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할 수 없는 일을 용서하라

                                                                               하승우(한나 아렌트와 인권 세미나 강사)

세상을 살다보면 참 우연히 일이 겹칠 때가 있습니다. 간만에 영화를 보러 갔습니다. 씨네큐브에 갔는데 '슬럼독 밀리어네어'와 '더 리더-책 읽어주는 남자'라는 두 개의 영화를 놓고 고민을 조금 했습니다.


둘 다 나름 재미있어 보였거든요. 그러다 더 리더를 보기로 했습니다. 스티븐 달드리 감독의 영화를 그동안 재미있게 봤었거든요.


빌리 엘리어트, 말이 필요없는 영화였죠. 경쾌한 춤과 음악이 이어지면서도 당시 영국 광부들의 파업을 잘 담아냈던...





디 아워스는 선배들과 함께 봤는데, '디 아더스'라는 공포영화의 속편인 줄 알고, 공포영화 싫다고 했다가 핀잔을 들었다는... 

하여간 '더 리더'를 봤는데, 멜로 영화일 줄 알았던 영화가 나름 많은 사회적 메시지를 담고 있더군요(그런게 달드리 감독의 특기이기는 하지만). 더구나 최근 인권연구소 창에서 진행하고 있는 아렌트 세미나와 완전히 겹쳐버렸어요.

길에서 구토를 하는 소년을 돌봐줄 정도로 정이 많은 여인 한나, 어린 소년의 호기심으로 그 여인에게 빠져들었던 15살 소년 마이클의 얘기가 영화 전반부를 차지합니다. 어린 마이클은 한나와의 섹스에 빠졌고, 글을 읽지 못하는 한나는 마이클이 읽어주는 책의 세상에 빠져듭니다. 그러다 한나는 마이클을 그 또래들의 세계로 돌려주기 위해 짐을 싸서 떠나죠.

그렇게 헤어진 뒤 마이클은 법학을 전공하는 대학생이 되고, 한나는 나치 수용소의 감시원으로 되어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전범재판에서 우연히 만나게 됩니다. 한나는 자신이 감시하던 유대인 300명을 살해한 혐의(폭탄이 떨어져 불타는 교회에서 유대인들이 나오지 못하도록 문을 잠군 혐의)를 받습니다. 그 지옥에서 탈출한 한 여인이 책을 쓰면서 그 책에 언급된 6명의 독일인이 재판을 받는데 그 중 1명이 한나죠. 여차저차해서 한나가 6명의 죄를 뒤집어쓰게 되는데, 한나는 자신이 글을 모른다는 사실을 밝히기 싫어 죄를 인정하고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지요.

그런데 재판에서 한나가 자신에 관해 얘기한 내용은 아우슈비츠의 소장 아이히만이 재판에서 얘기했던 내용과 비슷합니다. 매일 수용소로 새로운 사람들이 들어왔기 때문에 누군가를 정해서 아우슈비츠로 보내야만 했다. 나의 임무는 유대인들을 감시하는 것인데, 문을 열어줬을 경우 그들을 감시할 수 없기 때문에 문을 열어줄 수 없었다. 함께 지내는 동안은 그 사람들에게 친절했지만 한나는 자신의 임무를 넘어서는 행위를 선택하지는 않았지요.

아렌트가 뉴요커의 특파원으로 가서 취재했던 전범재판에서 아이히만 역시 비슷한 얘기를 합니다. 아이히만은 자신이 당시 나치의 법률 하에서는 전혀 범죄가 아닌 일을 했고, 공무원으로서 자신이 시킨 일을 '성실히' 했을 뿐이라고 얘기합니다. 아이히만이 심문을 받는 광경을 보면서 아렌트는 "그가 심지어 자신의 아버지가 죽게 되는 어떤 일을 하라고 명령을 받았더라도 그대로 수행했으리라는 데 대해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라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어쨌거나 이 광경을 보면서 아렌트는 전체주의가 사람에게서 생각과 판단의 능력을 빼앗아가고 그것이 얼마나 끔찍한 사건을 불러오는가를 말하려 했습니다.

여기까지는 너무 정답같은 얘기이죠. 하지만 저는 달드리 감독과 아렌트의 의도가 이런 정답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먼저 달드리 감독의 시각을 볼까요? 영화에서 한나는 자기 죄를 피하려 했던 나머지 5명과 달리 그때 자신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분명하게 얘기합니다. 한나가 얘기하지 않은 건 글을 읽고 쓸 줄 모른다는 점 뿐입니다. 이 사실을 말할 수 없었기에 한나는 무기징역형을 받게 되죠.

