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책 Part I의 Steinvorth, "The concept and possibilities of solidarity"입니다.
흔히 개인주의적인 것이라고 얘기되는 "자유"(의 권리)에 대해 집단주의적, 이타주의적 해석을 제시한 점과,
'노동조건'의 개념을 활용하여 (Hegel, Rawls 등의) 협력적 사회관을 비판한 점이 흥미롭습니다.

이번에도 역시 전문번역입니다(에구~~ 머리 쓰기 귀찮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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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invorth, "연대의 개념과 가능성들"

사실 자유, 평등, 우애라는 triad는 많은 정치적 언어들(paroles) 중에서 역사가들이 선택한 것이다. 연대(solidarity)의 개념은 혁명세력이 호소한 이상들 중의 하나였지만-- 그것의 원래 의미가 무엇이었든 간에-- 그것은 19세기 중엽에 정치적 언어로서 새로운 경력을 시작했고 혁명의 triad 중에서 우애(fraternity)의 언어를 밀어내기 시작했다. 오늘날 많은 정당, 정치단체들은 종종 자유·평등·연대에 호소한다. 이들이 연대를 정확히 무슨 의미로 사용하는지 정의하기는 어렵지만, 그것이 비-개인주의적, 비경쟁적, 비-배제적 이상에 대한 찬사(verbal tribute)로 사용된다는 것으로 널리 이해되고 있다.
이 개념을 정의하는 데 있어서 어려움 중의 하나는 우리가 정치적 맥락에서 비개인주의적 행위를 어떻게 정의할지를 잘 모른다는 점이다. 우리가 그것을 우애적, 집단적, 사회주의적,  혹은 심지어 코뮨주의적인 것이라고 서술하는 순간, 연대에 호소하기를 좋아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을 배척할 것이다. 연대의 개념이 성공한 것은 그것의 불분명한 의미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바로 그 때문이었다. 이러한 성공은 그 용어가 호소하는 유형의 행동이 적극적인... 개념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의해서, 그리고 우애적, 집단주의적, 혹은 사회주의적 행위의/라는 적극적 개념이 연상되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운 개념을  가질 필요에 의해서, 설명된다.
이런 추측이 옳건 그르건 간에, 우리는 다음의 두 조건을 충족하는 행위들이 있는지 물을 수 있다-- 첫째, 우애적이거나 사회주의적이지 않고서도 비개인주의적인 행위; 둘째, 사회주의적 행위가 인간과 사회에 유해하다는 일반의 믿음과 상관없이 오늘날 필요하고 또 필요하다고 느껴지는 행위. 만약 그런 행위가 있다면, 우리는 첫째로 연대 개념을 정의할 수 있을 것이고 둘째로 연대에 대한 호소를 정당화할 수 있을 것이다.
비개인주의적이면서 또 오늘날 필요한(요구되는) 행위 유형을 확인하기 전에, 나는 오늘날 연대에 호소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근거하고자 하지 않는 한 종류의 행위에 대해 설명하고 싶다. 즉 그것은 사회주의적 혹은 우애적 혹은 이타주의적이라고 불리는 행위이다.  하지만 내 생각에 이것은 혁명시기의 우애나 연대에 대한 호소가 의미하는 바의 행위였고, 모든 사람의 자유(liberty)에 기여하며 또 자유라는 정치적 이상에 의해 요구되기조차 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는 행위이다. 자유의 이상은 개인주의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모든(every) 개인의 권리를 주장하며, 따라서 자신의 자유뿐만 아니라 모든 다른 사람의 자유도 존중하고 방어하고 또 그것을 위해 싸울 것을 요구한다는 것으로, 비개인주의적으로 해석될 수 있다. 존중의 요구는 단순히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것으로 충족된다. 하지만 다른 모든 사람의 자유를 방어하고 그것을 위해 싸우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누군가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에 맞서싸울 때에만 충족될 수 있다. 이렇게 이해된 자유의 이상이 요구하는 행위는 강한 의미로 비개인주의적, 사회주의적, 우애적, 혹은 이타주의적이다. 이런 특별한 의미의 연대에 대한 호소가-- 비록 우리 시대에는 드물지만-- 혁명의 시기에, 혁명가들 안에 존재했다. 나는 이것을, 타인의 자유에 대한 존중에 한정하는 <온건한>(moderate) 연대와 구분하기 위해서, <급진적인> (radical) 연대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 어느 종류의 연대든, 그 목표 안에 우리는 자유와 평등뿐만 아니라 인간에게 귀속된 모든 권리들을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오늘날 연대에 대한 호소가 온건한 연대에 대한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이런 종류의 연대는 오직 급진적 연대와의 대비 속에서만 그 이름을-- 정의의 이름으로 타자에 대한 관심이 얼마만큼 요구될 수 있는가, 그리고 정의의 기관들(특히 국가)에 의해 사람들에게 합법적으로 얼마나 강제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꼬리표로서-- 얻을 수 있다. 여기에서 온건한 연대 개념은 정의의 주장들을 충족시키기 위해 보여져야만 할 타자에 대한 최소한의 관심의 수준을 가리키기 위한 도구로서 사용되었을 뿐이다. 그것을 온건한 연대라고 부르는 대신, 우리는 그것을 형식적 연대 혹은 심지어 가짜(fake) 연대라고 부를 수도 있다. 아무튼, 오늘날의 연대에 대한 호소는 단지 그것이 온건한 연대와 급진적 연대 사이의 모종의 행위에 호소하기 때문에 관심거리가 된다. 그것은 단지 온건한 연대만을 요구하는 기존의 정의 관념과 결별하기를 원치 않지만, 또한 온건한 연대에만 스스로를 한정하는 것은 경솔하고 부도덕한 것이라고 전제한다.
