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대의 인권] “나는 소망한다. 양심수가 없는 나라”

민가협 목요집회 16년의 기록


1987년 6월 항쟁으로 민주화의 열망이 폭발하면서 1993년, 30여년 넘게 지속된 군부독재가 드디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노태우, 김종필과의 3당 합당을 통해 당선된 김영삼이었지만 민간인 대통령의 탄생은 많은 국민들에게 기대와 환상을 안겨줬다. ‘문민정부’를 내세운 김영삼은 ‘변화와 개혁’을 주장했고 ‘위대한 대화합의 시대’를 선언하며 대대적인 사면을 단행하겠다고 밝혔다. 많은 사람들이 사회전반에 걸친 전향적인 조치와 1988년 사면을 넘어선 양심수의 대대적인 석방을 기대했다. 하지만 3․6 대사면은 화려한 말잔치로 끝났다. 대사면으로 석방된 양심수는 144명으로 전체 양심수의 27%에 불과했는데, 이마저도 대부분은 만기출소를 눈앞에 둔 사람들이었다. 뒤이은 8.15광복절 사면 때는 단 한명의 양심수도 감옥 문을 나서지 못했다.

고난과 희망의 목요집회

“김영삼 대통령이 아무리 말을 갈아탔어도 그래도 양심수만은 전원 석방할 거라고 믿었어. 두 번의 사면 이후에 실망도, 분노도 많았지. 하지만 어차피 대통령 혼자는 못 할일이고 우리가 으싸으싸하면 나오지 않겠냐면서 목요집회를 하게 됐어.” (서경순 전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상임의장)

1993년 9월 23일 오후 2시 탑골공원 앞에서는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이하 민가협)가 주최하는 ‘양심수 전원석방과 국가보안법 철폐’를 위한 첫 번째 목요집회가 열렸다. 참석자들은 “과거 암울했던 독재치하에서 민주화를 외쳤다는 이유만으로 투옥된 독재시대의 유물인 양심수에게는 문민정부가 단지 감옥 밖에서나 존재하는 이름”이라며 양심수의 전원석방을 주장했다. 민가협 어머니들은 맨 앞줄에 보랏빛 수건을 두르고 서있었다. 보랏빛 수건은 감옥에 갇혀 있는 자식의 석방을 위해 고난의 행군 중인 어머니들의 ‘고난과 희망’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집회 날을 목요일로 정한 것 역시 목요일이 기독교에서 고난일을 상징했기 때문이었다. 목요집회의 무대가 된 탑골공원은 서울 한복판에 있어 접근하기도 좋고 유동인구도 많아 선전효과도 컸기 때문에 1980년대부터 집회장소와 가두시위의 코스로 애용되던 곳이었다.

두 번째 집회는 ‘43년 세계 최장기수’ 김선명 석방을 위한 목요집회로 열렸다. 89년 사회안전법이 폐지되면서 80여 명의 장기수들이 석방됐지만 당시 감옥에는 비전향 장기수가 50여명 넘게 갇혀 있었다. 1991년 위암 말기판정을 받은 왕영완 씨가 33년의 옥살이 끝에 석방됐지만 여전히 비전향장기수 문제는 사회적으로 공론화되지 못한 상태였다. 석방된 장기수들의 설명을 토대로 김선명 씨의 얼굴이 재구성돼 피켓에 담아졌다. 이후 널리 알려진 이 얼굴은 김선명 씨보다는 다른 장기수의 얼굴과 더 비슷해 항의 아닌 항의를 받기도 했지만, 이 사례가 단적으로 보여주듯 목요집회는 유령으로만 존재하던 장기수의 존재를 우리 사회로 불러냈다. 이후 목요집회는 ‘5공 조작사건 진상규명’, ‘고문기술자 이근안의 검거 촉구 및 공개수배’, ‘유서대필사건 강기훈 씨 석방’ 등 해결되지 못한 인권 현안을 다루면서 한시적 기한인 1993년 12월 24일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연말에 양심수가 모두 나오면 민가협을 친목회 삼아 놀러나 다니려 했다”는 말처럼, 어머니들은 목요집회를 하면서도 김영삼 정부가 성탄절 대사면을 통해 양심수 전원을 석방시킬 것이란 일말의 기대를 져 버리지 않았다.

위 사진:민가협 목요집회 모습

열리지 않은 감옥문

1993년 12월 24일, 드디어 감옥 문이 열렸다. 하지만 감옥 밖으로 걸어 나온 사람은 양심수가 아니었다. 장기수 역시 아니었다. 서석재를 비롯한 부정선거 및 뇌물 공여로 처벌받은 부정비리 정치인들이 사면 복권돼 세상 가운데로 다시 걸어 나왔을 뿐이었다. 분노와 침통함 속에 열렸던 1994년 1월 6일 목요집회는 목요집회의 새로운 목표를 알렸다. 어머니들은 김선명 씨를 포함한 300여명이 넘는 양심수들이 전원 석방될 때까지 목요집회를 계속하겠다고 선언했다.

