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조 모든 사람은 의견과 표현의 자유에 관한 권리를 가진다. 이 권리는 간섭받지 않고 의견을 가질 자유와 모든 매체를 통하여 국경에 관계없이 정보와 사상을 추구하고, 접수하고, 전달하는 자유를 포함한다.


‘화씨 451’이란 미래 공상 소설이 있다. 이 소설 속 시대의 사람들 대다수는 자기들 집의 방마다에 있는 커다란 TV 화면으로 지루하고 시시한 드라마를 보면서 상당 시간을 보낸다. 책을 읽는 극소수의 사람들은 처형당한다. 국가가 고용한 소방관의 임무는 모든 책을 추적해서 불태우는 것이다. 온도를 따질 때 섭씨와 화씨가 있는데, ‘화씨 451’이란 이 책의 제목은 바로 종이가 불타는 온도를 말한다. 책을 읽는 사람은 체포되어 투옥되고 처형된다.
소설의 주인공은 소방관인데 자기가 태워버려야 할 책을 읽으면서 운명이 바뀌게 된다. 결국 당국으로부터 도망칠 수밖에 없고, 시골에 숨어사는 지하 집단 속에서 피난처를 구하게 된다. 이 지하집단은 문학 유산을 유지하는 역할을 맡고 있는데, 즉 세계 고전 문학의 일부 또는 전체를 각자 맡아서 외우는 임무를 나눠 갖고 있다. 간단한 줄거리지만, 역사상 실제 벌어졌던 표현의 자유 억압의 성격을 잘 드러내고 있다. 소설이 쓰인 시기가 미국에서 매카시즘이 판친 1950년대였기에 더욱 그렇다.

책이 불타는 온도 화씨 451도

작가 오스카 와일드는 “자유(freedom)의 상실이 자유(liberty)의 대가”라 했다. 각 시대는 그것만의 지배적인 세계관을 갖고 있고, 그 세계관이 표현의 자유의 한계를 정하곤 했다. 의견과 표현을 승인할 때는 ‘의견’이라 불렀지만, 지배적인 세계관이 그것을 싫어할 때는 ‘이교, 이단, 반역’ 등으로 불렀다. 그래서 표현의 자유의 역사는 진정한 자유를 얻기 위해 목이 잘릴 수 있는 위험을 무릅쓴 자유 상실의 역사라 할 수 있다.

표현의 자유를 외치는 사람들은 항상 소수자로 인식되고 소수자 지위가 될 위험을 무릅쓰고 더 큰 목적을 성취하리라 생각되는 것을 위해 기꺼이 희생했다. 그렇기에 표현의 자유는 다른 자유들과 인권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지표가 됐다. 흔히 표현의 자유가 부정될 때는 ‘뭔가 더 큰 폭력과 독재의 위험이 닥치리라’는 전조인 것이다.

인권에서 중시하는 자유가 세상의 모든 자유를 다 긁어모은 것은 전혀 아니다. ‘뭐든지 내 맘대로’식의 자유도 아니다. 인권에서 옹호되는 자유는 모든 사람의 권리 존중과 어울릴 수 있는 자유이다. 그래서 많고 많은 자유들 중에서도 아주 특수한 자유들만이 인권의 목록에 올라있다. 각자의 자유를 일종의 선하고 바람직한 목적을 위해 특정하여 구체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그런 자유가 인권으로서의 자유이다. 의견과 표현의 자유가 바로 그런 자유이다.

세계인권선언은 표현의 자유가 전체주의의 첫 번째 표적이라는 역사적 교훈을 배경으로 시민들이 정부와 국가들을 비판할 수 있어야 한다는 원칙에 근거한 것이다. 부정적인 측면만 생각한 것은 아니다. 표현의 자유는 단지 억압을 반대하는 것에 관한 것이 아니라 좋은 거버넌스의 기초이며 전 사회의 문화적 풍요를 능동적으로 보호하기 위한 권리라고 봤다. 그래서 19조는 ‘정보의 자유’로서의 표현의 자유 또한 강조하고 있다.

정보의 자유로서 표현의 자유

정보와 언론의 자유가 유엔헌장에는 구체적으로 언급되지 않았지만 그 중요성은 유엔창립을 위한 샌프란시스코 회의의 토론에서 분명히 드러났다. 유엔은 1946년 제1차 총회 결의안에서 정보의 자유를 기본적 인권으로 선포하고 유엔이 존중하는 기타 모든 자유의 초석이라 했다. 덧붙여 정보의 자유에 관한 유엔회의를 가질 것을 경제사회이사회에 요청했다.

