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은 힘 있는 담론이 아니다. 경제논리에 의해 쓰레기통에 던져지고, 법이 되지 못한 인권은 인권이 되지도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권은 생명을 가진 담론이다. 이름도, 힘도 없지만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사람의 삶과 생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존엄한 사람으로 살고자 하는 끈질긴 희망 속에서, 외롭고도 무모하지만 물러설수 없는 저항 속에서 피어나고 자라기 때문이다. [우리 시대의 인권]은 한국사회에서 본격적인 인권운동이 시작된 1993년 이후 인권의 역사를  매월 한차례식 소개한다.<글쓴이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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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몸을 내던져 획득한 장애인 이동권

2001년 2월 6일, 서울역에서는 보름 전 오이도역에서 발생한 장애인 리프트 추락사와 관련해 진상규명과 재발 방지대책을 요구하는 집회가 열렸다. 집회가 마무리되어갈 때쯤 한 무리의 장애인들이 선로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지하철이 멈춰 섰고, 역사 안은 지하철 선로를 점거한 장애인들과 이를 저지하려는 경찰, 그리고 취재기자와 지하철을 이용하던 시민들이 한데 뒤엉키면서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지하철을 이용하는 시민들이 30분 늦는 것을 이유로 우리의 선로점거가 비난 받아야한다면 감수하겠습니다. 그러나 30년 넘도록 집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장애인의 현실에 대해 우리 사회는 함께 책임을 져야 합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시작된 외침은 선로를 따라 퍼져나갔다. 하지만 장애인들의 몸이 휠체어와 함께 경찰에 의해 끌어올려지면서 외침은 곧 비명으로 변했고, 시위는 32명이 경찰에 연행되면서 끝이 났다. 이날 시위는 사회적으로 적잖은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이날의 시위가 오이도역 문제를 넘어 지하철의 엘리베이터 설치 투쟁으로, 저상버스 도입 투쟁으로, 그리고 장애인 이동권 보장을 위한 법률제정투쟁으로 이어지는 장애인 이동권 투쟁의 서막이 될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목숨과 안전을 담로로 한 지하철 및 버스 타기

장애인들이 집밖을 나와 지하철을 타고, 버스를 타고, 그리고 학교에 가고 영화관에 가는 것은 친구를 만나고 식당에 가는 것은 치열한 전투에 투입되는 일처럼 목숨과 안전을 내어놓고서야 가능한 일이었다. 전쟁과 같은 일상. 하지만 사회는 이들을 주목하지 않았다. 특별한 날의 이벤트로, 들러리로 이들의 외출을 치부했다. 창살 없는 감옥에서 죄인처럼 갇혀 지내기를 수십 년, 이들의 억눌렸던 분노는 오이도역 사건을 계기로 폭발했다.

“좋지 않은 반응 또한 고려했다. 하지만 골방에 갇힌 장애인들은 이동권을 ‘권리’로 주장하지 못했고, 비장애인은 물론 운동을 한다는 사람들 역시 장애인들의 이동권에 대해서 무지했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이동권을 알리는 것이었고, 해서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조차 성과라고 생각했다. 더불어 장애를 연민과 동정의 대상으로 위치 짓는 사회에서 장애인들의 직접행동을 통해 사회적 편견을 깨야한다 생각했다.”(김도현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정책실장)

선로점거의 충격이 채 가시도 전인 3월 9일, 이들은 또 다시 직접행동에 나섰다. 일명 ‘장애인과 함께 지하철 타기’. 비장애인중심으로 설계된 지하철에 장애인들이 승차하기 시작하면서 지하철이 연착되기 시작했고, 이에 따른 시민들의 불만과 항의가 터져 나왔다. 하지만 장애인들은 고개를 숙이지도, 부끄러워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일상적으로 위험천만한 곡예를 하듯 지하철을 이용해왔기 때문이다. 수군거림과 따가운 눈총, “집에나 있지 왜 돌아다녀”란 비난에 그들은 “지하철을 타는 것은 시혜나 배려의 문제가 아닌 생존의 문제”라며 절규했다.

