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조 모든 사람은 사회의 일원으로서 사회보장제도에 관한 권리를 가지며, 국가적 노력과 국제적 협력을 통하여 그리고 각국의 조직과 자원에 따라 자신의 존엄성과 인격의 자유로운 발전을 위하여 불가결한 경제적, 사회적 및 문화적 권리의 실현에 관한 권리를 가진다.


사람의 삶은 불안의 연속이다. 소득이 끊긴다는 것은 전기와 수도 등 기초적인 필수물의 공급중단, 학업 중단, 주거 불안, 건강 불안 뿐 아니라 사람과의 관계도 끊어놓는다. 가족관계를 포함하여 많은 사회적 관계들이 거센 파도에 따라 출렁거리게 된다. 지금의 경제위기 속에서도 그렇지만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많은 사람들이 몇 번씩의 큰 고비를 넘어야 했을 것이다. 살던 집이 넘어가고 모든 저축과 보험을 해약해야 하고 가족이 뿔뿔이 흩어져 살아야 하는 고비 말이다. 그런데 이런 문제들을 외면하는 것이 인권이라 할 수 있을까?

해체해야 할 인권의 범주

인권은 이런 저런 이름과 범주로 나뉜다. 어떤 식으로 나누는지부터 알아보고 그 문제점을 생각해보자. 흔한 구분은 자유권과 사회권식으로 나누는 이분법이다.
먼저 자유권은 권력에 대항하여 발전한 고전적 인권으로서 주로 국가의 불법적이고 부당한 행위로부터 개인을 보호하기 위한 권리이다. 자유권은 다시 시민적 권리와 정치적 권리로 구분된다. 시민적 권리는 국가권력이나 타인의 간섭으로부터 침해돼서는 안 되는 개인의 삶의 특정 부문을 보호하기 위한 권리이다. 신체적 보전에 대한 권리, 자유와 안전에 대한 권리, 정당한 절차와 법의 보호를 받을 권리 등이 포함된다. 이런 시민적 권리가 가만히 앉아서 보장될 수는 없다. 권력이라는 건 잠시만 틈을 줘도 인권보장이라는 제 본분을 망각하고 오만한 것이 되기 쉽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민적 권리가 보장되려면 사회 구성원들이 쉴 틈 없이 국가권력을 적극적으로 감시하고 비판해야만 하고, 주권을 행사하는데 참여해야만 한다. 이런 것에 관계된 표현의 자유, 집회결사의 자유 등을 정치적 권리라 한다. 시민적 권리는 정치적 권리와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세계인권선언 21조까지의 권리가 자유권 또는 시민‧정치적 권리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다음으로 사회권은 인간의 기본적 생존을 보장하고 분배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국가의 적극적인 노력을 요구하는 권리이다. 경제적 불평등이 지배하는 사회 현실을 외면한 채 시민‧정치적 권리만을 인권이라 했을 때 그 폐해는 컸다. 인권이란 일부 가진 자만이 누리는 권리에 지나지 않았다. 인권의 역사에서 참정권은 재산에 따라 엄격히 제한됐고, 표현의 자유는 시장거리와 선술집에서 논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의사당 안의 의원들과 지식인들의 전유물이었다. 인신의 자유는 절차를 따지고 현란한 변호를 펼칠 수 있는 소수에게는 의미 있을지 모르나, 배고파서 빵을 훔친 이에게는 딴 나라 얘기였다. 사회권은 이런 식의 인권에 대한 비판과 반성에서 발전했다. 모든 사람은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인간다운 생활을 누릴 권리를 가지며 국가와 사회는 그 권리의 실현을 위한 생활여건과 자원을 제공할 의무를 가지는 것이다. 사회권을 다시 세분화하면 경제‧사회‧문화적 권리라 할 수 있다.
우리는 대개가 일을 해서 살아간다. 즉 누군가에게 일과 서비스를 제공한 대가로 생활을 이어간다. 그런데 그렇게 해야 하는 일이 무지막지한 조건에서 강요돼서는 안 된다. 무슨 일을 할 것인가 직업을 선택할 자유가 있어야 하고, 정당하고 유리한 보수를 받을 수 있어야 하고, 노동시간은 합리적으로 제한돼야 하고 휴가도 있어야 한다. 이런 권리들을 고용주가 자연스럽게 인정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일하는 사람들은 노동조합을 만들고 행동하고 고용주에게 다짐을 받아둘 권리가 있다. 이런 권리들을 경제적 권리라 한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일을 해서 생계를 도모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에 경제적 권리만으론 충분치 않다. 우리 모두가 원하지는 않지만 아플 때가 있고 선천적 후천적 장애를 가질 수도 있고 일자리를 잃거나 나이 들게 된다. 자기 의지로 어쩔 수 없는 이런 상황에서도 우리는 인간다운 삶을 살아갈 권리가 있다. 왜냐하면 사회의 구성원이기 때문에 인간사회의 일원으로서 사회에 대해 부양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 이것을 사회적 권리라 한다. 건강권, 주거권, 식량권, 사회보장에 대한 권리, 교육권 등이 여기에 속한다. 지금까지 말한 경제사회적 권리를 우리는 특정 공동체 속에서 누린다.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우리는 그 문화생활에 자유롭게 참여하고 예술을 감상하며 그 진보의 혜택을 같이 나눌 권리가 있다. 이것을 문화적 권리라 한다.

