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조
1. 모든 사람은 평화적 집회와 결사의 자유에 관한 권리를 가진다.
2. 어느 누구도 어떤 결사에 소속될 것을 강요받지 아니한다.

제21조. 정부에 참여할 권리
1. 모든 사람은 직접 또는 자유롭게 선출된 대표를 통하여 자국의 통치에 참여할 권리를 가진다.
2. 모든 사람은 자국의 공무에 취임할 동등한 권리를 가진다.
3. 국민의 의사는 정부의 권위의 기초가 된다. 이 의사는 보통 및 평등 선거권에 의거하며, 또한 비밀투표 또는 이와 동등한 자유로운 투표 절차에 따라 실시되는 정기적이고 진정한 선거를 통하여 표현된다.


“못살겠다, 갈아보자”, “부정선거 다시 하라, 이대통령은 하야하라”(4.19)
“계엄 해제하라”, “휴교령 철폐하라”, “금남로로 가자”, “계엄군이 쳐들어옵니다, 시민여러분 우리를 도와주십시오.”(5.18)
“호헌철폐, 독재타도, 민주쟁취”(6.10)
“노동 3권 보장하라”, “저임금 박살내자”, “최저임금 보장하라”, “근로기준법 파업권 쟁취하자”(1987년 7, 8월 노동자 대투쟁)
“미친 소, 미친 교육 싫다”, “2MB 퇴진”, “조중동 폐간”(2008 촛불시위)

한국의 민주주의를 이어온 중요한 줄기에는 언제나 집회와 결사가 있다. 이건 한국 뿐 아니라 세계 어느 곳에서나 마찬가지다. 자유와 생존의 박탈에 대해 항의할 수 있는 가장 원초적인 방법이 뭉쳐서 의사를 표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집회와 결사의 자유는 사상․양심․표현의 자유를 집단적으로 표출하는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 는 언론매체의 독점 집중 현상 때문에 일반 대중의 의사표현, 그중에서도 노동자․농민․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의 의사표현은 소외되기 쉽다.
집회․결사는 단체와 네트워크를 만들거나 집회․시위 같은 집단행동을 통해 인민 스스로가 표현의 장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또한 이렇게 표출되는 의견과 행동은 대개가 지배 체제에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민주주의의 보장을 위해서도 필수적인 것이다. ‘예’가 아니라 ‘아니오’가 있어야, 다수자의 지배에 맞선 사회적 소수자의 의견과 요구가 있어야 민주주의의 다양성과 건강성이 유지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집회․결사는 대의제를 취하고 있는 사회에서 참정권의 한계를 적극적으로 보충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다. 몇 년에 한 번 있는 선거만으로 국가권력의 정당성이 일거에 판명되는 것이 아니라 매일 매일의 지속적인 감시와 평가가 필요하다. 민주사회에서 특히 집회와 시위의 자유는 국가권력을 비판하는 기능을 수행하는 직접적이고 적극적인 방법이다.

집회․시위의 자유는 정치적 권리의 핵심

세계인권선언 제18조, 제19조(사상․양심․표현의 자유)와 제21조(참정권)와 더불어 집회․결사의 자유는 정치적 권리의 핵심이다. 이들 권리는 로빈슨 크루소에게는 의미가 없다. 홀로 고립된 개인이 행사할 수 없는 권리이다. 이들 권리는 개인들의 참여와 민주적 과정을 통해 합리적이고 집단적인 의사형성을 가능케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집단적인 권리행사가 필요한 것은 개인의 인권을 위해서이다. 상호의존성이 깊은 현대 사회에서 고립되고 홀로인 개인이 존재한다는 것이 가능하지도 않거니와 개인은 위험스러울 만큼 취약하다. 개인들은 자신의 개인적 권리를 지키기 위해 결사해야만 한다. 민주주의는 정치정당과 시민사회단체를, 노동자는 노동조합을, 종교는 교회와 사찰 등을 필요로 한다. 이런 저런 형태의 결사가 우리의 경제적, 과학적, 예술적, 종교적, 교육적 삶에 스며들어 있다.
그래서 결사의 자유라고 해서 개인의 인권이 아니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결사의 자유를 명목으로 어떤 결사체 또는 집단이 개인들에게 압력을 행사하거나 개인의 자유를 막아서는 안 된다. 노동조합운동을 생각해봐도 그렇다. 결사의 자유 없는 노동조합운동이란 있을 수 없다. 단체협약권, 파업권, 노동조합의 존재 자체가 모두 결사의 자유에 달려있다. 그런데 이런 단결에는 단결하는 개개 노동자의 사상의 자유가 내포되어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집회와 결사는 ‘개인 대 국가’만의 관계가 아니라 ‘개인-사회-국가’의 관계를 가능케 한다. 고전적인 인권관에서는 개인과 대립되는 국가권력의 관계만을 설정하고 국가권력으로부터의 자유만을 인권으로 쳤다. 이럴 때 문제는 인권이 과도하게 국가만을 강조하게 된다는 점이다. 즉 국가가 기본권으로 설정한 문제만을 인권에 국한시키려 들고, 정치적 억압으로부터의 자유만을 강조할 뿐 자유의 토대가 되는 경제사회적 문제들을 소홀히 하게 된다. 인권은 국가권력만이 아니라 이런 저런 사적권력, 즉 기업이나 사학․복지․종교재단 등에 의해서도 침해된다. 집회와 결사의 자유는 개인 대 국가만의 관계에 갇힌 인권의 한계를 극복하는데 의의가 있다.

