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엥겔하트의 글에 대한 답글인 셈인, Wildes, "Solidarity in secular societies: Engelhardt and the post-modern dilemma"(같은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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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ldes, "세속사회와 연대: 엥겔하트와 탈현대적 딜레마"

연대에 대한 엥겔하트의 글은 윤리(학)에 있어서 "탈현대적 딜레마"를 구성하는 두 가지 위기에 기초한다. [즉] 도덕적 다원주의라는 현실과 [그] 도덕적 다원주의에 의해 제기되는 인식론적 문제가 그것들이다-- 우리는 상이한 도덕적 관점들 사이에서 어떻게 선택해야 할지를 알지 못한다. 근/현대(modern age)의 윤리학에서는 특정 공동체 혹은 관점 밖에서 도덕성과 윤리적 성찰의 기초를 찾았다고 할 수 있다. 16-17세기의 종교전쟁(들) 이후, 종교적 문제들은 점점더 세속정부의 영역이 아니라 "개인적" 선택의 문제가 되었다. 그러나, 성례(聖禮)의 문제들은 더 이상 국가에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지만, 공통의 도덕(성)의 문제는 여전히 [정부/국가의] 관심사로 남았다. 문제는 특정 종교 집단 및 신앙의 담론과 교리 밖에서 도덕적 문제들을 다루는 것이었다.
근/현대에는 신학이 아니라 철학이 대중의 도덕적 사유의 기초가 되었다(엥겔하트, 1991). 하지만 이러한 근대의 세속적 도덕(성) 프로젝트의 문제는 철학자나 종교의 숫자만큼 많은 상이한 철학적 설명이 있다는 것이다-- 도구적 이성과 행위의 결과(공리주의자들), 이성의 본질(칸트주의적 의무론자들), 덕목, 계약, 등등. 도덕(성)을 위한 근거들이 너무 많아, 그것들 중 어느 것을 (다른 것에 우위에 두고) 선택할 수 없는 것, 이것이 (부분적으로) 탈현대적 딜레마다.
오늘날, 기독교 문화의 헤게모니의 붕괴와 더불어, 이런 철학적 문제는 최고조에 달한다.  윤리(학)에 있어서 탈현대적 딜레마는 너무도 많은 철학적 근거들이 있다는 것뿐만이 아니라, 많은 상이한 실체적(content-full, 내용있는)(*) 도덕(성)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특정의 공동체를 초월하는 윤리적 틀을 구성하려는 근/현대의 희망은 끝난 것 같다. 많은 윤리적 틀과 특정의 도덕성이 있다. 윤리(학)을 위한 거대담론은 끝났다(Lyotard).

        주*) 내가 이 말-- content-full -- 을 사용하는 것은, 특정의 도덕적 문제 및 쟁점(들)을 확인하고 그것들에 대한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윤리적 관점들에는  내용(content)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그 관점들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덕목, 결과, 규칙들 혹은 원칙들에 대한 헌신과 같은 -- 표현/표출될 수 있다. 사람들은 도덕적 관점에 있어서 많은 것을 공유하면서도 매우 상이한 관점을 가질 수 있다. 예들들어, 두 사람이 자유와 평등의 관점에 헌신하면서도-- 그들이 그 가치들에 각자 상이한 우선순위를 두기 때문에-- 매우 상이한 도덕세계 안에 살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학자들은 사람들을 결속하는 어떤 요소들을 찾기 위한 대안적 전략들을 모색해왔다. 가장 중요한 방법의 하나는 도덕적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해 이차적, 혹은 중간수준의 원리들에 호소하는 것이었다. 오늘날의 응용윤리(학) 및 공공정책에서는 도덕적 논쟁을 해결하고 정책결정을 내리는 방법으로서 이런 원리들에 호소하는 것이 유행이다.
예를들어 생명윤리의 경우가 그렇다. 원칙주의(**) 방법은, 근본적 혹은 이론적 합의는 불필요하며 모든 도덕체계는 일련의 공통의, 중첩된 원리들을 갖고 있다고 가정한다. 우리는 종종 생명윤리에서 자율성, 선행, 악행금지, 그리고 정의 등의 원칙에 호소하는 것을 발견한다. 하지만 응용윤리(학)에서 이런 접근법에는 많은 개념적 문제들이 있다. 그런 원리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것들이 어떻게 해석되어야 하는지, 그것들이 어떤 서열로 서로 연결되는지 등이 종종 불분명하다. 이 문제는 생명윤리에서 분명히 나타난다. Beauchamp & Childress의 4가지 원칙(***)이 영미(英美) 생명윤리학을 지배하는 반면, 유럽의 생명윤리학에서는 '연대의 원칙'에 호소한다.