그리고 그 점을 알고 있던 마이클은 한나를 위해 증언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자신을 버리고 떠난 한나에 대한 원망이든, 한나가 저지른 범죄에 대한 분노이든, 마이클은 '정의'라는 이름으로 한나를 버렸던 거죠. 그리고 당시 독일 곳곳에 자리잡았던 수용소를 이미 알고 있었고 수용소가 무엇을 하는 곳인지도 알고 있던 많은 독일인들도 한나를 처벌하면서, 또는 한나와 자신을 구분하면서 모든 죄를 덮어버립니다. 최소한 한나는 자신이 무슨 짓을 왜 했는지 얘기하고 그에 관해 생각할 판단력을 가졌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 일을 덮어버리는 데에만 급급했죠.

그리고 한나는 재판을 하는 판사에게도 묻습니다. 당신이라면 그 때 어떻게 했을 거냐고? 판사는 답을 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 역시 혼자 힘으론 그런 결정을 반대하진 못했을 테니까요. 나치즘 하에서 그런 결정을 막기 위해 어떻게 사람들을 조직하고 집단적으로 행위할까에 관해서는 판사조차도 자신이 없으니까요. 누구라도 한나의 위치에 가게 되었을 때 한나처럼 하지 않을 것이라고 자신할 수 있을까요? 특히 글을 읽고 쓸 줄도 모르는 사람이 그런 결정을 반대할 방법은 무엇일까요?

때로는 양심이 뒤늦게 깨달음을 주기도 합니다. 마이클은 양심(또는 사랑?)을 이기지 못해 이혼을 하고 옛날처럼 책을 녹음해서 교도소의 한나에게 보내기 시작합니다. 한나는 그것을 통해 읽고 쓰는 법을 배우며 마이클과 소통을 시도합니다. 읽고 쓰는 법을 배우며 한나는 삶의 활력을 찾기 시작하고 그러다 결국 가석방 허가를 받게 되죠. 가석방을 앞두고 교도소를 찾아온 마이클은 한나를 위해 일자리와 집을 마련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한나는 목을 매어 자살을 택합니다(왜 자살을 택했는지는 영화에서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지만 저는 '상처'였다고 봅니다. 사람들이 서로에게 남기는 몹쓸 상처...). 한나가 남긴 돈은 유대인 문맹퇴치기금에 한나의 이름으로 기부됩니다.

모두가 홀로코스트를 끔찍한 사건이라고 얘기합니다. 하지만 너무나 끔찍하기에 그 누구도 수용소에 관해 기억하려 하지 않죠. 마치 영화나 소설에 나오는 한 장면처럼 그런 일이 있었지라며 씁쓸히 말할 뿐입니다.

그런데 기억되지 않는 사건은 마술처럼 되돌아오기도 합니다. 이제 젊은 딸을 둔 아버지로 늙어버린 마이클이 딸에게 아버지의 삶을 얘기하기 시작하는 것으로 영화는 끝납니다. 어쩌면 이 '소통'이 달드리가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일지 모르겠네요.모두가 공범으로 변해버린 사회에서는 그 누구도 과거를 얘기하려 하지 않으니까요. 그러니 그 아픈 상처를 드러내고 얘기하는 것만이 끔찍한 홀로코스트를 막는 방법일지 모릅니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은 마치 소크라테스의 재판 얘기처럼 한국사회에 잘못 알려져 있습니다. 보통 이 책을 '악의 평범성(the banality of evil)'에 관한 보고서라고 얘기합니다. 사실 악의 평범성이라는 단어는 책의 맨 마지막에 딱 한 번 나옵니다. 아이히만은 재판이 끝난 뒤 아주 담담하게 죽음을 맞이하는데요, 아렌트는 그 모습을 보며 이렇게 얘기합니다.

교수대에서 그의 기억은 그에게 마지막 속임수를 부렸던 것이다. 그의 ‘정신은 의기양양하게 되었고’, 그는 이것이 자신의 장례식이라는 것을 잊고 있었다. 이는 마치 이 마지막 순간에 그가 인간의 연약함 속에서 이루어진 이 오랜 과정이 우리에게 가르쳐 준 교훈을 요약하고 있는 듯했다. 두려운 교훈, 즉 말과 사고를 허용하지 않는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을.

이 말을 어떻게 해석할지는 잠깐 판단을 미루고요, 제가 보기에 아렌트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얘기를 건네고 싶어하는 사람은 바로 유대인들입니다. 아렌트는 아이히만의 전범재판을 보며 이 재판이 "‘방향을 잡지 못하고 파도 위에서 출렁이는 배’와 같은, 피투성이의 쇼"라고 얘기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에 관한 근본적인 성찰보다는 누구에게 얼마만큼의 죄를 물을지에만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죠. 그리고 유대인들은 사건의 원인을 캐지 않고 그 사건을 덮어버리기 위해 세계적인 쇼를 벌였다고 아렌트는 봅니다. 그러니 무능력, 즉 말하지 않고 생각하지 않는 무능력함이 과연 아이히만만의 문제였을까요?

더구나 아렌트는 당시 유대인 공동체의 상류층들이 자기 민족을 어떻게 배반했는지에 관해서도 얘기합니다.