인권의 불가분성․상호의존성

뉴딜정책으로 유명한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은 “결핍으로부터의 자유”와 “공포로부터의 자유”라는 간결한 말로 인권을 표현했다. 이 둘 중 어느 하나만으로 된 인권은 가능하지도 않거니와 온전한 인권일 수가 없다. 정치적 독재는 경제적 불평등을 심화시키고, 그 역도 마찬가지다. 불평등한 체제에 대한 불만을 억압하기 위해 자유는 억압될 수밖에 없다. 배고프고 몸 누일 곳 없고 일자리 없는 사람이 자유를 누린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이런 인권의 성격을 인권의 ‘불가분성’ 또는 ‘상호의존성’이라 한다. ‘자유 없이 평등 없고, 평등 없이 자유 없다’는 말, ‘평등할수록 더 자유롭다’는 말, ‘자유 없는 평등은 노예의 평등’이라는 말이 다 이런 인권의 성격에서 나온 것이다.
그런데 이런 인권의 성격은 자주 무시돼왔다. 인권을 나눠서 편을 가르고, 한편은 인권으로 치고 다른 한편은 인권이 아니라 사람들이 그냥 바라는 것, 욕망하는 것쯤으로 취급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이 고질적인 인권의 이분법이다. 어떻게 편 가르기를 하는가 하면 인권의 한편을 ‘자유권’(시민․정치적 권리), 다른 한편을 ‘사회권’(경제․사회․문화적 권리)이라는 범주로 나누는 것이다.

이분 씨와 총체 씨; 누가 진짜 인권인가

자유권과 사회권, 인권을 이 둘로 나누고 자유권은 진정한 인권인데 사회권은 인권으로 보기 어렵다는 주장은 오랫동안 인권을 괴롭혀왔다. 어떤 이유 때문에 나누기를 고집하거나 또는 총체적인 접근을 주장하는지 생각해보자. 두 입장을 편의상 이분 씨와 총체 씨로 구분하고 얘기를 들어보자.

이분 씨: 사회권이라 말하는 권리들의 내용은 인간의 열망 또는 기대일 수는 있어도 권리의 자격을 가질 수는 없다. 사회권에 해당하는 내용들은 사회정책에 의해 그 수위가 결정되고 점차 달성돼야 할 사회적 목표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것을 권리라고 말해서는 곤란하다. 그렇게 되면 국가권력으로부터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약속된 진짜 인권에 물 타기를 하기 때문에 오히려 인권에 위험하다.