금지 또 금지

그러나 막상 집회․결사의 자유를 써먹으려면 가슴이 두근두근 떨린다. 전경차로 에워싼 차벽, 검문검색의 장벽, 미란다원칙이고 뭐고 없이 독수리가 사냥하듯이 사람을 낚아채가는 연행방식, 이어지는 벌금과 구속 등 웬만한 강심장이 아니고서는 나설 엄두가 생기지 않는다. 그런데도 집회․결사의 자유를 행사하는 사람들이 이어지는 것 자체가 정의를 향한 인간의 의지와 용기의 숭고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집회․결사의 자유가 갖는 초라한 처지를 보여주는 사례는 넘쳐난다. 한때 이런 얘기가 떠돈 적이 있다. 한국을 방문했던 외국인이 ‘청년 실업의 심각성을 알았다’고 하자 한국인이 ‘어떻게 알았냐’고 물었다. 길거리에 할 일없이 서있는 청년들이 너무 많더라는 거였다. 그 외국인이 목격한 청년들은 집회장 주변에 배치된 사복경찰들이었다. 또 이런 이야기도 있다. ‘한국이 민주화된 줄 알았는데 아직도 비상사태냐?’고 묻더란다. 이번엔 도심에 즐비하게 방패와 헬멧으로 무장한 전경들을 보고 한 소리다.
집회와 결사가 허락받는 것이어서는 인권으로서의 의미가 없다. 국제인권기준이나 헌법도 ‘허가제’가 아님을 못 박고 있다. 그런데도 경찰이 마음먹기에 따라 허가해 줄 수도 안 해 줄 수도 있다는 식으로 운영한다. 집회를 하는 사람들을 차벽을 둘러 방해할뿐더러 의사표현이 전달되는 것을 적극적으로 막고 고립시킨다. 툭하면 소위 ‘확성녀’라 불리는 경찰 스피커를 통해 불법 운운하며 해산을 강요하고 연행하겠다고 협박한다. 법에 따르면 도무지 집회를 할 수 있는 장소가 없다. 이곳은 관공서 앞이라 안 되고 저곳은 대사관 앞이라 안 되고 이쪽은 주요도로라서 안되고 저쪽은 공원이라서 안 되고 식이다.
촛불집회에서 경험했듯이 일몰시간 이후에는 안 된다고 한다. 이에 낮 말은 새가 듣고 밤 말은 쥐가 들으니 밤에 집회할 수밖에 없고, 학교와 직장을 관두지 않는 이상 밤에 모일 수밖에 없다고 시민들은 맞받아쳤다.
경찰의 방패와 곤봉 사용으로 집회와 시위 중에 사망하신 분들이 꽤 된다. 사실상 ‘맞아 죽었다’는 말이 정확하다. 방패를 갈아서 시위자의 이마와 머리를 내리 찍는 관행이 지적된 지 오래다. 좁은 곳에서 오갈 데 없는 사람들을 경찰이 방패로 밀칠 때 압사의 공포를 느껴본 사람들도 많다.