오이도역 사고의 책임을 묻기 위해 시작된 투쟁은 점차 전면적인 장애인 이동권의 문제로 확장되기 시작했다. 2001년 4월 20일 노들야학을 비롯한 7개의 장애인 단체들은 ‘장애인이동권쟁취를 위한 연대회의’(이동권연대)를 결성하고, 장애인 이동권 문제에 대한 지속적이고 대중적인 활동을 펴나가겠다고 선언했다.

7월 23일 시작돼 2005년 1월까지 3년간 매월 한차례씩 총 41회에 걸쳐 진행된, 장애인 ‘버스타기 투쟁’은 지하철을 넘어 버스로 이동권의 문제를 확장시킨 계기였다. 비장애인의 버스 승차는 너무나 일상적인 행위이지만 장애인들에게 버스 승차는 지하철보다 더욱 엄두를 내기 어려운, 도저히 혼자서는 불가능한 미션이었다. 특히 휠체어 장애인 한 명이 타기 위해서는 장정 서너 명의 도움이 필요했고, 내릴 때 역시 동일한 인원이 땀을 흘린 뒤에야 땅에 안착할 수 있었다. 버스타기 투쟁은 당연히 버스 운행의 지체를 가져왔다. 발이 묶인 시민들의 반응은 지하철과 다르지 않았다. 비난과 항의가 버스 안을 메웠고, 한쪽에서는 ‘쯔쯔’ 혀를 차는 소리가 맴돌았다. 경찰들은 버스를 타겠다고 모인 이들에게 ‘미신고 집회’라며 해산을 종용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은 묵묵히 버스를 탔다. 8월 29일 진행된 두 번째 버스타기 투쟁은 버스점거 투쟁이 되었다. 이들은 버스와 자신의 몸을 쇠사슬로 묶고, 4시간 동안 버스를 점거했다. 이들의 요구 사항은 단 한가지였다. “우리도 버스를 타고 싶다.” 일련의 과정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다치고, 연행됐으며, 구속되거나 벌금을 부과 받았다. 항상 싸움으로 점철된 투쟁에서 그들은 몸을 사리지 않았다. 물러서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장애인 참여자의 수는 계속해 늘어만 갔다.

“이동권 투쟁 전까지 장애인 운동진영의 투쟁은 열사투쟁과 에바다 농아원 등과 같은 시설비리 투쟁이 주를 이뤘다. 이 사안들 역시 장애인들의 삶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지만 운동적으로 의식화된 주체가 아니라면 접근하기 어려운 것들이다. 하지만 이동권은 그것과 결이 달랐다. 이동권은 모든 장애인들의 삶과 생존의 문제지만, 중증장애인이 한 달에 5번도 외출을 못한다는 통계가 단적으로 보여주듯 장애인들은 사회와 완전히 단절돼 있었다. 교육을 받을 수도, 노동을 할 수도, 문화생활을 즐길 수도 하다못해 친구를 만나 수다를 떨 수도 없었다. 장애인들은 온전히 자신의 삶을 살 수 없었고 이는 장애인들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배제를 가중시켰다. 하기에 이동권을 보장하라는 외침은 장애인 운동진영은 물론 보통의 장애인들에게 열광적인 호응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김도현)

위 사진:장애인이동권 투쟁을 사진으로 모은 사진집 홍보이미지

운동사회를 변화시킨 또 하나의 운동

하지만 이동권 투쟁의 방식을 둘러싼 반박도 많았다. 운동진영도 예외는 아니었다.

“운동방식이 과격하다고 말하는 것은 상황을 모르는 이야기다. 충분히 아름답게 투쟁도 했고, 토론도 했다. 하지만 중증장애인들의 삶의 비참함은 잘 드러나지 않았다. 그것을 드러내는 것이 꼭 선로점거와 같은 과격한 방식이냐고 묻는다면, 그런 방식을 가져가지 않으면 사회적 심각성을 제기하기도 어렵다고 답할 수밖에 없다.”(박경석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상임공동대표 )

“우리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자원을 갖지 못한 사람들이 가장 마지막으로 하는 것이 자신의 몸의 도구화다. 그만큼 절실했다.” (박김영희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공동대표)

장애인 단체만의 외로운 투쟁은 2001년 7월 23일부터 시작된 시청 앞 천막농성이 경찰의 방해 속에 노숙농성으로, 장소를 옮겨 서울역에서 한 달 넘게 지속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이한다. 여름 땡볕의 서울역 천막농성장에 그동안 모습을 보이지 않던 장애단체는 물론 시민사회단체 활동가들이 연대와 경의를 표하며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한 것. 이후 이동권연대 소속 단체는 7개에서 35개로 확장됐다.