“(사면을 지켜보면서) 더 이상 어머니들은 양심수 석방에 기대를 걸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과거처럼 끊임없이 싸우는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채은아 전 민가협 간사)

그 후 목요집회는 매주 어김없이 열렸다. 1백 회를 넘기고, 2백 회를 맞이했지만 감옥 문이 열리기는커녕 감옥 안은 양심수들로 넘쳐났다. 일례로 97년 9월 25일 2백회 목요집회가 열리던 날 발표된 양심수 현황은 실로 충격적이었다. 40년째 구금중인 우용각 씨를 비롯해 20년 이상의 장기수가 20여명 이상, 5,6공 양심수를 비롯해 구금중인 양심수가 무려 9백여 명에 달했다. 특히 김영삼 정권하에서 구속된 양심수만 3,755명(97년 8월 1일자)이었다.

1998년 ‘국민의 정부’가 들어서고, 2003년 ‘참여정부’가 들어섰지만 양심수는 사라지지 않았고 국가보안법 역시 질긴 명운을 이어갔다. 그리고 오욕의 역사에 맞서듯 목요집회는 탑골공원 앞을 지켜왔다. 엄동설한 추위도, 거센 폭우가 쏟아지는 장마도, 비지땀이 줄줄 흘러내리는 한 여름 뙤약볕도 마다하지 않고 망부석을 자처한 지 올해로 16년. 횟수로만 770회를 넘겼다.

양심수, 장기수. 유령을 불러내다

목요집회는 거대한 세월을 견디며 국가보안법과 양심수의 문제, 그리고 장기수의 존재를 사회화시키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90년대 초까지만 해도 양심수 석방은 전 국민적이고, 정치적인 관심사였다. 하지만 김영삼 정부가 들어서면서 양심수에 대한 관심은 급격히 사그러 들었다. ‘문민’의 환상과 ‘양심수는 더 이상 없다’는 대통령의 선언 속에서 양심수는 이미 해결된 문제처럼 치부됐기 때문이다. 이때 시작된 목요집회는 양심수의 존재 알리고 다시금 사회화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더불어 연고자는 물론 사진 한 장도 남아있지 않아 그 실체조차 가늠할 수 없었던, 30~40년 이상 구금된 장기수의 존재를 공론화시키며 이들을 전원 석방시키는데 큰 기여를 했다. 1995년 김선명 씨가 석방된 이래 1999년 12월 모든 비전향장기수들이 십오 척 담장 밖으로 걸어 나왔으며, 2000년 9월에는 63명의 비전향장기수들이 ‘마음의 고향’ 북녘으로 돌아갔다. “목요집회는 작은 목소리에 지나지 않았던 양심수의 문제를 처음으로 사회에 제기했습니다. 특히 인권의 측면에서 비전향 장기수 문제를 사람들에게 얘기하고 이들의 석방을 끈질기게 요구했는데요, 이것이 비전향 장기수 모두를 석방시키는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습니다.”라는 임기란 전 민가협 상임의장의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더불어 고문기술자 이근안의 체포와 조작간첩사건 피해자 함주명 씨의 무죄판결, 준법서약제 폐지 등 1990년대를 관통한 중요한 인권현안을 해결하는데 목요집회가 미친 영향력은 지대한 것이었다.

하지만 목요집회가 양심수와 장기수, 조작간첩 사건과 국가보안법 그리고 고문 등 다소 고전적인 인권의 주제만을 고집한 것도 아니다. 2000년을 넘어서면서 인권운동의 영역이 확대되고 세분화됐듯이 목요집회 역시 이주노동자, 장애인, 병역거부자, 성소수자, 비정규직 문제 등 우리 사회의 모든 인권현안을 다루기 시작했다. 물론 처음부터 이런 변화가 오롯이 받아들여졌던 것은 아니었다.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들을 양심수 통계에 포함시키는 데 다소 시간이 걸렸듯, 우리 사회 인권현안을 목요집회의 주제로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 역시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양심수의 문제가 해결된다고 해도 목요집회는 결코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민가협의 다짐처럼, 목요집회는 어떤 사안의 인권침해라도 호소할 수 있는 공간이자 ‘인권신문고’로써 점차 변모해갔다.