민주주의와 인권의 호흡과 같은 집회․시위의 자유

집회와 결사의 자유라는 인권을 행사하는데 경찰이 왜 꼭 나와야 할까? 그런 의문을 가질 필요가 있다. 시위대보다 더 많은 경찰력이 민생치안을 위한 것도 아닌데 꼭 시위현장에 있어야 하는 것일까? 경찰차량의 대량주차로 인해 오히려 교통을 방해하고, 위협적인 경찰력이 현장에 있다는 것 자체가 이런저런 충돌의 원인이 되고 있다. 오히려 폭력적인 충돌을 기대하거나 조장하고 있다고 의심될 정도다. 교통흐름을 도울 정도의 몇 명만 있으면 될 것이다.
미국 워싱턴에 갔을 때의 경험이다. 태국인 친구와 노동단체 방문을 마치고 시내를 걸어보기로 했다. 걷다가 어느 집 문패 앞에서 우린 깜짝 놀랐다. 분명 백악관, white house라 써 있었다. 경찰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이런 저런 피켓을 들거나 목에 건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하고 있을 뿐이었다. 백악관 앞에서 시위를 벌이는 사람들이었다. 청와대 앞 분수대에서 피켓을 들었다가 바로 연행돼 파출소로 갔던 경험이 있던 나로서는 백악관 앞 시위대가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집회․결사의 자유의 초라함의 극치는 1인 시위라고 생각한다. 어느 날부터 한국 사회에는 ‘나 홀로’ 피켓을 들고 거리에 나서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뜻을 함께 하는 이들과 한데 어깨를 걸고 한 목소리로 외치는 것이 정석이란 걸 몰라서가 아니다. 집회와 시위가 차고 들 수 없는 금단의 땅에 발 한번 붙이기 위해, 걸려들지 않고는 배겨날 수 없는 거미줄 법망을 피해 마련한 궁여지책인 것이다. 혹자는 평화시위의 모범이자 새로운 집회문화라고 치켜 올리기도 했지만 1인 시위는 분명 한데 모일 수 없고 한 목소리로 외칠 수 없는 우리 시대의 서글픈 자화상에 불과하다. 집회․시위의 자유와 권리가 온전히 숨 쉴 수 있다면 결코 필요치 않은 인공호흡기에 불과한 것이다.
집회결사를 불편하고 시끄러운 것, 교통을 방해하고 장사를 위협한다고 여기는 사람들도 많다. 물론 불편이 따르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약간의 불편 때문에 ‘호흡’을 멈출 수는 없다. 집회․결사의 자유는 민주주의와 인권의 호흡이다. 어떤 경우에도 숨쉬기를 멈출 수는 없지 않은가.
사소한 메모쪽지 하나도 대서특필되는 정치인과 재벌들이 이 권리를 애지중지하는 것을 본 일이 있는가? 의사표현의 효과적인 수단을 독점하고 있는 그들에게는 집회․결사의 자유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일 뿐이다. 집회․결사에 의한 의사표현은 빼앗기고 무시당하고 외면 받은 사람들의 유일한 타종 수단이고, 우리 사회의 병폐와 처방을 얘기할 수 있는 공공의 광장이다. 집회․결사를 가로막는 것은 그런 타종 수단을 박탈하고 공공의 광장을 폐쇄하는 행위다.