“우리도 놀랐다. 90년대 중반 이후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가 들어서면서 시대가 변했다는 인식 하에 합법적이고, 정책중심의 운동이 대세를 이루기 시작했다. 현장의 전투적인 대중투쟁들은 많이 사그라지고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 분위기에서 이동권 투쟁은 답답한 시대의 돌파구로써의 가치를 지녔던 것 같고, 그것이 시민사회운동이 함께할 수 있는 동기를 부여했던 것 같다.”(김도현)

“우리는 비장애인과 연대할 것이다”

장애인들의 적극적인 직접행동과 시민사회운동의 합세에도 불구하고 이동권 투쟁은 일 년이 넘도록 이동권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확장시킨 것 이상의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 무렵 또 다시 리프트를 이용하던 장애인이 추락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2002년 5월 19일 발산역에서의 일이었다. 하지만 서울시는 사과는커녕 책임을 회피하기에 급급했고, 이에 분노한 이동권연대는 2002년 8월 12일부터 서울시를 규탄하며 단식에 돌입했다. 단식 26일째인 9월 7일, 최재호(전 장애인실업자종합지원센터 활동가)씨가 실신해 실려 가면서, 9명으로 시작한 단식농성의 추이는 온전히 박경석 교장의 몸 위에 지어졌다. 하지만 서울시의 입장은 강경했다. 발산역 사고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는 것은 물론 이동권을 보장하란 요구에 대해서도 장애인 콜택시 도입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라는 입장을 고수했다. “저상버스 도입과 장애인콜택시 도입을 비교해보면 장애인 콜택시 도입이 더욱 장애인들에게 효과적일 수 있다. 우선 예산이 적은 편이니 지방자치단체가 실행하기 쉽고, 장애인들에게 피부적으로도 콜택시가 훨씬 용이하다. 버스는 기다려야하는 시간도 있고, 편리함도 그렇고. 하지만 장애인 콜택시는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사는 세상에서 장애인이 경험하게 되는 사회적 배제와 단절의 문제를 해소할 수 없다. 또한 저상버스 도입과 지하철 엘리베이터 설치는 단순히 장애인만의 문제가 아니라 노약자와 임산부 등 비장애인들의 일상에도 크게 영향을 미치는 문제다. 따라서 콜택시를 거부하고, 마지막까지 사회, 교통문화에 대한 변화를 촉구한 것은 비장애인들과 공존, 연대하겠다는 장애인들의 의지의 표현이기도 했다.”(박경석)

단식 31일째가 되던 날, 장애인들은 또다시 지하철을 멈춰 세웠다. 1호선 시청역 선로 중앙에 일렬로 늘어선 장애인들은 3인 1조로 철제 사다리를 머리에 얹고 쇠사슬로 사다리와 휠체어 그리고 온몸을 고정했다. 그리고 발산역 사고에 대한 서울시의 사과와 대책마련을 촉구했다. “어차피 리프트 타다 떨어져 죽을 바에야 이렇게라도 하는 게 낫다”는 절규가 역사 안을 가득 메웠다. 전 역에서 출발한 열차가 “빵, 빵” 경적을 울리며 시청역으로 진입했지만 대열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버티기를 40분. 경찰들은 절단기로 쇠사슬을 끊고, 장애인 한명 한명을 들 것에 실어 대열을 해산시켰다. 투쟁에 참여했던 장애인과 비장애인 76명 전원이 연행됐다.

위험과 비난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이들의 투쟁과 목숨을 건 39일간의 단식은 2002년 9월 드디어 값진 성과를 이뤄냈다. 서울시가 발산역 사건에 대한 사과는 물론 2004년까지 서울시 모든 지하철 역사에 엘리베이터를 설치하고 저상버스 도입을 위한 추진위원회를 구성하겠다고 약속한 것. 리프트를 장착한 100대의 콜택시 도입 역시 험난한 투쟁을 통해 얻어낸 성과였다.

