랑시에르 그리고 배역보다 많은 등장인물이 나오는 연극

정치판은 당파적 이익들의 각축장이 된 지 오래다. 68년 이후 부모, 선생, 지도자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다. 이민자들 탓에 공동의 가치도 흔들린다. 대중 소비사회에서 원자화된 개인들의 머릿속엔 사적 이익과 무분별한 욕망뿐이다. 토크빌이 <미국의 민주주의>에서 묘사했듯이, 사회에 만연한 이기주의는 민주주의에 그 기원이 있다. 이것이 1980년대 프랑스에서 공화주의 지식인들이 가졌던 공통 통념이다. 그들은 레오 스트라우스와 한나 아렌트를 참조함으로써 정치적인 것을 한정하고, 공론 영역을 회복하고자 했다. 자크 랑시에르는 정치의 종언 속에서 정치를 되찾으려는 이러한 담론들과 대결하면서 그의 정치적 사유를 발전시켰다. 특히 아렌트와 랑시에르는 아리스토텔레스와 칸트라는 두 축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가깝고도 멀기에 주목할 만하다.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 초판(1990)에서 인용된 아렌트와 “정치에 대한 열 가지 테제”(1996)에 나오는 아렌트를 대하는 랑시에르의 태도는 사뭇 다르다. 이러한 변화는 1995년 대규모 파업 당시, 좌파 공화주의 지식인들이 파업 노동자들의 이기주의를 비판하며 공공선을 주장한 정황과 무관하지 않다. 아렌트는 정치적인 것과 공론 영역의 자율성을 주장한 자들의 이론적 토대 자격으로 소환된다.

<인간의 조건>에서 아렌트는 사람들이 모여 각자의 ‘누구임’과 ‘복수성’을 ‘말’과 ‘행위’를 통해 드러내는 곳이라면 어디에든 ‘현상’의 공간, 즉 정치적 공간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은 인간은 “말을 할 수 있는 정치적 동물”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식에 바탕을 둔 것이다. 뤼케이온의 철학자가 그냥 삶과 잘 사는 삶, 소리와 말을 구별하고 전자를 정치 영역에서 몰아내야 했듯이, 아렌트는 활동을 노동, 작업, 행위로 구별했다. 아리스토텔레스와 아렌트가 정치적 행위의 기본 요소로 설정하는 말과 행위는 결국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에 대한 구분을 전제한다. 랑시에르는 공적이거나 정치적인 것 자체에 고유한 어떤 것이 있다는 관념을 문제 삼는다. 그런 관념은 결국 정치를 하기로 운명지어진 자들과 그렇지 않은 자들의 구별을 끌어들이기 때문이다. 랑시에르가 보기엔 아렌트가 공통의 능력으로 상정하는 말과 행위가 이미 나눔의 대상이며, 이 나눔과 셈을 다시 짜기 위한 싸움이 정치다.

인권에 대한 아렌트의 비판을 검토하는 랑시에르의 글은 두 사상가의 쟁점을 분명히 할 수 있는 좋은 예가 된다. “인간과 시민의 권리에 관한 선언”에서 인간과 시민의 관계는 무엇인가? 시민권과 구별되는 인권이란 있는가?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아렌트는 자신이 몸소 겪어야 했던 난민의 지위를 떠올린다. 그리고 국가의 보호를 받지 않는 인간 자체는 인권은 고사하고 인간성 자체를 박탈당한다고 주장한다. 인간 자체라는 계몽 시대의 추상적 관념에 근거한 인권은 한낱 허구다. 오히려 정치에 참여하려면 쾌와 불쾌를 표시하는 소리가 아니라 소통할 수 있는 말을 하고, 생물학적 필요에서 벗어난 행위를 할 수 있는 인간으로 이미 인정받은 존재, 즉 정치에 대한 몫을 부여받은 시민들이어야 한다. 시민에게만 인권은 유의미하므로 인권과 시민권은 동어반복에 불과하다. 따라서 아렌트는 권리를 갖지 않은 자의 권리인 인권이 아니라 정치 자체에 대한 권리, 권리를 가질 권리의 중요성에 주목하게 된다. 하지만 정치에 대한 권리인 시민권을 갖기 위해 벌이는 투쟁은 정치인가 아닌가? 아렌트에게 그것은 고유한 정치 행위가 아니지 않은가? 랑시에르는 이렇게 묻는다. 말과 행위를 박탈당한 인간들은 어떻게 그들의 말을 들리게 만들고, 그의 행위를 보이게 만들 수 있는가?