        ** 역자주) 원칙주의(principalism)-- 생명(의료)윤리에 대한 하나의 접근법. 어떤 하나의 궁극적인 도덕(이론)을 내세우고 그것으로부터 모든 생명윤리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이 아니라, 몇 가지 "중간수준"의 원칙들을 구체적 생명윤리의 문제에 적용하여 그 도덕적 답을 찾아나가는 접근법이다.
        *** 역자주) 바로 앞에서 언급된 자율성(autonomy), 선행(beneficence), 악행금지(non-maleficence), 그리고 정의(justice) 등의 원칙을 말한다. Beauchamp and Childress(1994)이 제안한 것이다.

처음의 딜레마는 어떤 원리들을 도덕적 성찰과 논증에 적용할까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딜레마는 훨씬 더 근본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설혹 어떤 원리가 적절하다고 확인될 수 있다고 해도, 도덕적으로 다원적인 사회에서 그것이 공통적으로, 의미있는 방식으로 이해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은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공통의 common 도덕적 담론 안에서도 원칙(들)에 대한 해석의 다원주의가 존재할 개연성이 높다. 예를들어 누구나 자율성의 원칙에 호소한다고 해도, 그것에 대한 해석은 상이할 수 있다.
연대의 원칙은 원칙(들)에 호소하는 것의 난점을 보여준다. 연대의 원칙은 영미의 도덕 담론에는 익숙치 않은 원칙이다. 그것은 계약하는 개인들 간의 사회적 및 법률적 관계를 넘어서는 내용을 담고 있는 듯하다. 그것은 또한 사회정의와 사회복지를 정당화하기 위해 전개된 사회도덕의 규범적 원칙인 것 같기도 하다. 18-19세기 프랑스와 독일이 법(학)과 노동운동에 기원을 갖는 그 용어는 개인간 및 직업적 의무들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된다. 분명한 것은 연대의 원칙이 규범적 원칙으로서 개진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개념의 역사를 살펴보면 우리는, 엥겔하트가 주장했듯이, "연대"라는 용어는 다수의 의미를 싣고/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연대에 대하여 많은(다른) 해석이 가능하다는 바로 그것이 그 말을 공공정책의 개발과 정당화에 사용하기가 어려운 이유이다.
엥겔하트도 이 점을 언급한다. 그는, 만약 연대의 개념이 공공정책 논의에서 전개되려면, 우리의 연대를 확인하고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밝히는 무언가가 있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예를들어 엥겔하트는 노동조합은 그들이 공통된 이익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연대의 대상을 갖는다고 주장한다.

문화적으로 다양한 세속 사회의 문제는 그런 사회들 안에는 연대에 대해서 어떤 유의미한 방식으로 말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공통점(들)이 없다는 것이다. 연대의 관념은 모종의 공동체(Gemeinshaft) 의식-- 그것이 집단, 이웃, 계급, 단체, 혹은 가족이 공유하는 가치(들)에 뿌리박은-- 을 전제한다. 문화적, 도덕적으로 다양한 사회에서는 연대가 무의미한 슬로건이나 혹은 이데올로기적 무기가 될 위험성이 있다. 특정의 정체성과 도덕적 관점을 지닌 어느/한 집단이 자신들의 견해를 다른 집단들에게 강요하기 위하여 강제적 국가권위를 사용하는 것을 연대의 이름으로 정당화할 수 있다. 이것이 엥겔하트의 우려의 핵심인 것 같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정부들은 그들의 폭력행위/행사를 도덕적 적절성/타당성으로 은폐하려고 한다. 이는 그 자체로 뿐만 아니라 그것이 제공하는 지적 정당화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면 이것이 연대의 언어를 포기해야 함을 의미하는가? 만약 우리가, 엥겔하트처럼, 세속국가의 국가권위의 사용에 관하여 연대가 갖는 함의를 우려한다면, 그 답은 '그렇다'이다. 연대에 호소하는 것은 그 필요조건으로서 어느 정도/수준의 공동체를 전제한다. 도덕적으로 다원주의적이고 문화적으로 다양한 사회에서는 전국/국민적(national) 수준에서 "공동체"나 연대를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우리는 연대나 공동체 같은 말들을 비유적으로(analogous) 사용할 수는 있다. 만약 우리가--국가권위의 문제를 넘어서서-- 세속사회 안에서 무엇이 가능할 수 있는가에 주목한다면, 연대의 가능성은 좀더 희망적인 것 같다. 도덕적 다원주의의 맥락 속에서, 상이한 도덕 공동체들이 서로 연대할 수 있는 많은 지점들이 있을 수 있다. 그들은 특정 쟁점(예를들어, 낙태)에 대해 같은 견해를 가질 수 있으며, 좀더 넓은 문제(예를들어, 인권)에 대해서 연대할 수 있다.