총체 씨: 먼저 인권의 가치를 생각해보자. 인권이란 건 존엄한 인간을 가능하게 만드는 권리다. 무직, 배고픔, 질병, 무주택, 문맹, 빈곤에 시달리는 인간이 존엄성을 존중받고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사회권은 인간 존엄성에 필수적인 것들에 관한 것이다. 이런 필수적인 것들이 없는 인간은 이분 씨가 ‘진짜’ 권리라고 가정하는 다른 어떤 권리도 충분히 누릴 수가 없다. 인간의 존엄성은 고문과 검열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경제적 한계상황에서도 침해된다. 이런 의미에서 사회권은 단지 ‘인간의 열망’이나 ‘기대’가 아니라 기본적인 권리다. 너무나 기본적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나머지 인류에게 할 수 있는 최소한의 합당한 요구이다. 필수적이고 기본적인 권리를 누리지 못하는 사람, 가령 굶거나 아픈 사람에게 ‘치료받고 싶어요? 밥 먹고 싶어요? 그런데 당신이 치료받고 싶고 밥 먹고 싶은 것은 인권으로 인정받을 현실적 전망이 없어요.’라고 하는 것은 심한 모욕이다.

이분 씨: 불평등한 것이 현실의 삶인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현실에서 보장 가능한 평등은 법 앞의 권리의 평등이요, 기회의 평등일 뿐이다. 노동이 불가능하거나 이런 저런 이유로 생활이 어려운 사람들을 자선이나 기타 구제를 통해 도와줄 수는 있지만 그것을 권리라고 하는 것은 곤란하다. 빈곤은 안타까운 일이기는 하지만 누가 누구의 자유를 침해한 결과는 아니다. 그런데 국가가 사회권을 보장한다는 명목으로 개인의 삶에 간섭하는 것, 재분배를 실현하겠다고 시장의 자율에 간섭하는 것은 자유를 억압할 뿐이다. 사회권을 실현하려면 국가가 재정을 제공해야만 하고 그 결과 국가기구의 비대화를 가져온다. 이것은 자유에 위험스럽기 짝이 없다.

총체 씨: 사회권 보장을 위해 국가가 재분배다 뭐다 해서 나서는 것이 자유의 침해라고 하는 주장은 자유에 대한 단단한 오해이다. 시장의 자유를 염두에 두고 이런 소릴 하는 것 같은데, ‘통제와 규율 없는 순수한 시장이란 건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적절한 규율이 있기에 시장이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은 경제학자가 아니어도 아는 상식이다. 시장의 자유라는 것은 인간의 생존을 위해 요구되는 것이지 시장을 위해 인간이 존재하는 건 아니다. 인간이 살기 위해 무역을 하는 것이지 무역을 위해서 우리가 사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인권의 주인공은 인간의 자유이지 시장의 자유가 아니다. 인간의 자기존중은 자기 신체와 정신에 대한 자유 없이는 불가능하다. 자유는 인간다운 생활을 위한 기본재이다. 그런데 이 자유의 향유자가 생존 불가능하다면 자유는 비현실적이 된다. 자유가 현실화되려면 그것을 위한 사회적 조건이 필요하고, 의식주와 아플 때 치료 등 그 조건을 규정한 것이 사회권의 내용이다. 자유를 누리는 것을 현실적으로 가능케 하는 생존의 기본재를 사회에서 분배받는 것 자체가 자유의 중요한 부분이다. 따라서 사회권은 자유보장에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 자유의 보장이다.

이분 씨: 사회권에는 자원, 즉 돈이 많이 든다. 자유를 보장하는 일에는 국가가 간섭을 자제하는 것 말고는 특별히 돈 들일이 없으니까 즉각 보장할 수 있다. 하지만 사회권 보장에는 경제적 자원과 국가의 적극적 조치가 필요한데, 이것은 쓸 수 있는 자원의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다. 노력하여 점차 좋아지도록 하겠다고는 할 수 있지만 즉각적으로 보장할 의무를 지는 권리일 수는 없다. 모자라는 자원 때로는 없는 자원에 대해 권리를 주장할 수는 없다.