행정과 경찰 업무에 유대인의 도움이 없었더라면(베를린에서 유대인을 최종적으로 처리하던 일은 내가 앞서 언급한 것처럼 전적으로 유대인 경찰에 의한 것이었음) 완전한 혼돈상태에 빠졌거나 독일의 인력 공급이 불가능할 정도로 심각한 누수현상이 발생했을 것이다(“희생자들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수천 명의 사람들이, 더욱이 대부분 사무실에서 일하던 그들이 수십만 명의 타인들을 절멸시키는 것은 거의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유대인 공동체를 국가와 분리된 게토로 만들어서 자신들의 권력을 지켰던 유명한 유대인들([전체주의의 기원] 1권에서 얘기되는)은 유대인들을 지옥의 입구로 몰아갔습니다. 이런 상층 유대인들의 배신은 '구원'에서도 드러났습니다.

예를 들면 헝가리에서 카스트너 박사는 대략 47만 6,000명의 희생자를 내고 정확히 1,684명을 구출했다. ‘맹목적인 운명’에 따라 선별작업이 이루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진정으로 신성한 원칙들’이 필요하게 되었다. ‘모르는 사람들의 이름을 서류에 써서 그로 인해 그들의 삶과 죽음이 나뉘는 연약한 인간의 손을 인도할 힘’이 될 수 있도록, 그런데 이러한 ‘신성한 원칙들’은 누구를 구원으로 이끌어 냈는가? ‘지부르[공동체]를 위해 생명을 바쳐 일한’ 사람들(즉 지도층 인사들)과 ‘아주 저명한 유대인’이라고 카스트너는 자신의 보고서에서 말하고 있다.

이렇게 살아남은 유대인들이 홀로코스트를 열심히 팔아서, 불쌍한 유대인들의 이미지를 만들어내서 세상의 지지를 받지요. 그러니 죽은 사람만 불쌍하다고 해야 하나요? 물론 살아남았다고 해서 그 사람들이 겪은 고통이 무시되어야 하는 건 아니죠. 영화에 잠시 비치듯이 어느 누구도 실감할 수 없을 만큼 그 고통이 컸으리라는 점은 분명합니다(쁘리모 레비나 서경식의 글, 또는 솔제비친의 소설에서 엿볼 수는 있지만). 그러나 고통스럽고 아팠다고 해서 모든 게 정당화될 수 있는 건 아니죠. 아마도 아렌트는 그런 점을 지적하고 싶었을 것이고, 그래서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쓰고 난 뒤에 유대인 공동체들의 적이 됩니다.

아렌트는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을 로마 총독 본디오 빌라도에 비유합니다. 예수의 죄가 없음을 알고 있었지만 유대인들의 압력에 못이겨 예수를 처형했던 본디오 빌라도는 처형이 끝난 뒤 손을 씻으며 나는 죄가 없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본디오 빌라도는 누구일까요? 살아남았다는 이유로 선한 사람을 자처하고 살아가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영화를 보며, 아렌트의 글을 읽으며 저는 가끔 91년 5월의 기억을 떠올리곤 합니다. 죽어간 사람들을 지켜봐야 했던 우리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에서 희망의 말을 남깁니다. 자신이 조절할 수 없는 행위의 결과에 대해 인간은 용서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복음서는 인간은 신이 용서해주기 때문에 자신도 ‘신과 같이’ 남을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남을 용서할 때만’ 신도 ‘그와 같이’ 인간을 용서해준다고 가르치고 있다. 용서의 의무를 주장하는 이유는 “자신들이 행하는 것을 인간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자기의 마음을 변화시켜 다시 시작하겠다는 부단한 의지를 통해서만 인간은 새로운 것을 시작할 수 있는 위대한 힘을 부여받을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용서는 보복의 정반대이다.



신은 인간에게 용서하는 힘을 줬다고 합니다. 한나처럼 누구라도 전혀 의도하지 않은 운명의 수레바퀴에서 고통을 겪을 수 있으니까요. 그렇다고 모든 것을 무조건 용서하자는 얘기는 아닙니다. 오히려 아렌트는 '우리 모두의 책임이다'라는 집단적인 고백이 실제로는 그 죄를 은폐하고 방어하기 위한 변명이라는 점을 지적합니다. 아렌트의 제자인 베이너의 말처럼 "아렌트에게 용서는 판단에 뒤따르는 것이지 판단을 대신하는 것이 아니"니까요.

그러니 아렌트는 용서야말로 아주 정치적인 행위라는 점을 알고 있었던 듯합니다. 용서는 남을 위해 내가 베푸는 자비가 아니라 우리가 함께 하기 위해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환원할 수 없고 예측할 수 없는 행위의 결과를 인정하는 능동적인 행위이니까요(때로는 그것이 자신에게 너무 고통스러울수 있지만).

용서할 수 없는 일을 용서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친구들과 함께 새로운 시작을, 새로운 정치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지금 당신은 누구에게 먼저 말을 건네고 싶으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