법제화를 위한 점거, 또 점거

서울시를 상대로 한 투쟁이 일정한 성과를 거두면서, 이동권연대는 2002년 10월부터 이동권 보장을 위한 법률 제정에 나섰다. 지방자치단체의 의지만으론 온전히 이동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따라서 관련한 법률의 제정투쟁이 본격화됐다. 전국적인 공동대책위원회가 구성됐으며, 이동권연대가 2001년부터 3년간 받아온 서명용지가 국회에 전달됐다. 참여자만 54만 5천여 명. 2004년, 각고의 노력 끝에 법안이 국회에 상정됐지만 예산을 이유로, 기술상의 어려움을 이유로, 이동권의 제도적 보장을 축소 혹은 무산시키려는 시도가 계속됐다. 결국 장애인들은 다시 거리로 나섰다. 칼바람을 맞으며 국회 앞에 천막을 쳤고, 한나라당과 열린 우리당 점거했으며, 마포대교를 점거했다. 결국 2004년 12월 29일 저상버스도입을 의무화하고, 이동권을 독자적인 조항으로 명시한 ‘교통약자의 이동편의증진법’이 제정됐다. 2001년 오이도역 추락참사로 시작된 이동권 투쟁이 4년간에 걸친 대장정 속에서 일단락 지어진 것이다.

동정과 시혜를 넘어 존엄성을 가진 인간으로

진로를 예측하지 못했던 투쟁은 온몸을 내던진 비타협적인 투쟁을 통해 장애운동의 새 장을 열었다. “장애인들은 골방에 갇혀있었다. 사회에 있지만 사회에서 격리돼 유폐돼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장애인들의 일상을 보여주고, 일상 속에서 만들어진 이동권 투쟁은 삶과 밀착된 구체적인 권리를 제기했다. 이는 장애인이 투쟁의 중심에 서는 투쟁 주체의 변화를, 장애인 운동 방향의 지류를 변화시켰다.”(김도현) 이런 변화를 보여주듯 이동권 투쟁을 통해 많은 장애인활동가들이 등장했으며, 이동권 투쟁의 바통은 활동보조 투쟁으로, 그리고 지금의 주거권 보장과 탈시설 투쟁으로 이어졌다.

더불어 이동권 투쟁은 동정과 시혜, 연민으로 위치했던 장애인들에 대한 시선을 장애인 스스로의 직접행동을 통해 권리로 재구성했다.

“운동과정에서 가장 큰 문제는 자본의 논리, 돈의 논리였다. 그들은 조그만 돈으로 이것을 권리가 아닌 시혜와 동정으로 바라보고 아주 파편적으로 해결하려 했었다. 하지만 우리는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하는 것이 우선시돼야하고 이것들은 돈의 논리를 뛰어넘는다고 주장했다.”(박경석)

“이동권 투쟁은 요구만 하고 정부가 만들어주길 기대한 것이 아니었다. 온전히 몸을 던졌고, 모든 성과들은 비타협적인 투쟁을 통해 쟁취된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장애인은 시혜와 동정의 대상이 아니었다. 정부의 이동권 보장은 당연한 의무가 되었고, 비장애인들 역시 이것이 권리임을 부인하지 못했다. 이는 장애인들에게도 동일한 영향을 미쳤다.”(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 사무국장)

보장하라고 외치는 것을 넘어 모든 것을 걸고 싸워야한다는 것, 그렇게 싸워서 얻어낼 때만이 진정한 우리 것이 된다는 교훈은 장애인 당사자를, 장애운동을 그리고 활동가를 변화시켰다. 그러하기에 이동권 투쟁을 빼놓고 장애운동의 현재를 이야기하기는 불가능하다.

단절과 배제, 시혜와 연민이라는 울타리에 갇혀 일상을 전쟁처럼 살아야했던 장애인들. 가진 게 없어 자신의 몸을 내어놓고 투쟁하면서도 조롱과 비난을 감수했던 그 한 사람 한 사람의 절규. 지금도 계속되는, 장애인들의 일상과도 같은 처절한 투쟁이 폭풍처럼 휩쓸고 지나간 지금, 이동권은 어느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인권이 되었다. 인권은 그렇게 가시밭길을 따라 한걸음 더 내딛었고, 인권의 새싹을 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