이분 씨와 총체 씨; 사법심사가능성의 문제

총체 씨: 이분 씨가 자유권이다 사회권이다 구분하는 권리가 그런 식으로 똑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가령 노동권은 자유권이면서 사회권이다. 개별 노동자가 자기 권리를 위해 자유의사로 뭉칠 권리가 노동권의 자유권적 속성인데 왜 툭하면 정부가 개입하여 결사를 방해하는가. 교육권은 어떤가. 교육권에는 교육비, 학교시설, 교사고용 등도 중요하지만 교육의 내용을 정부 입맛대로 좌지우지해서는 안 되는 정신적 자유의 의미도 크다.
자유가 국가의 불간섭만으로 보장되는 것도 아니다. 이분 씨가 중요시하는 자유가 보호되려면 국가가 보다 강하고 공격적인 주체들로부터 이분 씨를 보호해줘야 한다. 가령 생명권을 생각해보자. 국가가 나서서 이분 씨에게 해코지를 해서도 안 되겠지만 제3자의 폭력과 학대로부터 이분 씨를 보호해줘야 한다. 건강에 유해하거나 위험한 상품의 거래와 판매로부터도 보호해줘야 한다. 마찬가지로 보편적인 건강보험제도 같은 것으로 기본적인 의료접근권을 보장해줘야 한다. 어디까지가 자유에 대한 간섭이고 어디까지가 자유에 대한 보호인가? 이분 씨는 그렇게 명확하게 선을 그을 수 있는가?
없는 자원, 모자라는 자원에 대한 권리를 주장할 수 없다는 말도 모순 된다. 사회권이 더 많은 자원을 필요로 한다는 건 사실일지 모르나 자원이 들지 않는 권리란 없다. 안전권을 위한 경찰력의 유지가 맨손으로 되는 것도 아니고, 공정한 재판권을 위한 사법공무원도 돈 주지 않고 쓰는 것이 아니다. 사회권에만 돈이 드는 것이 아니라 모든 권리에는 돈이 든다. 반대로 큰 자원을 들이지 않고도 당장 실현할 수 있는 사회권의 항목도 있다. 가령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참가할 권리를 보장할 의무는 자원과 상관없이 즉각 효력을 가져야 할 권리이다.

이분 씨: 진짜 인권은 자유권의 내용처럼 재판을 통해 청구하고 구제를 받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사회권이란 인권은 모호하여 재판의 심사대상으로 삼기 어렵다. 사회권에 해당하는 내용은 입법과 행정부의 정책결정 권한에 속하는 문제이므로 사법부가 이를 대신할 수는 없다. 사회권은 어떤 정책의 불가피한 영향이나 개인의 행운과 불운, 개인의 선택에 따른 결과 등 재판으로 따질 수 없는 성격의 내용을 담고 있다.

총체 씨: 사법심사가능성과 불가능성은 고정된 것이 아니고, 불가능성이 사회권의 특성인 것도 아니다. 모호함은 사회권의 특성인 것이 아니라 일부 정교화된 권리와의 정도 차이일 뿐이다. 자유권 중에서도 모든 권리가 정교화된 것이 아니라 법리는 계속 형성되고 있다. 인권은 어떤 권리를 꿈꾸고, 그것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 명문화하고, 실현하는 과정을 밟아왔다. 오늘날 명백한 것으로 보이는 재판구제 사안도 그것이 시작될 때는 청구가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진 구체적 사건과 도전에서 시작됐다. 사회권의 사법심사가능성도 권리 내용에 따라 편차가 있고 국내외적으로 일정정도 현실이 된 내용도 많다. 따라서 자유권은 재판 가능하고 사회권은 그렇지 않다는 이분법은 시대착오적이다. 이에 대해 유엔 사회권위원회는 “경제․사회적 권리가 법원의 범위를 넘어서는 것으로 엄격하게 분류․채택하는 것은 자의적인 것이고, 두 종류의 인권이 나뉠 수 없고 상호의존한다는 원칙에 위배”될뿐더러 그렇게 하는 것은 “사회에서 가장 약하고 소외된 집단의 권리를 보호하는 법원의 권한을 현저히 축소시킬 것”이라 했다.
또한 현실에서 오히려 문제 삼아야 할 것은 사법심사가능성이 아니라 사법제도 자체의 불평등성이다. 그렇기 때문에 권리에 대한 판단과 구제를 사법심사에 의한 것으로 제한하여 생각하는 것은 인권에 위험하다. 가령 ‘유전무죄 무전유죄’가 범죄형량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헌법에 보장된 노동권에 대해서는 박하게 해석하고 기업주의 재산권 위주로 유리한 판결을 해주는 것, 재산권에 대한 사회적 제약을 솜방망이처럼 다루는 것도 ‘유전무죄 무전유죄’이다.
권리에 대한 구제를 재판에 의한 것으로 한정하는 것과 인권회복수단으로서 사법적 구제절차를 강조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권리에 대한 구제는 사법절차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다각도로 모색돼야 한다. 가령 재산권이란 건 그 내용이 법률로 정해지는 것이기 때문에 사회권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토지’ 같은 재산의 내용과 한계를 정하는 것은 중요하다. 재판가능성 만이 아니라 어떤 법률을 만드느냐, 어떤 권리를 우위에 두는 사회적 합의를 만드느냐를 같이 고려해야 한다. 예를 들어 주거권의 보장을 위해서는 법원명령이 없는 강제퇴거의 금지나 이에 따른 구제조치 뿐 아니라 주거현황에 대한 실태조가, 최저주거기준이나 주거기본법 등의 마련, 주거권에 대한 인식 향상과 교육 등 다각도의 노력이 요구된다.