기존의 정의 관념은 급진적 연대를 거부할 좋은 이유를 갖고 있다. 도덕적 이상주의자들이 아무리 반발해도, 그것[기존의 정의 개념]은 도덕(성)과 완전히 부합한다. 도덕은 우리에게 도덕적 영웅이 되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의 권리를 존중하지 않는 것은 부도덕한 일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제3자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을 보고도 우리가 수동적으로 남아있다고 해도 우리는 부도덕한 것이 아니다. 국가권력은 우리의 자유 혹은 자결권을 침해하지 않고서는 우리에게 도덕적 영웅의 행위를 강요할 수 없다. 따라서 급진적 연대는 의무가 될 수 없다. 그것에 호소하는 국가는 전제국가여만 한다--프랑스 혁명과 사회주의 혁명의 경우에 그랬던 것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건한 연대는 오늘날의 정치상황에서는 너무 약한 기준인 것 같다. 자신의 이익이나 권리에 집착하는 것보다는 타인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는 것이 종종 더 합리적인, 즉 자신의 이익에 부합하는 것이다-- 죄수의 딜레마.
이런 합리성의 확장과 비슷하게, 기존의 정의의 관념도 확장된다. 즉 오늘날의 가장 심각한 정치적 문제 및 갈등들은 온건한 연대로는 극복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보다 더 강한 형태가 의무적인 것으로 강제하려는 노력이 있어왔다. 그것은 현대사회에서 각 성원은 서로 의존하며, 따라서 다른 성원들의 이익을 신장하지 않고서는 자신의 이익을 신장할 수 없다는 견해에 기초해 있다. 그러나 이 견해는-- 비록 명석한 철학자들이 지지하는 것이지만-- 기묘하게 잘못되어 있다. 오늘날 요구되는 연대는-- 이런 잘못된 사회상이 진정으로 올바른 것으로 대체될 때까지는-- 결코 분명히 이해될 수도 정당화될 수도 없다.
John Rawls는 현대사회에 대한 잘못된 그림을 따르고 있다. 그는 부자들의 복리를 최빈자들의 복리와 연결시키면서, 이렇게 선언한다-- "각자의 행복은 사회적 협력 체계에 의존함이 분명하다. 그것 없이는 아무도 만족스런 삶을 살 수 없다." 그리고 심지어 최상층조차도 최빈층의 "기꺼운 협력"에 의존하며, 그렇지 않으면 "그들의 협력"을 기대할 수 없다(1971).
이와 비슷하게, 150년 전에 기존의 정치적 정의 관념을 비판한 최초의 철학자들 중의 한 사람인 Hegel은 현대사회가 "노동의 의존성과 상호성"을 포함하며, 그 상호의존(성)을 "모든 사람들의 의존의 보편적인 얽힘(Verschlingung, interlacement, 교직)"이라고 보았다(1833). 분명히 그는 사회를 "상호이익을 위한 협동"으로 정의하는 Rawls에 동의했을 것이다. 이런 견해에 따르면, 사회 내 각 성원들은, 만약 그들이 합리적으로 행동한다면, 다른 모든 사람의 이익과 함께라야만 자신의 이익을 신장할 수 있다.
