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조 1. 모든 사람은 근로의 권리, 자유로운 직업 선택권, 공정하고 유리한 근로조건에 관한 권리 및 실업으로부터 보호받을 권리를 가진다.
2. 모든 사람은 어떠한 차별도 받지 않고 동등한 노동에 대하여 동등한 보수를 받을 권리를 가진다.
3. 모든 근로자는 자신과 가족에게 인간적 존엄에 합당한 생활을 보장하여 주며, 필요할 경우 다른 사회적 보호의 수단에 의하여 보완되는, 정당하고 유리한 보수를 받을 권리를 가진다.
4. 모든 사람은 자신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하여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가입할 권리를 가진다.

제24조 모든 사람은 근로시간의 합리적 제한과 정기적인 유급휴일을 포함한 휴식과 여가에 관한 권리를 가진다.


파업의 이유

몇 해 전 한 건설노조가 파업을 했다. 요구사항은 이런 것이었다. ‘근로조건을 개선해 달라’, 그 내용은 하루 8시간 노동, 유급휴일, 주휴, 월차수당을 보장해 달라는 거였다. ‘산업안전보장’, 그 내용은 가스실 들어갈 때 가스마스크를 달라는 거였다. ‘뭐, 이런 걸 갖고 파업을 하나, 파업을 안 하면 이런 기본적인 것조차 보장 안 되나’ 생각이 드는 순간 다음 요구사항에선 기가 막혔다. ‘중식 및 휴게시설 확보’, 그 내용은 화장실이 없어 노상방뇨를 하는 형편이고, 도로 담벼락에 붙어서 옷을 갈아입어야 하고, 일마치고 씻을 세면장이 없고, 밥 먹을 식당이 없어서 먼지 풀풀 날리는 길거리에서 밥을 먹고 있으니 그걸 시정해 달라는 거였다. 마지막 요구사항은 ‘노동조합을 인정해 달라’는 거였다.

이거 뭐야, 8시간 노동제 요구는 1886년인가에 내걸었던 요구고, 폐병 걸려 피를 토한 여공이 ‘손 씻을 곳이 없어요.’라고 울부짖는 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을 본 게 10년도 넘었다. 노동조합이 아직도 ‘인정해 달라’는 요구를 해야만 가능한 조직인가라는 생각을 하는 나는 21세기 한국에 살고 있다.
또 이런 일도 있었다. 몇 해 전 이라크 파병철회를 내걸고 민주노총 소속 노동자들이 파업을 했고, 전교조 소속 교사들은 반전․평화수업에 나섰다. 이에 정부는 이라크 파병철회를 내건 파업은 불법이라며 엄단하겠다고 했다. 한 집회에 참석한 노동자들은 “임금인상과 근로조건 개선도 필요하지만 건강한 사회를 만드는데도 앞장서야 한다”며 파병반대와 비정규직 차별철폐를 같이 외쳤다. “노동자들은 모든 전쟁을 반대하며 민주주의와 평화를 원한다. 이라크 파병은 즉각 철회되어야 한다”고 했다. 이에 노동부 장관은 “파병반대라는 정치적 목적을 관철할 의도로 파업을 벌이는 것은 책임 있는 노동운동의 리더십이라고 할 수 없다”고 했다. 이보다 훨씬 이전 이라크 침공이 있기 전에 수백만 명의 유럽 노동자들이 미국 주도하의 이라크 군사공격 가능성에 항의하여 일시 파업을 했다. 자동차 공장이 멈추고 열차 운행이 중단된 곳도 있었다. 노동자가 전쟁반대를 위해서는 파업을 할 수 없다는 식의 반응은 당시 보도에서 볼 수 없었다.
이 사례에서 엿볼 수 있는 고질적인 생각은 노동조합과 노동운동은 노동자만의 근로조건 개선을 위해서만 존재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노동자들이 생존을 위해 투쟁하면 ‘밥그릇 투쟁’이니 ‘이기주의’라 욕하고, 다른 사회적 목적을 위해 투쟁하면 노동운동이 ‘정치화’됐다면서 원래 생존권 투쟁으로 돌아가라고 윽박지른다. 노동권은 시민으로서의 노동자가 생존에 필수적인 자기 일터에서 이를 지배하는 규범을 자율적으로 형성할 뿐 아니라 더 큰 사회 속에서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기능과 역할을 수행한다.