이분 씨: 권리라 할 때는 법적으로 그 권리를 보호하고 보장하고 실현할 의무 주체가 있어야 한다. 의무 주체가 이를 충족시키지 못했을 때 인권침해라 한다. 하지만 사회권의 경우에는 의무주체가 모호하다. 뿐만 아니라 사회권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사회 다양한 부문의 자발적인 원조, 동의와 협력이 절실한 데 거기다 대고 인권침해라고 지적하는 것은 찬물을 끼얹는 것이고 적절치 않다.

총체 씨: 가난이 불가피하다고 말하는 것과 가난은 인권침해라고 말하는 것은 아주 다르다. 흔히 사람들은 누군가가 고문당하거나 표현의 자유를 침해당했다면 무의식적으로 국가의 책임을 묻는다. 그러나 사람들이 굶주리거나 도시빈민이 살던 곳에서 내쫓길 때 세상은 누군가의 책임을 묻지 않는다. 이름 없는 경제개발의 힘 또는 나라님도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가난의 불가피성을 탓한다. 더 심하게는 그런 암울한 운명을 자초한 것은 피해자들 자신의 탓이라고 한다. 대부분 자유의 박탈에 대해서는 끔찍하게 여기면서 식량, 의료보호, 살 곳 같은 삶의 기본적인 필요가 (예방할 수 있음에도) 박탈당함으로 인한 인간의 고통이나 죽음에 대해서는 상당한 관용을 보인다. 사회권을 인권으로 규정하고 그 침해를 인권침해로 규정하는 것은 그래서 중요하다. 불쌍하고 가련한 사람이 아니라 마땅히 받을 것을 받지 못한 권리 주체로 바라보는 것은 크게 다르며, 마땅히 누려야 할 것이 방임되고 침해됐다고 봐야 진짜 문제에 접근할 수 있다.

물론 인권침해를 규정하는 일이 간단하지는 않다. 침해라는 용어를 신중하게 사용할 필요도 있다. 모든 안 좋고 불쾌한 상황에 죄다 인권침해라는 꼬리표를 붙이는 것은 침해라는 용어의 심각함을 훼손하게 될 것이다. 침해라는 용어는 그에 상응하는 의무와의 관계 속에서 가려서 사용돼야 한다. 많은 국가들과 국제사회는 사회권에 대한 국가 및 주요행위자들의 의무를 분석하기 위한 방법을 개발해왔다. 가령 유엔사회권위원회는 국가가 해선 안 되는 일을 하는 것(작위),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것(부작위)을 사회권에 따른 의무 위반으로 본다. 가령 작위의 의무 위반은 이미 향유하고 있는 권리를 고의적으로 철회하거나 후퇴시키는 행위, 보호적 법률을 개악하고 특정 집단을 향한 차별을 강화하는 행위, 사회권에 해로운 정책 강요 등이 있다. 부작위의 예로는 사회권과 관련된 지표를 만들지 않고 모니터도 안하는 것, 즉각적 성격을 갖는 의무(법률상의 차별 제거 등)를 불이행 하는 것, 정당한 안전조치를 취하지 않고 규정된 법적 의무를 따르지 않는 것 등이 있다.