오늘날의 높고 지속적인 실업에 직면하여, 우리는 이런 생각의 적용가능성에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 [물론] 헤겔도 롤즈도 현대사회에서 실업의 가능성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사회상에 따르면, 지속적 실업조차도 어떻게든 여전히 노동과 개인의 상호의존에 속하는 상태이다.
하지만 이런 견해는... 오늘날의 지속적인 실업이 그 희생자들을 부(富)의 원천인 사회적 (노동)분업으로부터 배제한다는 사실을 은폐한다. 좀더 일반적으로 말하면, 사회를 상호의존으로 보는 관점은 그 의존성이 [거의 대부분] 비대칭적이라는 사실을 놓친다. 사회적 분업은 개인들의 상호의존보다는 일부 사람들, 심지어 일부 국민들의 [타인, 타국민에 대한] 완전한 의존의 원인이다. 그리고 이들은 그 의존적인 타인 및 타국민으로부터, 그들의 "기꺼운 협력"으로부터도 완전히 독립적으로 될 것이다. 이들은 기계와 그것을 조작할 줄 아는 사람들에게 의존하지만, 그 기계에 의해 대체되는 사람들에게는 의존하지 않는다.
철학 영역 밖에서는 현대사회의 개인들 간의 상호의존성, 상호성의 결여가 명백하기 때문에, 문제는 어떻게 우리가 노동의 얽힘(Verschlingung)을 개인들 간의 상호의존으로 혼동하게 되는가, 그리고 심지어 어떤 철학자는--억압과 착취의 장인-- 사회를 협동사업이라고 정의하게 되는가 하는 것이 된다. 철학자들은 세상에 대한 무지로 악명 높지만, 이것이 헤겔과 롤즈의 오류를 설명하진 못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실업에 대해 무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다른 설명을 필요로 한다. 헤겔과 롤즈의 협력적 사회 관념은 연대에 대한 호소의 동기가 되면서 동시에 그것들을 거부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따라서 그런 호소가 근거가 있는 것임을 보이기 위해서는, 무엇이 헤겔과 롤즈로 하여금 잘못된 사회적 분업 관념으로 이끌었는지 추론해볼 필요가 있다.
나는 그들의 오류의 기원을 부적절한 노동 개념에서 찾는다. 헤겔과 롤즈는 노동을 어떤 재화가 생산되도록 하는 육체와 정신의 노력(effort)으로 이해한다. 그들이 고려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노동은, 먼저 노동에 의해서 좀더 가치있는 또는 유용한 재화로 변형된 자연의 산물(자연재, good of nature)이 없으면 --[다시 말해서, 자연의 산물이 먼저 [다른/이전의] 노동에 의해서 좀더 유용한 것으로 변형되(어 있)지 않으면] -- 아무 것도 생산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이런 '노동(의) 조건'을 간과/무시하는 것은 Hobbes나 Locke 이래의 사회이론에서 흔한 일이며, 거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17세기에는 자연자원은 풍부하게 존재하는 것처럼 보였고, 따라서 국부(國富)는, 자연의 산물이 아니라, 노동의 양과 질에 의존했다. 이런 역사적 사실이 그 어떤 노동도 노동에 의해 변형될 대상에 의존한다는 점을 간과/무시한 것을 정당화하지는 않는다. 노동을 물질적 대상과는 무관한 노력으로서 파악한 Hegel과 Rawls는 노동의 얽힘을 노력의 상호의존으로 이해했고 사람들이 노동의 물질적 조건에 대해 갖는 지배/통제력의 차이를 성찰하지 못했다. 물질적 노동조건들을 지배하는 사람들은 협력하고자 하는 의지 이외에는 제공할 것이 없는 사람들을 사회적 생산체계로부터 배제할 수 있다는 사실을 물론 Hegel과 Rawls는 알고 있었지만, 그러나 그들은 그 사실로부터 적절한 개념적 결과를 이끌어내지 않았다.
요컨대, 사회는 상호이익을 위한 협력사업으로 결코 이해될 수 없다. 그보다는, 사회는 어떤 영역/영토 위에 사는 개인들의 집단들의 집합체이다. 그들은 거기에 있는 자연의 산물을 이용/전유/착취한다. 이 전유/착취를 위해 가끔 그들은 협력한다. 하지만 거기에는 그 중 일부가 자연자원을 강탈하고 다른 나머지 사람들을 배제하며 이들을 착취의 대상에 포함/추가하는 위험을 항상 수반한다.

