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긴 겨울이 지나고 봄이 기지개를 켭니다. 그러나 이 땅 구석구석에 봄은 오지 않고 칼바람만 몰아치네요. 강정에서 밀양에서 평택에서 서울 광화문에서 또 그 어디에서 봄을 일구는 사람들의 몸과 마음의 강건함을 간절히 기원하는 때입니다.

‘창’에서는 몇 개의 내부 세미나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3월 말부터 기획강좌 <장소와 인권>을 시작합니다. 강좌의 전체 일정은 아래와 같습니다. 이 강좌는 아름다운 재단 개미 스폰서 배분사업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강좌 참가 신청은 1부 강의를 시작할 때 접수했고, 매 3강마다 결원이 생기면 추가 신청을 받고 있습니다. 추가신청에 대한 안내는 매 3강마다 1주 휴식이 있을 때 게시판에 공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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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와 인권> 전체 강좌 일정

1

1(329): 잃어버린 장소를 찾아서: ‘지구화라는 은유와 공간 그리고 젠더화와 장소; 김영옥

2(44): 장소상실과 시간의 독재: 엄기호

3(412): (scape)을 질문하다: /(landscape) 문화 이데올로기와 장소: 김영옥

 

2

4(426): 문래동, 점유와 문화운동: 김강

5(53): 학교 권력과 건축 1): 조후

6(510): 학교 권력과 건축 2): 조후

 

3

7(524): 이주/이주노동자/장소: 조지은(믹스라이스)

8(531): 이태원과 비시민의 상품화: 김주희

9(67): 역사 속 변태의 장소: 박차

 

4

10(621): 홈리스와 장소: 김준호

11(628): 동두천, 위험한 장소? 위험한 여성?: 김동심

12(75): 노동자와 장소-사라진 정치의 장소들: 김원

 

기획의도

장소가 뜨거운 화두가 되고 있다. 한예종에서 두리반까지, 용산에서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노조의 투쟁에 이르기까지, ‘장소place’를 향한 투쟁이 불타오르고 있다. 한때 사회과학에서는 장소에 대한 모든 논의를 공간space이 대체하였다. 장소가 보다 물리적인 개념이라면 공간은 보다 더 사회학적이고 철학적인 개념이었다. 사이버-스페이스라는 말처럼 사람들 사이의 관계, 그리고 그 관계를 맺고 끊고 하는 것을 공간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누군가는 장소는 평면적인데 반해, 공간은 입체적이라고 이야기하고, 좀 더 유식하게 이야기하는 사람은 장소가 기하학적이라면 공간은 위상학적이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왜 다시 공간이 아니라 장소가 문제가 되고 있는가? 그것은 정보기술의 혁명과 더불어 우리에게 가상적인 공간은 무한정으로, 거의 공짜로 주어지는데 반하여 물리적인 장소에서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쫓겨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과연 인간이 장소 없이 살아갈 수 있는가? 아마 그럴지도 모른다. 공각기동대가 어쩌면 장소 없이 살아가는 공간에 대한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히끼꼬모리라고 하더라도 자기가 틀어박힐 조그만한 방 한 칸 혹은 고시원의 좁아터진 방 하나는 필요로 한다. 아직 인간은 장소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다.

예를 들어보자. 두리반은 장소인가, 공간인가? 물론 두리반은 두가지 특징을 다 가지고 있다. 아니 두리반은 아주 훌륭한 공간이 되어버린 곳이다. 한국의 그 어떤 다른 투쟁하는 공간과 비교해보더라도 상당히 많은 청소년과 청년들이 결합한 곳이었다. 거기서 공연을 하고, 거기서 교류를 하면서 두리반은 마포구 홍대 앞에 있는 조그마한 음식집이 아니라 이미 수많은 흐름이 교차하고 있는 공간이 되었다. 훌륭한 일이다. 그러나 이 공간을 지키는 것으로 확보하자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두리반의 원래 장소인 ‘보쌈/칼국수’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었는가? 두리반이 한껏 부풀어 공간이 된 이유도 장소로 돌아가기 위함이었고, 다시 평범한 칼국수집으로 돌아가는데 성공하지 않았는가?

많은 청소년/청년들이 두리반이나 홍대 청소노동자들의 투쟁, 그리고 현대차 비정규직 투쟁에 동참하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자신의 ‘운명’을 그곳에서 봤기 때문이다. 장소 없는 존재가 되어 공간을 떠돌고 있는 자신들의 모습, 바로 피난민의 삶이다.

난민에는 두 부류가 있다. 첫 번째는 정치적 난민이다. 버마와 태국의 국경지대 난민촌에 갇혀 사는 사람들이다. 이들에게는 장소만 있지 공간이 없다. 가장 근대적인 방식의 난민이다. 이들은 근대 사회에서 예외적인 존재들이었다. 왜냐하면 근대 사회는 모든 사람이 자기가 살아가는 공간/장소가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만들어져 있기 때문이다. 집이 있고, 일터가 있고, 그것을 지켜주는 국가가 있다는 것이 전제되어 있다. 난민은 이런 사회적 공간과 삶의 터전이라는 장소를 박탈당한 사람들이다. 대신 이들에게는 오로지 장소만이 주어졌다. 이 장소는 다른 모든 세계와 유리된 곳이다. 단절된 장소, 이것은 공간이 아니다.

다른 한 부류의 난민들은 경제적 난민들이다. 이주노동자들이다. 이들에겐 장소가 없다. 홍콩의 예를 들어보자. 홍콩에서 일하는 가사노동 이주노동자들은 백만년을 일해도 영주권이 주어지지 않는다. 이들은 해고가 되면 2주일 안에 새로운 직장을 찾아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바로 강제출국을 당한다. 눌러 살 곳이 없는 사람들, 그리고 그 장소에서 다른 곳으로 가지 못하는 사람들. 오로지 노동하고(일하는 곳) 말하고 교류하는 공간(빅토리아 공원처럼 일요일이면 이주노동자들끼리 만나는 곳)만 있지 장소는 박탈당한, 장소에 갇힌 사람들이다.

그렇기에 지금 많은 사람들의 투쟁은 바로 장소를 향한 투쟁, 삶의 터전을 가지기 위한 투쟁이다. 이것은 지금까지의 학생운동이나 노동운동과는 그 방향을 아주 달리하는 투쟁이다. 지금까지의 학생운동/노동운동은 장소를 전제하고 사회적 공간 열기 위한 투쟁이었다. 대신 지금 지구 곳곳에서 불타오르는 투쟁은 반대로 공간을 장소로 ‘육화’시키기 위한 투쟁이다. 위에서 이야기한 두리반의 사례도 그렇고 대학에서 쫓겨난 노영수나 대학강사들의 천막농성도 마찬가지다. 대학이라는 공간이 학생들이 살아가는 장소가 되게 하기 위한 투쟁이다. 삶의 터전을 지키기 위한 투쟁, 잃어버린, 박탈당한 장소 혹은 거주나 삶의 터전에 대해 분명 사람들은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 특히 용산 이후 개발에 대해 반대하는 목소리도 이전보다는 훨씬 더 높아졌으며 홍대 노동자들의 투쟁에 대한 지지나 지원처럼 ‘이건 아니다’는 목소리도 상당히 높아졌다. 일일이 예를 들면 모자랄 정도로 장소에 대해 점점 더 사람들이 예민해지고 그만큼 연대의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모두가 가지고 있는 장소박탈에 대한 불안감, 그 불안감에 우리는 인권을 장소와 관련하여 다시 질문하고자 한다. 권리의 주체 문제에서부터 인권의 목적에 이르기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