정보의 자유에 관한 유엔회의는 1948년 3월과 4월 사이에 제네바에서 열렸으나 전후 냉전 속에서 회의의 분위기는 아주 정치적이었다. 한쪽은 정보의 ‘자유로운 유통’에 초점을 두고 다른 한쪽은 ‘균형 잡힌’ 정보의 흐름과 정보의 교환을 주장했다. 이후로도 국제사회는 의견과 표현, 정보의 자유 개념을 다듬는데 큰 어려움을 겪었다. 그 후로도 오랫동안 유엔 총회 의제에 정보의 자유에 관한 국제협약의 초고가 등장했지만 어떤 결론에도 이르지 못했다.

세계인권선언 19조에서 부딪친 문제는 표현의 자유 제한에 관한 것이었다. 소련 측은 “미국 언론과 유럽의 모방적인 언론이 침략정책을 옹호해왔으며 심리전을 수행해왔다. 이들 언론은 국내에서는 민주세력을 분쇄하고 다른 국가들을 위협한다”면서 ‘침략의 선전’을 위한 표현의 자유는 허용될 수 없다고 했다. 소련안은 부결됐다. 통제되는 언론을 만들 것이라는 이유에서였다. 19조에는 어떠한 권리의 제한요소도 붙지 않았다.

선언 이후 만들어진 시민․정치적 권리규약에는 “전쟁을 위한 어떠한 선전”이나 “차별, 적의 또는 폭력의 선동이 될 민족적, 인종적 또는 종교적 증오의 고취”는 “법률에 의하여 금지된다”는 규정이 들어갔다. 여기서 ‘전쟁’이란 단어의 의미를 정의하지는 않았지만, ‘침략전쟁’의 의미로 해석되고 있다.

그밖에도 규약에는 국가안보, 공공질서, 공중보건, 도덕 등의 제한 요소가 들어갔는데 하나같이 정의하기가 어렵고 권리침해에 오․남용될 소지가 큰 개념들이다. 이에 국제법률가 위원회는 이들 제한 규정을 해석하기 위한 회의를 갖고 1984년 ‘시라쿠사 원칙’(Siracusa-principles)을 채택했다. 또한 1995년에는 국제법 전문가들이 ‘국가안보와 표현의 자유 및 정보접근에 관한 요하네스버그 원칙’을 채택했다. 여기서 기본 원칙은 "누구도 자신의 의견이나 신념으로 인해 어떠한 강제, 불이익이나 제재를 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고 "표현의 자유에 대한 권리의 평화적인 행사는 국가안보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되어서는 아니 되며, 어떠한 규제나 형벌도 과해져서는 아니 된다"는 것이다. 흔히들 금기시 여기는 '정부를 바꾸자는 표현, 국가나 국기를 모욕하는 표현, 징병반대, 전쟁반대' 등의 표현도 "국가안보에 대한 위협이 되지 아니하는 표현"이다. 이런 걸 다 제하고도 제약할 의사표현이 있다할 경우라도 정부가 지켜야 할 전제조건과 정부가 져야 할 입증책임이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반대자에 침묵 강요는 안 돼

국제사회의 최근 논의와 관련하여 ‘의견과 표현의 자유 권리보호와 증진에 관한 유엔특별보고관(Ambeyi Ligabo)이 올해 초 발표한 보고서 내용을 살펴보자.

보고관은 ‘명예훼손, 중상, 모욕’ 혐의가 표현의 자유를 제약하는 현상에 대해 크게 우려했다. 명예훼손, 중상과 모욕의 혐의가 공적 인물, 특히 국가 당국으로부터 기인할 때는 어떠한 형태의 사전 검열도 정당화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명예훼손은 개인들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지 ‘국가정체성, 종교, 국가 상징, 기관, 국가의 수장’ 등 주관적 가치나 제도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했다. 명예보호를 명목으로 탐사 저널리즘을 억압하고 비판을 침묵시켜서는 안 된다.

특별보고관은 표현의 자유에 대한 권리를 제한에 대해 조건을 언급했다. 첫째 제한은 법으로만 수립되며, 둘째 그 법은 정당한 것으로 인정된 목적을 추구해야 하며, 셋째 목적의 성취에 비례하는 것이어야 한다. 어떤 유형의 제한이건 사전 검열을 정당화해서는 안 되며, 비판을 제한하거나 반대자를 침묵시키기 위해 이용돼선 안 된다는 것이 핵심이다.