현실에서 인간과 시민은 언제나 분리되어 있다. 능동적 시민과 수동적 시민의 구별이 있었고, 참정권을 가진 남성과 그렇지 못한 여성이 있었다. 랑시에르에 따르면, 그저 인간일 뿐 자들, 형식적으로만 시민으로 명명될 뿐인 자들이 법과 사실의 괴리를 문제 삼고, 인간과 시민의 바로 그 틈을 주체화하는 한 “선언”은 다시 쓰인다. 따라서 인간과 시민의 구별을 제거하거나 법과 사실이 구분되지 않는 예외상태를 주장하는 것은 정치적 주체화를 위한 터를 제거하는 일이 된다. 오히려 이렇게 물어야 한다. 아렌트의 말마따나 “선언”의 인간은 추상이며, 그것은 사실 텅 비어 있는 것이라면 어찌할 텐가? 바로 그 공백 때문에 인간의 자리에 여성, 노동자, 이주민, 심지어 ‘아무나’를 채워 넣을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여성은 교수대에 오를 수 있는 권리가 있다. 그렇다면 여성은 연단에 오를 수 있는 권리 또한 가져야만 한다”는 올랭프 드 구즈의 추론은 바로 그 틈과 공백 때문에 유효한 것이 아닌가? 벌거벗은 생명이 정치적 권리 주체의 죽음과 똑같이 취급되었다면, 거꾸로 벌거벗은 생명조차도 정치적 삶이니 말이다. 요컨대 권력을 실행할 자격을 갖지 못한 자의 생명이 철저히 사적인 것으로 간주되던 세계와 그것이 정치적 삶으로 간주되는 세계를 함께 놓음으로써 불일치와 비틀림을 만들어내는 능력이 핵심이다. 이렇게 행사되는 한에서만 인간의 권리는 단순히 권리를 박탈당한 자들의 권리가 아니라, 정치적 주체화 과정 속에 있는 인민의 권리가 된다.

인간과 시민의 틈을 주체화하는 것, 가정적이고 사적인 어둠에 머무르지 않고 공적이고 빛나는 삶의 무대에 나서기 위해서는 자신의 자리를 옮겨야 한다. 여기에서 랑시에르는 아렌트와 마찬가지로 칸트의 <판단력 비판>에서 전개된 취미판단 또는 감성적 판단을 전유한다. 아렌트는 <칸트 정치철학 강의>에서 취미판단의 무사심성을 정치화했다. 그런 판단은 확장된 심성과 사고를 바탕으로 불편부당하게 판단하고 소통할 수 있게 해준다. 그것은 정치인들에 대해 거리를 확보하고 전체를 관찰함으로써 세계적 관점을 획득하기 위한 것이다. 그렇지만 아렌트는 공론장을 정신(의 활동) 안으로 옮겨오려다가 행위자와 관찰자를 구별할 뿐 아니라, 후자를 정치적 행위 자체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는 초정치적인 존재로 만든다. 반대로 ‘남의 자리에 있기’를 가능케 하는 취미판단에서 랑시에르가 끌어내는 것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들리는 것과 들리지 않는 것, 사유될 수 있는 것과 사유될 수 없는 것 등의 나눔에서 몫을 갖지 않는 자들이 자신의 자리를 벗어나는 탈정체화이다. 그것은 불편부당함과 합의를 위한 소통으로 이르는 것이 아니라, 상징적 몫들의 나눔 체계에 대한 위반, 불일치로 이른다.

아렌트와 랑시에르 모두 연극 무대의 비유를 쓴다는 사실에 주목하자. 아렌트가 현상(appearance)의 공간이라는 표현을 썼듯이, 랑시에르도 인민의 외양/출연(apparence)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아렌트는 칸트에 대한 강의에서 “행위자에게 결정적인 문제는 그가 남에게 어떻게 보이는가(dokei hois allois)이다”라고 했다. 이는 행위자(배우)인 정치가가 관찰자(관객)인 시민들의 독사(doxa), 즉 의견과 명성을 좇는다는 말이었다. 반대로 랑시에르는 남에게 어떻게 보이는가, 보다 정확히 말하면 ‘남에게 보일 수 있는가 없는가?’ 자체가 정치의 근본 문제라고 보았다. 이것은 철학의 진리로부터 정치의 의견을 떼어내려던 아렌트의 기획을 더 밀어붙인 것이 아닌가?

공적인 공간에서 보이지 않는 것으로 간주되던 자들이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그에게 주어진 정체성(배역)과 거리를 두면서, 그것을 배가(doubler)시켜야 한다. doubler라는 단어는 연극에서 ‘대역’을 뜻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은 자신이 무대에서 빠지고 다른 배우를 채워 넣는 것도 아니고, 정해진 배역 내에서 배우들끼리 자리를 바꾸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무대 밖의 스태프나 대사 없는 배우가 자신의 역이 아닌 다른 역, 심지어 존재하지도 않는 역을 대체보충하여 다른 등장인물들과 말을 섞는 상황을 말한다. 이점에서 doubler는 대역이라기보다 이역—다른 역(異役)으로 옮기기(移役)라는 이중의 의미에서—에 가깝다.

정해진 배역보다 더 많은 등장인물이 나오는 연극을 스스로 연출하고, 무대에 오르기(出演) 위해서는 말을 빼앗긴 자들이 “마치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말을 하는 자처럼” 행동해야 한다. 이를 두고 성마른 자들은 인민의 출연이 겉모습과 가면들로 넘쳐나는 환영극이라고 비판할 수 있다. 그러나 랑시에르가 주장하듯 사회적 불평등이 언제나 평등 위에 세워진다면, 상징적인 몫을 갖지 않은 자들이 마치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말하고 행동하는 것은 이미 인민이 가진 평등한 능력을 현시하는 동시에, 평등 전제를 입증하는 행위인 것이다. (양창렬 | 파리 1대학 철학과 박사과정)

- 이 글은 2009년 7월 서강대학원보에 실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