경직화된 범주를 깨는 일의 중요성

흔히 사회권에 따른 국가의 의무라 하면 국가가 직접 나서서 자원을 제공하는 것만을 떠올린다. 물론 그런 국가의 직접 지원이 필요하기도 하다. 직접 제공하는 것 말고는 생활의 필수적인 필요를 충족시킬 권리가 실현될 다른 가능성이 존재하지 않을 때가 있다. 노인이나 장애인처럼 사회경제적으로 불리하게 된 사람들, 위기나 재난, 갑작스런 실업 상태 등이 그렇다. 하지만 국가의 의무는 직접 제공자로서의 의무에만 있는 게 아니다. 국가는 일차적으로 개인들이 자신의 역량을 발휘해 개인적으로나 타인과 결사하여 생존을 추구할 방법을 보장해야 한다. 가령 토지 이용과 밀접한 관계를 맺는 사람들에게 토지의 보호는 직접 다른 재화와 서비스를 제공하는 의무보다 훨씬 중요하다. 토지는 오직 경작하는 농부만이 소유할 수 있도록 한다거나 무분별한 개발과 투기의 대상이 되지 않도록 하는 의무가 파산한 농부에게 생계보조금을 주는 것보다 훨씬 중요하다. 노동자의 집단적 결사와 행동권을 보장하는 것은 부당 해고된 노동자에게 쌀 한말을 주는 것보다 중요하다.

또한 국가는 직접 제공자로서가 아니라 보호자로서의 의무를 진다. 이것은 자유권에 있어서 보호자로서의 국가의 역할과 기능적으로 유사하다.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보다 강하고 공격적인 주체들로부터 개인의 행동의 자유와 자원의 이용을 보호하는 것이다. 보다 강력한 경제적 이해로부터 기본적이고 필수적인 생존재의 보호, 무역과 계약 관계에서 각종 비윤리적인 위협으로부터의 보호, 유해하거나 위험한 상품의 거래와 투매로부터의 보호 등이 요구된다. 이런 경우에는 사법심사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사회권은 자원이 필요하고 자유권은 자원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주장은 직접 제공자로서 국가가 나서는 단계에만 초점을 두고 다른 의무들을 고려치 않는 과도한 단순화이다.

인권의 상호의존성은 권리개념을 설명하고 분석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개념이 아니라 인간을 위한 개념이다. 인간의 존엄성은 잘못된 이분법의 구속을 받기보다는 무엇보다 중요한 목적이자 근본가치인 인권존중이라는 견지에서 추구돼야 한다. 잘못된 이분법은 인권을 형식적인 것으로 몰아갈 수 있다. 어떤 권리가 어떤 범주와 법률에 속하느냐가 아니라 인권의 기초인 인간애에 일관된 관심을 가져야 한다. 경직된 범주화를 깨뜨리는 것 자체도 중요한 인권투쟁이다. 효과적인 인권보장이란 불리하고 취약한 집단의 구성원에 특히 유념하여, 권리를 진정으로 모든 사람의 것으로 만들기에 뭐가 필요한가를 총체적으로 해석해서 나오는 결과여야 한다. 범주는 임시로 만들어진 것이고, 전체의 부분에 불과하며, 관계 속에서만 이해된다. 가령 자유권에 있는 생명권은 사회권에 있는 건강권과 관계 속에서 보면 아주 달라 보인다. 부당해고 당하여 노동조합을 만들려는 노동자의 일할 권리와 결사의 권리는 노동자가 부양하는 아동의 권리와 연관시켜 볼 수 있다.

