 되지 않도록 만드는 것이 시위를 통해 자신이 추구하는 바라고 말이야. 사회가 발전하려면 대충 봉합하고 사는 것이 아니라 건설적이고 비폭력적인 긴장이 필요하고, 자신이 벌이는 시위의 목표는 그런 긴장감을 만들어서 협상의 문호를 열게 만드는 것이라고 거듭 강조했어.

‘말로 하라’는 정부와 반대자들에게 나도 같은 말을 하고 싶어. ‘말로 하자고!’, 그러려면 무시하고 듣지 않으려는 얘기들에 대해 귀를 열고 뭔가 양보하려는 태도로 나와야지, 우린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을 테니 너희들 맘대로 해보라는 식이어서는 안 된다는 거야.

‘좀 참고 기다리라’는 말에 대해서는 목사님은 이렇게 대꾸했어. 특권층이 자신들의 특권을 자발적으로 포기한 일은 역사적으로 한 번도 없었다고, 우리들의 권리는 거저 주는 것이 아니라 강력하게 요구해야만 한다는 것을 피나는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다고. 기다리라는 말은 항상 결코 안 된다는 말과 같은 뜻으로 쓰여 왔다고 말이야.

‘시위하는 사람들이 편의대로 법을 안 지키면 법질서가 바로 설 수 있겠느냐’는 물음에는 이렇게 답했어. 법에는 공정한 법과 불공정한 악법 두 유형이 있다고 했어. 킹 목사 자신은 공정한 법을 지키는데 제 일인자가 되고 싶다고. 반대로 불공정한 법에 대해서는 복종해서는 안 되는 도덕적 책임감을 지겠다고 말이야. 그래서 사회양심을 일깨우기 위해 필요하다면 악법에 맞서 감옥의 형벌조차 기꺼이 감수하겠다는 사람이야말로 누구보다도 법을 존중하는 사람이라고 말이야.

앞에서도 말했지만 시위와 집회는 정말 힘들고 피곤하고 때론 위험한 행동이야. 그런데도 그걸 만들고 참여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있어왔어. 자신이 인간답다고 느끼려면 외면해선 안 되는 소리를 들어야만 하고, 사회가 외면하고 있는 소리를 만들어야 하니까 말이야. 최근에 장애인 시설에서의 성폭력 사건을 다룬 실화 영화 ‘도가니’가 한국사회를 뒤흔들었어. 많은 사람들이 ‘영화 한 방’으로 문제가 해결됐다는 말을 해. 난 그런 말에 좀 빈정이 상해. 영화를 만든 사람들의 진심과 성의를 의심해서가 아니야. 다만 그 영화를 보고 느끼고 분개한 사람들이 많은 만큼 사건 이후 7년여 동안 농성하고 쫓겨나고 외면당하며 거리에서 외쳐온 사람들이 있었기에 그런 영화가 나왔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영화 한 방’을 말하는 사람보다 더 많았으면 좋겠어.

요즘도 시위 소식이 TV에 나오면 엄마는 지금 어디 있느냐는 확인을 하곤 하지. 예전과 달라진 게 있다면 휴대전화로 확인을 한다는 것이야. 그럼 난 ‘일 때문에 어디 와 있다’는 애매한 대답을 하곤 해. 그리고 엄마는 애매하게 속아주곤 해. 그냥 몸조심하라면서. 배고프고 춥고 욕먹어도, 미워도 다시 한 번 집회와 시위현장으로 모이는 사람들이 계속 있는 한 우리에겐 열리고야 말 문이 있다고 생각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