인민의 의사는 정부 권위의 기초

세계인권선언 제21조의 핵심은 “인민의 의사는 정부의 권위의 기초”라는 것이다. 이것은 개인 권리를 열거하는 게 아니라 헌법적 규정의 성격을 가지며 인권이 촉발된 원칙이라 할 수 있다.
‘위장된 정부의 신탁위반행위에 대한 판단자는 인민이다’, ‘사회계약에 의해 성립된 국가의 권력은 인민의 권력으로서 모든 시민의 참가에 의하여, 모든 시민의 이익을 위하여 행사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 근대 시민 혁명가들의 지론이었다. ‘모든 권력은 인민의 것이며 인민으로부터 나온다. 집행관은 인민의 수탁자이며 봉사자이고 인민에게 책임을 진다’(버지니아 권리장전), ‘모든 주권의 연원은 본래 국민에게 있다. 어떤 단체나 어떤 개인도 명시적으로 국민에게서 유래하지 않는 권력을 행사할 수 없다’(프랑스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는 원칙은 헌법보다 앞선 것이었다.
촛불집회를 통해 우리 모두가 달달 외우게 됐고, 가슴에 사무치게 된 헌법 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이다.
그런데 이 원칙은 귀에 듣기 좋고 입에 담아 멋있으라고 있는 게 아니다. 몇 년에 한번 있는 선거 때만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적으로 주인이 누구인지를 확인시켜줘야 지켜질 수 있는 원칙이다. 까딱하면 인민의 의사를 수임 받았으니까 모든 권력행사가 정당하다는 구실이 될 수도 있다. ‘내가 쿠데타를 했느냐, 정당한 선거로 뽑혔다, 그러니 나는 정당하게 권력을 집행하는 것’이라며 통치자가 오만해지고 주권자들이 직접 나서서 이것저것 챙기려는 것을 못마땅해 하고 봉쇄하는 장치로 이용될 수도 있다.
이런 한계를 담은 것이 근대부르주아헌법의 참정권의 특징이었다. ‘주권은 국민에 속한다.’고 했을 때 적어도 주권이 군주의 것이 아니라는 점은 확인됐다. 그런데 이 주권을 가졌다는 것이 말로만 그럴싸했다. 주권의 보유자는 국민이지만 주권의 행사자는 아니었던 것이다.
주권을 가졌다는 국민은 구체적인 한 사람 한 사람으로 생각된 것이 아니라 추상적인 덩어리로서의 국민이었다. 이 추상적인 덩어리로서의 국민은 주권을 나눠가질 수도 없고 주권행사에 참가할 권리도 없다. 구체적인 누군가에게 권력을 위임해야만 비로소 주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따라서 선거는 필수불가결한 제도였다. 선거를 시민의 권리행사로 본 것도 아니었다. 국민주권의 일부인 의원임명권의 행사, 즉 공무집행에 불과한 것이라 봤다.
그리고 그 선거는 제한선거제였다. 모든 사람이 선거를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능동시민으로 분류된 이들만이 할 수 있었다. 여자는 포함 안 됐고 남자 중에서도 재력이 있는 자만 가능했다. 곧 일정 수준 이상의 납세 능력이 있는 사람이 그중에서도 상당한 재력가를 뽑는 것이 선거였다.
그리고 일단 선출된 대표에 대해서는 유권자가 간섭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그 이유는 의원이란 자신을 선출한 선거구의 대표가 아니라 ‘전 국민의 대표’니까 선거인과 선거구의 명령에 구속받아서는 안 된다는 거였다. 따라서 유권자는 자기가 선출한 대표에게 특정한 무슨 일을 하라고 명령해서도 안 되고, 일을 못한다고 소환해서도 안 된다. 책임지는 것은 다음 선거에서 평가를 받는 형태의 정치적 책임일 뿐이었다. 따라서 ‘국민에게 주권이 있다’는 말은 선출된 대표가 정당성을 갖는 근거가 국민에게 있다는 의미에 지나지 않는다.
이와 반대로 근대의 민중 참정권론은 주권행사를 권리로 여기고, 공무취임에 대한 기회의 불평등과 압제에 대한 봉기권을 주장했다. 앞에서 말한 국민주권론과 대비하여 인민주권론이라 한다.

삭제된 억압과 전제에 저항할 권리

여기서 유권자인 인민은 추상적인 덩어리로서의 국민과는 다르다. 인민은 주권을 소유할 뿐 아니라 직접 행사한다. 유권자의 의사는 유권자 개개인에 의해 n분의 1만큼 존재한다. 대의제도를 취할 수도 있지만 최선이 아니라 차선으로 선택할 뿐이다. 소환권 등 유권자의 참정권은 기회가 되는대로 확대돼야 한다고 본다. 선거는 보통선거제도이며 유권자의 권리행사이다. 면책 특권의 부작용을 방지하고 유권자가 정치에 긴밀하게 참여하기 위해 선출된 대표는 유권자의 의사 테두리에 묶여 있어야 한다. 따라서 대표는 자기를 선출한 지역구 유권자의 의사 안에서만 대표권을 가지며, 지역 구민의 의사에 따라야 하고, 유권자에게 보고할 의무가 있다. 만약에 유권자가 위임한 대로 하지 않으면 위임은 무효가 되며 위임자의 의사에 따라 파면된다. 이것을 소환(리콜 recall)이라 한다. 또한 모든 공무원에 대하여 유권자는 일상적인 통제권과 파면권을 갖는다. 이런 성격상 인민주권론은 지방자치와 주민자치를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인민의 참정권 보장을 위해서 중요한 권리가 정치적 의사표현과 집회의 자유보장이다. 그리고 그 절정은 압제에 대한 봉기권의 주창이다.