그런데 예방 구금을 하고, 언론인의 소득에 부합되지 않는 과한 벌금을 부과하고, 언론자격의 유예, 미디어 송출의 유예 또는 폐쇄 등의 조치를 취하는 것은 비례의 원칙에 맞지 않는다. 형사법적 명예훼손은 표현의 자유에 대한 정당한 제한이 아니다. 모든 형사법적 명예훼손은 철폐돼야 한다고 촉구했다.

특별보고관이 특히 촉구한 것은 인터넷에서의 의견과 표현의 자유를 보호하는 조치의 확대이다. 특히 웹사이트 투고자와 블로거들에게 다른 유형의 미디어와 같은 수준의 보호가 제공돼야 한다고 했다.
특별보고관의 결론은 간단하다. “지속적인 사상의 대결은 민주사회의 디딤돌이다.”

표현의 자유는 상호교통의 권리이자 의무

(아래 내용은 전규찬 한국예술종합대 영상원 교수의 인권연구소 ‘창’ 강좌 내용 중 일부를 재구성했다. 전교수는 표현의 자유를 ‘교통(communication/intercourses)의 권리’라 표현했다.)

세계인권선언 18-20조는 떼어낼 수 없는 한 덩어리이다. 앞서 살펴본 18조는 생각의 자유(사상․양심의 자유)를, 19조는 표현의 자유를, 20조는 생각과 표현을 타인과 더불어 함으로써 사회를 만들어내는 것(집회와 결사의 자유)을 말한다. ‘생각+표현+행동’의 권리라 할 수 있다.

인간 간의 상호교통 없이 사회가 존속할 수는 없다. 그런 면에서 표현의 자유는 단순히 개인의 자유일 뿐 아니라 타자와 만나고 사회를 만들어낼 수 있는 의무이기도 하다. 따라서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은 개인을 억압하는 것일 뿐 아니라 사회의 붕괴와 해체를 획책하는 야만이다.

말하거나 쓰는 표현은 막을 수 있어도 생각하는 자유는 빼앗을 수 없다고들 흔히 말하지만 그렇지가 않다. ‘표현’을 통해 다른 사람과 상호교통하지 않는 생각이 잘될 리도 없고 정확할 리도 없다. 표현을 통해 자유롭고 공개적인 검토가 가능해야 진짜 자유로운 생각이라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자유롭고 공적인 표현의 자유를 박탈하는 권력은 생각할 자유 또한 박탈하는 것이다.

‘생각․표현․행동’의 자유를 합친 것이 언론의 자유다. 언론은 생각을 말로써 논한다는 것이며, 세계인권선언에서 이들 권리를 모든 사람의 권리로 얘기한 건 곧 인간 자체가 언론인이란 뜻이다. 그래서 언론하면 무슨 신문과 방송부터 떠올리는 것은 우리가 언론으로부터 소외됐다는 증거다.

소위 ‘찌라시’라고 불리는 신문들은 언론이 아니다. ‘매체’라고는 할 수 있다. 매체인 건 맞는데 논하는 것, 즉 토론을 방해하기 때문에 선전매체이지 언론이 아니다. 오직 우리가 대화를 할 때에야 선전은 멈춘다.

표현의 자유는 상호대화이고 교통이다. 권력자가 ‘소통의 부재’를 불평하는 것은 그가 말의 의미를 몰라서이다. 교통은 상호적으로 더불어 하는 것인데, 소통은 ‘네가 오해했다. 오해를 풀어라’고 설득하는 것이다. 자유로운 의사교통을 하는 사람들이 의견교환을 통해 공개적으로 잘못을 검증했고 비판을 했다. 공동행동에도 나섰고 대안도 제시했다. 언론의 자유를 제대로 구현한 것이다. 그런데 그걸 받아들이지 않고 ‘소통의 부재’를 탓하고, 의사교통을 방해하기 위해 언론 때려잡기에 나섰다.

언론의 자유는 진실을 향한 용기, 두려움 없는 발언이다. 발생할 수 있는 온갖 위험을 감수하고라도 권력이 싫어하는 진실에 기초해 권력을 솔직하게 비판할 의무를 수행한다. ‘PD수첩’이 이런 역할을 하지 않았다면 권력과 충돌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 모두가 진실이라 우겨 말할 때 아니라고 말할 사람 누가 있겠소”에 화답하는 것은 생각․표현․행동의 자유를 가진 인간의 권리이자 의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