협력적 사회 개념을 착취적 개념으로 대체함으로써 우리는 연대에 대한 오늘날의 호소와 관련하여 무엇을 얻는가? 헤겔과 롤즈 등이 주장하는 개인들의 상호의존성이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이는 것은 그런 호소를 정당화할 가능성을 잠식하는 게 아닌가?
사실은 우리는 기존의 정의 관념의 환상적 기초를 해체하고 그것을 좀더 견고한 것으로 대체하는 것일 뿐이다. 그 견고한 기초는 환상이 아닌 사실과 규범(norm)을 결합하는 것이다. 환상이 아닌 사실이란 사람들이 (한편으로) 자유와 평등(또는 평등한 자유)의/라는 정치적 이상을 믿음과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 동등한 자유에 대한 그들의 권리가 침해된다고 느낄 때, 사람들은 위험해진다는 것이다. 규범이란 생산을 시작할 자연자원은 인류 공동의 재산이라는 것이다. 이 규범은 평등한 자유의 규범이 함의하는 것이며, 이것을 거부하지 않고서는 거부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연의 산물(자연재)이 인류의 공동재산이 아니(라)면, 일부 사람들이 그것에 접근할 특권을 갖게 될 것이며, 평등한 자유는 침해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주장이 어떤 사적 전유(appropriation)의 부당성/비합법성을 함축하지 않음을 주의하라. 이것은 사적 전유로부터 오직 자연의 산물(자연재)만을 제외하며, 개인, 가족, 공장, 혹은 국민들의 노동에 의해 부가된 가치(부가가치)는 (사적전유의 제외 대상이 아니다) 아니다. 이런 가치들의 사적 전유는 평등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은, 자연의 산물(자연재)에 대한 평등한 접근(권)을 갖고 있다는 가정 하에서, 그것에 자신의 노동을 투여하고 그 결과를 전유함에 있어서 평등하게 자유롭기 때문이다.

자연자원이 인류 공동의 재산이라는 규범은 사람들이 자연자원에 대한 평등한 접근권으로부터 그들을 배제하는 기관/제도들에 저항할 권리를 가짐을 함의한다. 이런 일은 장기 실업의 경우에 개발/저개발국을 막론하고 발생하고 있는 바이다. 그러나 그들의 행위 중 어떤 것이 정당화될 수 있는지 말하기란 매우 어렵다. 다른 도덕에서와 마찬가지로 정치에서도, 우리는 정당한 행위에 대한 어떤 추상적 규칙(들)을 정식화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추상적 규칙들로부터 우리의 구체적 행동을 연역하기에는 사회생활은 너무 복잡하다. 당연히, 자신의 평등자유권을 침해당했다고 느끼는 사람은 자신의 [저항]행위가 정당하다고 생각할 것인 반면, 그의 행동에 의해 위협받는 사람들은, 설혹 원칙적으로는 그의 권리에 동의하더라도, 그의 행동이 부당한/비합법적인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자연자원에 대한 동등한 접근권을 보장하지 않는 현대사회에서는 이익의 갈등과 권리의 갈등을 예상할 수 있다. 이런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온건한 연대와 급진적 연대 사이에 있는 어떤 종류의 연대가 필요하다. 물론 급진적 연대가 이 갈등을 해결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정당하게/합법적으로 강제될 수도 없고 합리적으로 추천될 수도 없을지 모른다. 반면에 온건한 연대는 그것을 해결하기에는 너무 약할 수 있다. 그러나 앞서 서술한 갈등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이 타인들의 권리를 침해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온건한 연대를 추구하는 것은 갈등을 첨예화할 것이다.
요구되는 연대는 타산성(prudence)과 도덕을 결합한 것이다. 갈등을 첨예화하는 것은 비합리적이고 (또는 경솔하고) 부도덕한 일일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권리 침해를 조장하고 양쪽 모두에게 해를 줄 것이기 때문이다. 양자의 결합은-- 그것이 모든 사람의 권리를 방어하고 그것을 위해 싸운다는 생각에 의해해, 즉 급진적 연대에 의해, 고무될수록-- 더 신속히 갈등의 해결로 귀결될 것이다. 그러나 자기자신의 이익을 보호하는 가장 합리적 방법으로서만 정당화되는 해결책은 단지 강제될 수 있을 뿐이다.
