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와! 일단 슈타인포르트의 글에 공감 만빵!!!

- 결론적으로 슈타인포르트가 주장하는 “연대는 prudenc와 도덕의 결합”이다. 도덕은 알겠는데, prudence란 도대체 뭔 뜻인가? 강동일 선생님은 이를 ‘타산성’이라고 번역했다.

- Daum한영사전에서 prudence의 형용형인 prudent를 찾아보면, “1. 신중한(cautious), 조심성 있는, 세심한; 분별 있는, 현명한 / 2. 빈틈없는, 타산적인(self-interested) / 3. 검약하는, 알뜰한” 이상 세 가지 의미가 있다. 여기 보면 두 번째 의미로 “타산적인”이라는 뜻이 있긴 하다.
- 하지만 Daum영영사전에서 prudent를 찾아보면, “1. wise or careful in conduct / 2. shrewd or thrifty in planning ahead / 3. wary; discreet”으로 되어 있다. 이를 그대로 한역하면, “1. 행동을 하는 데 있어서 현명한, 주의 깊은 / 2. 향후 계획을 세우는 데 있어서 빈틈없는, 검약한 / 3. 조심성 있는, 신중한”이다. ‘타산적인’이란 뜻을 직접 볼 수는 없는 것이다.
- 우리나라에서 ‘타산’은 흔히 이해와 결합한다. ‘이해+타산’이란 자기 잇속만 챙긴다는 부정적 의미가 느껴진다. 비록 국어사전에서 ‘타산’이란 “이해관계를 따져 셈쳐 봄”이라는 다소 건조한 의미임에도 불구하고. 실제 영어 본래의 의미대로 prudent의 뜻을 유추해 보면, 자기 잇속만 챙긴다는 의미라기보다는, 신중하고 현명하고 검약하고 빈틈이 없(어서 손해 보지 않는 의미에서 타산적이)다는 뜻이다.

- “prudence는 하나의 덕목으로 간주되며, … 이 단어는 … ‘선견(foresight), 총명(sagacity)’에서 유래하며, … 종종 지혜(wisdom), 통찰(insight), 지식(knowledge)과 연합된다. 이 경우 덕목은, 일반적인 의미에서뿐만 아니라 주어진 시간과 장소에 적절한 행동을 고려하여, 덕이 높은 (virtuous) 행동과 사악한 (vicious) 행동을 판결하는 능력이다. … 하지만 현대 영여에서 이 단어는 조심성(cautiousness)이란 단어와 점차 동의어가 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prudence는 위험을 감행하는 것을 꺼림(reluctance)이라 칭하고, 불필요한 위험에 대한 숙고를 지닌 덕목으로 남아있으나, 이유 없이 광범해지면 (즉, 과다 조심성), 신중은 비겁함의 악덕이 될 수 있다.”
- 위 인용문은 prudence에 대한 위키피디아의 설명을 한역해 놓은 것이다. 이러한 설명을 읽으면서 prudence를 대신할 단어를 찾는다면 무엇일까? 아무래도 ‘타산성’은 어색해 보인다. 역자는 prudence를 ‘신중’이라 번역했으며, 나도 여기에 동의하는 편이다. 결론적으로 슈타인포르트가 주장하는 연대는 신중과 도덕의 결합이며, prudence를 신중으로 이해하고 글을 읽으면 슈타인포르트의 글이 보다 더 매끄러워짐을 느낄 수 있다.

- 서설이 길었는데, 그건 그만큼 슈타르포르트의 글을 읽으면서 prudence란 단어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나 나름대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근데 여기서 잠시! prudence에 대한 이야기는 접고, 내가 슈타인포르트의 주장에 공감한 것 중 다른 하나를 먼저 이야기하자.
- “자유의 이상은 개인주의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 하지만 그것은 모든 개인의 권리를 주장하며, 따라서 자신의 자유뿐만 아니라 모든 다른 사람의 자유도 존중하고 방어하고 또 그것을 위해 싸울 것을 요구한다는 것으로, 비개인주의적으로 해석될 수 있다. 존중의 요구는 단순히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것으로 충족된다. 하지만 다른 모든 사람의 자유를 방어하고 그것을 위해 싸우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누군가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에 맞서 싸울 때에만 충족될 수 있다. 이렇게 이해된 자유의 이상이 요구하는 행위는 강한 의미로 비개인주의적, 사회주의적, 우애적, 혹은 이타주의적이다. 이런 특별한 의미의 연대에 대한 호소가 혁명의 시기에 혁명가들 안에 존재했다. 나는 이것을, 타인의 자유에 대한 존중에 한정하는 <온건한 moderate)> 연대와 구분하기 위해서, <급진적인 (radical)> 연대라 부른다.”
- 너무 멋지지 않은가? 자유를 이렇게 해석할 수 있다니? 이러한 관점은 자유(개인)와 연대(집단)가 가지는 미묘한 긴장관계를 풀 수 있는 묘안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근데 슈타인포르트는 온건한 연대가 아닌 급진적 연대를 ‘바로’ 주장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급진적 연대를 호소하는 국가는 프랑스 혁명과 사회주의 혁명의 경우처럼 전제국가여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슈타인포르트가 온건한 연대로 후퇴하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슈타인포르트는 이 딜레마를 어떻게 해결할까?

- 슈타인포르트의 하나의 규범을 제시하고, 이에 근거해 하나의 사실을 주장한다. 슈타인포르트가 제시하는 규범은 “생산을 시작할 자연자원은 인류 공동의 재산”이라는 것이다. 이는 “사람들이 자연자원에 대한 평등한 접근권으로부터 배제하는 기관에 저항할 권리를 가진다”는 함의다. 슈타인포르트가 주장하는 ‘사실’이란 “사람들이 (한편으로) 자유와 평등 (또는 평등한 자유)라는 정치적 이상을 믿음과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 동등한 자유에 대한 그들의 권리가 침해된다고 느낄 때, 사람들은 위험해진다”는 것이다.
- 슈타인포르트는 규범을 제시함으로써 적극적 연대로 나아가려는 사람들에게 도덕적 정당성을 제공하고, 사실을 주장함으로써 온건한 연대에 머무르려는 사람들에게 더 나아가야 한다고 다그친다. ‘신중’이란 개념은 바로 여기서 등장한다. 즉, 사람들이 신중하지 않고 온건한 연대에 머무르게 되면, 사람들은 위험해지고, 이는 그들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도 해가 된다는 것이다.

- 슈타인포르트는 연대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연대가 이루어지기 위해 어떤 요소들이 필요한지를 보여주고 있어 매력적이다. 이른바, 온건한 연대의 신중과 급진적 연대의 도덕을 결합한 연대! 슈타인포르트는 또한 “양자의 결합은 -- 그것이 모든 사람의 권리를 방어하고 그것을 위해 싸운다는 생각에 의해, 즉 급진적 연대에 의해, 고무될수록 -- 더 신속히 갈등의 해결로 귀결될 것”이라고 주장함으로써, 급진적 연대의 도덕이 온건한 연대의 신중을 추동한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것이 슈타인포르트가 주장하는 연대의 또 다른 매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