소위 ‘인사’들의 발언이 아닌 피해당사자들의 증언 중심으로 목요집회가 진행돼 온 점 역시 목요집회의 변화를 이끈 동인인 동시에 오랜 세월 목요집회를 견인해온 힘이었다. “목요집회의 힘은 현장성에서 나온다. 목요집회는 피해당사자들의 생생한 증언으로 이루어진다. 당사자들의 절박한 사연은 그 어떤 화려한 논리나 이론에 비할 수 없는 힘을 지녔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정책을 변화시키고 법과 제도를 바꾸어낸다. 이것이 목요집회의 힘이다. 이토록 오랜 세월 집회를 이어올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인권피해자들이 직접 참여하고 이 집회를 함께 지켜왔기 때문이다.” (조미영 전 민가협 간사/ 2006년 진보평론)

“평화를 위해 싸우자”

그러나 무엇보다 목요집회를 여기까지 오게 한 가장 큰 힘은, 그리고 목요집회의 가장 큰 의의는 바로 어머니들, 아니 ‘운동의 선배’들이다. 많은 사람들이 참으로 징그러운 에미들이라며, ‘징그러운 모성’이 아니었다면 어림없었을 기록이라고 목요집회의 역사를 추켜세우곤 한다. 하지만 어머니는 더 이상 자식을 감옥에 보낸 어미도, 구속자의 가족도 아니다. 지난 16년간 목요집회를 한결 같이 지켜오며 ‘가족’, ‘피해자’, ‘모성’이란 협소한 범주를 뛰어넘어 인권지킴이, 운동의 선배로 발전해왔다.

“우리 아들이 96년도에 수배를 받았는데 하루는 편지가 왔어. 탑골공원에 가면 어머니들이 매주 목요일에 집회를 한다고 거기 함 가보시라고. 그렇게 목요집회에 함께하게 됐지. 남편이 자식이 미치니까 에미까지 미쳤다고, 아들 나온 지 언젠데 이젠 그만 나가라고 하는데, 안 나오는 게 더 힘들어. 우리 아들이 잘 산다고 다른 사람 힘들게 사는데 안 나올 수 없잖아. 어머니들이 할 수 있을 때 할 수 있는 걸 해야지.”(조순덕 전 민가협 상임의장)

“국가보안법을 없애진 못했지만 그래도 길을 한번 터 났으니 이명박이 대통령됐을 때도 이렇게 꽁꽁 얼어붙은 세상이 될지는 몰랐어. 이명박 정권 아래서는 싸울 수밖에 없는데, 저리 촛불집회에 참여한 사람들의 가족들까지 수사한다고 난린 걸 보면, 누가 목숨 내놓고 참말하기 어려운 세상이잖아. 내가 죽기 전에 좋은 세상이 되긴 어렵지만 우리라도 나서서 조금이라도 힘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에 나와. 나 하나 나온다고 변하는 것은 없지만 그래도 한 사람이라도 나와서 뭔가를 해야지.”(서경순)

“움직일 수 있는 한 나올 겁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힘으로 인권의 사각지대에 잇는 여러 사안들을 힘없고 약한 사람들의 편에 서서 알려내면서, 실망하거나 체념하지 말고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야해요. 내가 죽더라도 목요집회는 계속 될 겁니다.”(임기란)

위 사진:민가협 초기부터 4년간 의장을 하였으며 현재까지 왕성한 활동을 하시는 임기란 님 모습. 얼마전 팔순 잔치를 하셨다.

그 우직함은 세월 앞에 무릎을 꿇지 않았다. 목요집회를 시작할 당시 50, 60대였던 어머니들은 이제 70~80대 노인이 됐다. 목요집회의 산 증인인 임기란 어머니는 얼마 전 팔순을 맞았고, 서경순 어머니 역시 훌쩍 일흔을 넘겼다. 성한 곳보단 성하지 않은 곳이 더 많은 몸이지만 이들은 오늘도 목요집회에 선다. ‘무식한 여편네’, ‘욕쟁이 할머니’라는 비아냥을 웃으며 넘기고, 한 번도 존경받는 운동의 선배의 자리에 폼 나게 서보지 못했지만 그저 민가협 어머니라는 호칭만으로도 감사하다며 오늘도 탑골공원 앞을 찾는다. “지구상에 단 한 명이라도 고문당한 사람이 있다면, 실종당한 사람이 있다면, 거리에서 학살된 사람이 있다면, 억울하게 갇힌 자가 있다면 자유와 민주주의는 없다. 평화를 위해 싸우는 모든 이들을 위하여 목숨이 다할 때까지 싸워 나가자”(1994년 6월 10일 38회 목요집회에서 발표된 민가협-‘아르헨티나 5월 광장 어머니회’ 어머니들의 공동선언문)던 그날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해정/ [인권오름] 제175 호 [기사입력] 2009년 10월 21일 12:26: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