사실 유럽 복지국가의 역사는 이런 고찰을 입증/확인한다. 복지국가의 주창자들이 호소한 연대는 바로 이런 타산성과 도덕(성)의 결합이었다. 복지국가는 빈자들이 자신들을 해칠지 모른다는 부자들의 두려움 없이는, 그리고 모든 사람은 나라의 부(富)의 샘(spring)에 참여할 권리가 있다는 신념 없이는, 수립될 수 없었다. 복지국가의 수립에 수반된 연대에 대한 호소는, 그런 결정을 뒷받침한 두려움--그리고 도덕적 신념--에도 불구하고 정당화된 것이 아니라, 바로 그것 때문에 정당화되었다. 사실, 연대적으로 행동할 이유가 없이는 연대도 있을 수 없다. 그러나 또한 자신의 이익에 대한 강한 두려움 없이는 가짜(fake) 형태의 온건한 연대 이상의 요구도, 국가에 의해 강제될 수 있는 연대의 형태도 있을 수 없다. 권리(들)가 위험에 처할 정도로 이익(들)이 위험에 처할 때에만 국가는... 모든 사람을 강제하는 제도를 정당하게/합법적으로 강제할 수 있다.
우리는, 오직 타산(성)에 의해서만, 좀더 구체적으로, 평등한 자유에 대한 강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에 의해 제기되는 위험에 대한 두려움에 의해서만, 정치에 있어서 도덕적 행위가 가능한 것 같다는 점을 유감으로 생각할 수 있다. 유럽에서 빈자들이 부자들에게 더 이상 위험하게 되지 않을 때에는-- 부분적으로는 복지국가의 혜택 때문에-- 복지국가를 지지하는 부자들의 이유가 사르러든다는 점을 유감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얘기를 좀더 원만한 각도에서 보아야만 한다. 자기이익의 지배를 블평하는 대신, 우리는 자기이익을 도덕(성)의 수단으로 인식해야만 한다. 이것은 자연재에 대한 접근(권)이 제한된/없는 사람들이 특권층에 위협이 될 때가 연대를 위해서 가장 중요한 때라는 것을 우리가 인정해야 함을 의미한다. 그 연대는 급진적 연대도 온건한 연대도 아닌, 온건한 연대의 타산(성)과 급진적 연대의 도덕성을 결합한 것일 것이다.
오늘날 요구되는 연대가 타산성과 도덕성을 결합한 것이라는 나의 주장을 확증하는 몇 가지 언급으로 마무리하려고 한다. 피착취 노동자들로부터 발생하고 복지국가의 연대를 낳은 전자의 위험은 오늘날 이주자들로부터 발생하는 위험으로 대체되고 있다. 그들이 그렇게 행동하는 것은 어느 정도 정당하다. 왜냐하면 매우 종종 그것은 그들이 자연자원에 대한 평등한 접근의 권리를 행사하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한편, 잘 사는 나라의 사람들이 이주자들에 의해 그들의 이익과 권리가 위험에 처한다고 느끼는 것도 부당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다수로 몰려오는 이주자들은 이주하는 나라들의 제도들을 위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부자들은 이 갈등을 두 가지 방식으로 해결할 수 있다-- 노골적인 폭력을 써서 이주자들을 추방하거나 아니면 저개발국을 실질적으로 원조하여 그들의 이주가 멈추도록 하는 것이다. 폭력의 사용은 기존의 정의 관념에서 원칙적으로 배제되는 것은 아니며, 그래서 자신의 권리보다 열등한 것이라고 판단하는 권리를 지닌 다른 사람들에 대해 폭력을 사용하는 것을  허용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판단하는 경향이 있다. 한편, 폭력의 사용은 자연자원에 대한 이주자들의 자연자원에 대한 동등한 접근의 권리를 침해할 수 있으며, 그들의 그런 권리는 방어하는 사람들의 제도나 재산의 권리보다 열등하다고 말할 수 없다. 따라서. 도덕적 견지에서 볼 때, 폭력의 사용이 정당한 것인가 하는 점은 처음부터 매우 의문의 여지가 큰 것이다. 그리고 타산적 관점에서도 의문의 여지가 있다-- 부자들이 폭력의 사용으로부터 최상의 이득을 얻을 것인가? 따라서 부자 나라들은, 의문스러운 정당성과 합리성을 피하기를 원한다면, 저개발 국가들을 관대하게 지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며, 온건한 연대 이상의 것을 해야만 한다.

필자: 독일 함부르크 대학교 철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