탈현대성(post-modernity)는... 공동체의 종언을 의미하지 않는다. 또한 탈현대성은 연대(성)의 완전한 상실도 수반하지 않는다. 탈현대성이 의미하는 바는 공동체나 연대(성) 개념들이 도덕적 논의에서 주의깊게 전개/개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도덕 언어의 파편화는 "연대"와 같은 말들이 많은 상이한 의미를 띨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런 상황에서는, 도덕 용어들이 명료함보다는 오해(잘못된 해석)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연대는 공동체에 대한 가정 없이는 논의될 수 없다. 연대에 대한 이런 논의에서 엥겔하트는 공동체에 대한 매우 강한 관념을 가정하고 있다. 그는 이렇게 쓴다:

아무튼, 전통적인 종교공동체는 왜 그리고 어떻게 연대 안에서 협동해야만 하는가를 규범/정전적으로 설명할 뿐만 아니라 개인, 사회, 세계, 그리고 심지언 존재 그 자체에 대한 깊은 설명을 제시한다. 전통적 종교는 탄생, 결혼, 죽음의 의미에 대한 깊은 설명을 제공한다.

이것이 공동체의 한 모델이긴 하지만, 이것이 유일한 것은 아니다. 엥겔하트는 매우 특정한 모델을 사용한다. 그리고 이 모델은 세속사회 안에서 가능한 도덕담론에 대한 그의 견해에 대해 알려준다. 하지만 탈현대 사회 안에서는 공동체에 대한 많은 설명이 있을 것이며, 한 모델을 규정적인 것으로 고수할 수 없다.
인류학자나 사회과학자들은 공동체가 넓은 방식으로 스스로를 정의한다고 지적한다. 어떤 공동체들은 스스로를 엄격하게 이해한다. 공동체와 나머지 세상 사이에는 분명한 경계선이 있다. 이것이 엥겔하트가 공동체라는 말을 사용하는 방식이다. [하지만] 좀더 유연한 경계를 갖는 다른 공동체들도 많다. 사실, 어떤 공동체들은 통일주의적(ecumenical)이고 비-배제적인 것으로 스스로를 정의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의 로마 가톨릭을 그런 공동체의 예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좀더 확장적인 공동체의 관점을 가진 사람들은 다른 공동체들과의 도덕적 친교(acquaintanceship)의 연대에 대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한 도덕 공동체의 성원들이 도덕적 친구이고, 다른 도덕적 관점을 지닌 사람들이 도덕적 이방인이라고 할지라도, 그들 간에는 도덕적 친교-- 즉 상이한 도덕 공동체 출신의 남녀가 특정 도덕 프로젝트(들)에 대한 중첩된 가치(관), 원칙 들을 갖는-- 의 가능성 또한 있는 것이다.
엥겔하트가 강한 공동체  모델을 가정하기 때문에, 그의 글은 오해(잘못 해석)될 수 있다. 그의 모델에 의하면, 연대에 대한 요구는 자신의 공동체 바깥에서는 최소한의 것, 혹은 빈 것이 될 것임은 아주 분명하다. 하지만 다른 좀더 개방된 공동체 개념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공동체 바깥의 다른 사람들과의 연대와 공동 프로젝트가 가능할 것이다.
이런 가능성을 인정하는 것은 엥겔하트를 비판할 많은 사람들에게 줄 대답을 준비하는 것이기도 하다. 즉 누군가는 세속사회 안에서 남녀들을 묶는 공통의 도덕(성)이 있다고 주장할 수 있다. Beauchamp & Childress는 4가지 원칙들을 묶어 "공통의 도덕(성)"으로 제시한다(1994). 여기에서 위험성은 사람들이 연대와 공통의 도덕(성)을 찾고자 하는 열망 속에서 차이를 억압하고 "합의"를 오해(잘못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합의(들)은 때로는 우연적인 것이고 약한 것이다.
그런 합의가 강제적 국가권위의 사용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될 수 있다고 의심하는 점에서  엥겔하트는 옳다. 하지만 그는 이런 합의들이 세속사회에서 많은 사람들이 공통의 프로젝트를 구성하는 지점이 된다는 점을 과소평가한다. 도덕적 친교 관계에 있는 사람들도 연대에 대해 말할 수 있다.