사회보장권의 의미

선언의 다른 조항들과 마찬가지로 사회보장에 대한 권리 보장의 직접 배경이 된 것은 나치즘의 경험이었다. 물론 그에 앞서 1919년 러시아 사회주의 혁명의 성공, 그리고 대공황의 여파로 체제에 위협을 느낀 자본주의 국가들 내부에서부터 사회보장의 중요성은 점차 강조되는 과정에 놓여있었다.

1940년 여름 정책적으로 “노인, 정신질환자, 불치병자, ‘쓸데없이 밥만 축내는 이들’은 특별기관으로 옮겨졌고 거기서 죽었다”(전쟁범죄에 관한 유엔 보고서 중에서)
“자신의 건강을 위해 싸울 기력이 더 이상 없다면 이 투쟁의 세계에서 생존할 권리는 끝난다”(히틀러의 나의 투쟁 중에서)

대규모 실업과 빈곤으로부터 인간생활을 지켜내지 않으면 나치즘과 같은 악몽이 언제든지 재발해 사회를 지배할 수 있다는 두려움이 컸다. 기본적인 생존을 인권으로 보장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고 사회보장에 대한 권리는 생존권을 구체화하기 위한 기본적인 권리 가운데 하나이다.
이런 필요성에는 다들 공감했지만, 누가 얼마만큼 의무를 질 것인가에 대해서는 생각이 달랐다. 어떤 국가들은 주거권과 의료권을 헌법에 보장하지만 어떤 국가들은 사회보장의 필요성은 인정하면서도 그것에 대해 국가가 비용을 지불하거나 의무를 져야 하는 것으로 해석되길 꺼려했다. 결국 선언에는 사회보장의 의미가 무엇이며 누가 얼마만큼 책임져야 하는지에 대한 구체적 얘기는 없다. 사회보장이라는 단어는 그것 자체가 의미를 가지거나 목적이 될 수 없는 것이고, 사회보장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나타내는 구체적 목록과 함께 있어야 그 의미가 규정된다. 선언에서 우리는 간접적으로 ‘의식주, 의료, 필수적인 사회서비스’를 통해 그 의미를 짐작할 뿐이다.
선언 내에서도 22조에서 말하는 사회보장과 25조에서 말하는 사회보장의 의미는 다르다. 22조의 사회보장은 막연하지만 넓은 의미의 권리, 즉 ‘인간존엄성과 인격의 자유로운 발전을 위한’ 권리를 말한다면, 25조의 사회보장은 ‘최소한의 예시목록’으로서 실업, 질병, 장애, 노령 등의 특정상황에서 인간존엄성을 보장하기 위해 어떤 걸 고려할 수 있는지를 얘기하는 것이다.

“자선이 사회적 제도로서 완전히 무력하다는 것이 증명되고 있는 때에 자선의 방법에 의하지 않고 질병, 불충분한 임금, 실업 등으로 말미암아 대다수 선의의 노동자들을 빠져나올 수 없는 밑바닥에 가두는 것과 같은 부당한 비참을 없애야 하는데도 그를 위한 대책이 마련되고 있지 않다. 우리는 피부조자가 아닌 평등한 자가 되기를 원하며, 시혜를 배척하고 정의를 바라는 것이다…”(프랑스 노동자 60인 선언, 1864)

사회보장에 대한 ‘권리’란 예전 시대의 구빈이나 자선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구빈차원의 사회부조에서는 수급자의 권리를 부인하고, 베풀어준다는 은혜성과 그에 따른 굴욕적 조건을 달았다면 권리로서의 사회보장은 다르다. 개인의 잘잘못이 아니라 이 체제 속에서는 ‘어쩔 수 없는’(세계인권선언에서의 표현은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서의”) 생활 곤궁이나 불능상태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구조적 문제를 인정한 속에서 사회보장의 권리가 인권으로 구체화된 것이다. 이 권리는 개인의 기본적 인권이기 때문에 수급자의 기여에 의존하지 않고 공적 부담으로 이뤄지는 게 당연하다. 그리고 권리이기 때문에 구빈의 차원을 벗어나 법적 권리로 인정하는 단계로 발전한 것이고, 사회는 자기 내부에서 발생하는 위험으로부터 구성원을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회권의 구체적 내용은 선언 23-27조에 들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