바를레의 엄숙선언

압제에의 저항은 귀중한 봉기의 권리이다. 봉기의 권리는 오로지 필요라는 법 이외에는 인정해서는 안 된다. 국왕, 전제군주, 독재자, 야심가, 지배적인 음모가, 폭군 등 어떠한 형태로 나타나든 그에 의하여 국민의 주권이 찬탈되어 침해당할 경우 압제는 존재한다. 군대나 무력이 국가 안에서 우월할 경우 압제는 존재한다. 사회계약이 정한 한계를 창설된 여러 기관이 일탈할 경우 압제는 존재한다. 국민의 공금이 소비되고 국비의 소비가 사회의 빈곤을 극대화할 경우 압제는 존재한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는 일제봉기야말로 독립을 보장하는 것, 권리 중 가장 정당한 것, 의무 중 가장 신성한 것이 된다.


세계인권선언에서도 처음 21조를 만들 때는 ‘억압과 전제에 저항할 권리’가 문구에 있었으나 결국 전문에서 간접적으로 언급하는 것으로 약화돼 적당히 처리됐다. 선거의 방식이나 정당운영 등 세세한 방식은 각국의 선택사항으로 남겨놓고 있다. 제21조에 규정된 참정권이 식민지에 적용될 것 때문에 몸을 사린 식민열강 때문에 논란이 벌어지기도 했다. 나중에 선언을 계승한 양대 국제인권규약의 제1조에 ‘자기결정권’이 들어간 것은 선언 제21조의 후손이라 할 수 있다. 자기결정권이란 모든 인민이 자신의 정치적 지위를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고 경제, 사회, 문화적 발전을 자유롭게 추구할 수 있는 권리이다.

참정권의 확장

선언 제21조의 참정권은 오늘날의 위기 속에서 확장될 필요가 있다. 위기라 함은 대다수의 생사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결정이 선출되지 않은 권력(사기업, 초국적기업, 국제금융기구 등)에 의해 민주적 의사결정과정 없이 이뤄진다는 것이다. 국가는 책임을 발뺌하고 사회안전망의 해체와 교육, 건강, 식량 등 필수적인 인권과 관계된 영역을 사유화하여 상품으로 만드는데 협조한다.
대중 참여에 대한 유엔연구에 따르면 정치적 참여에 대한 광범위한 토론이 계속되고 있다. 그 내용을 보면 지자체만이 아니라 다양한 반(半)공공, 반(半)사적 기관과 장치들, 나아가 모든 공익의 결정과정을 포함하는 것으로 선언 제21조에서 말한 ‘자국의 통치’의 의미를 확장할 필요가 있다. 또한 국가내의 자결권 테두리를 벗어나 세계적 차원으로 이를 실현할 과제가 있다.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인구는 국적과 시민권보다는 거주에 기초하여 정해질 필요가 있다. 이 부분에 대해 선언 제21조를 다시 쓴다면 “법적 연령의 모든 사람은 국적과 무관하게 관습적으로 거주하는 곳에서 행해지는 모든 선거과정과 의사협의와 결정에서 참정권을 가질 권리가 있다.”일 것이다.
참정권은 비차별 원칙을 지켜야 한다. 여성과 남성의 참정권을 똑같이 고려하지만 성(젠더)을 고려한 기준에는 몇 가지 특수한 추가가 있다. 1979년 여성차별철폐협약은 남성과 동등한 조건으로 다음의 권리를 여성에게 확보할 국가의 의무를 요구하고 있다.

․ 모든 선거 및 국민투표에서의 투표권 및 선거에 의해 선출되는 모든 공공기구에의 피선거권
․ 정부정책의 입안 및 정책의 시행에 참여하며 공직에 봉직하여 정부의 모든 직급에서 공공직능을 수행할 권리
․ 국가의 공적, 정치적 생활과 관련된 비정부기구 및 단체에 참여할 권리
․ 국제적 수준에서 그들 정부를 대표하며 국제기구의 업무에 참여할 기회의 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