공공정책에 대한 함의는 무엇인가? 우리는 로마 가톨릭의 사회적 가르침에 있어서 연대에 대한 엥겔하트의 비판을 개조할(recast) 수 있다. 오늘날의 세속사회에는 사람들이 연대를 맺고 있는 많은 상이한 공동체들이 있을 것이다. 보조성(subsidiarity)의 개념 하에서는, 더 큰 세속사회가 그 시민들에게 연대를 명령할 권위를 갖지 못한다. 인간의 기본적인 필요욕구(needs)는 가장 낮은 수준의 사회조직에서 충족되어야만 한다. 더 큰 사회가 지방(local) 수준의 사히에 간섭하면, 그것은 권위의 남용(오용)이 된다. 더욱이, 보조성의 필요조건은 지방 수준에서 이미 연대가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주****)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대의 개념은 탈현대 사회에서도 여전히 매력적인 것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탈현대 사회에서도 사람들은 공동체 안에서 뿐만 아니라 다른 공동체와도 연대를 발견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연대는 국민적/일국적 도덕 공동체를 지탱하는 데에는 불충분할지 몰라도, 그런 공동체를 전망하도록 영감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주****) 보조성의 원칙은 교황 Pius 11세의 회칙인 Quadragesimo Anno(40주년,, 1931)에 분명하게 등장한다. 파시즘과 사회주의 권위주의의 물결에 대응하여, 교황은 국가의 권력은 무제한의 것이 아니라고 썼다. 국가는 보조성의 원칙을 따라야 한다. 그 원칙이란, 어떤 사회적 과제든 그것은 가능한 한 가장 작은 단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이웃에 앞서 가족 안에서, 중앙정부에 앞서 지방정부에서-- 는 것이다. 그것은 아래로부터의(from the bottom up) 사회와 권위의 관점이다. 회칙의 주요 자문역이었던 Nell-Breuning은 자신이 아브라함 링컨에게서 영감을 받았다고 썼다-- "정부의 정당한/합법적인 목적은 인민이 필요로 하지만 스스로 하지 못하는, 또는 잘 하지 못하는 것을 해주는 것이다. 인민 스스로가 개별적으로 잘 할 수 있는 것에 정부는 개입해서는 안된다."

윤리(학)에 있어서 탈현대적 딜레마는 사회학적인 것이면서 또한 철학적인 것이다. 그것은 도덕적 다원주의로부터 기인한 딜레마이다. 상이한 도덕적 방법, 견해들이 있고 상이한 윤리체계들이 있지만 그것들 사이에서 선택할 방도는 없다. 우리는 도덕 용어들이 항상 같은 의미를 지닌다고 가정할 수 없다. 엥겔하트처럼 강한 도덕 공동체를 상정할 때 특히 그렇다. 하지만 바꾸어 말하는 것(translation)이 가능하다. 합의와 공유된 가치도 가능하다. 우리는 많은 철학자들이 희망하는 것에 훨씬 못 미칠 수도 있지만, 엥겔하트가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보다는 좀더 많은 것을 성취할 수 있을 것이다.

필자-- 미국 워싱턴 D.C., 조오지타운 대학교 철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