노동권의 역사와 의의

모든 사람에게 인권이 있는데 노동인권은 뭐야, 노동자만 특별 취급하는 건가라는 생각을 할지 모르겠다. 맞다. 노동인권은 노동자를 특별 취급하는 인권이다. 세계인권선언에서는 “모든 사람”이 아니라 “모든 노동자”라는 표현이 유일하게 등장하는 것이 노동권 관련 조항이다. 그런데 이 특별취급의 이유가 노동자를 더 잘 대접하겠다는 취지는 아니다. 노동자도 시민이며 시민으로서 기본적 인권을 갖는다. 그런데 노동자의 처지가 하도 취약해서 개별 노동자로서는 시민에게 보장된 기본권을 제대로 누릴 수가 없다. 즉 노동자로서의 시민은 이윤의 극대화를 노리는 자본가와 대항하여 싸우기에 힘이 부치고 그 결과 기본권을 누리기 어려우므로 단결을 통해 거래능력의 취약함을 극복하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 결과로서 성취하는 것은 뭔가 노동자에게만 허용된 특수한 권리를 덤으로 더 얻는 게 아니라 원래 제 것임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누릴 수 없었던 시민으로서의 기본권인 것이다.
세계인권선언에서 말하는 노동권은 임노동관계와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자본주의와 더불어 등장한 근대인권체계는 모든 사람을 신분제의 예속에서 해방시켰다. 그래서 노동자도 자유를 얻었지만 이 자유는 이전과는 다른 성격의 부자유를 내포한 것이었다. 대다수 사람들은 신분제도에서 해방됨과 동시에 토지 등 생산수단으로부터도 분리됐다. 이제 자유의사에 의해 근로계약을 맺고 살아가라 했다. 하지만 겉으로는 자유계약이라 했지만 굶어죽지 않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사실상 부자유한 종속관계가 임노동관계이다. 그리고 경제적 독립성은 시민에게 허용된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조건이 됐다. 사상․표현의 자유도, 정치활동의 자유도 부자유한 노동자에게는 허용되지 않았다. 노동자는 자립할 재산이 없다하여 참정권도 주지 않았고, 노동자의 불리한 처지에서 어쩔 수 없이 맺은 노동계약은 인간다운 생활을 허용치 않는 장시간 노동과 위험한 노동을 강요했다. 그렇게 벌어들인 소득으론 입에 풀칠하기 어려워 어린 자식과 부녀자도 위험한 노동에 내몰려야 했다. 여기서 여성의 노동은 자기실현을 위한 사회참여와는 거리가 멀었다. 참다못해 노동자들이 단결을 하면 불온한 행위라 하여 처벌을 했다. 하지만 노동자의 대표가 하나도 없는 의회도 그런 의회가 만들어낸 법도 노동자들의 편은 아니었다. 이에 노동자들은 필사적으로 단결을 했고 사회경제적 권력에 도전을 했다. 그런 도전이 하도 광범위하여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 되자, 법원도 처벌하기를 단념하고 노동자의 단결을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노동자에 대한 처사가 너무 심하다는 현실에 대한 공감도 깔려 있었고, 열악한 처지의 노동자 개인으로서는 시민에게 보장된 인권을 누릴 가능성이 없다는 인정도 깔려 있었다. 노동자 개인으로서는 시민에게 보장된 권리와 자유를 누릴 수 없기에 노동자는 단결하여 집단적으로 권리를 추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 것이 노동인권으로 표현된 것이다.
인권의 역사가 이러하니 노동인권은 노동자에 대한 특혜가 아니라 노동자의 열악한 권리상황의 증거인 것이다. 노동인권에 대한 인정에는 노동자들의 단결과 투쟁이 주효했지만 자본주의 자체 내의 변화도 무시할 수 없다. 일단 노동력을 만들기 위해 농촌에서 농부들의 땅을 빼앗아 내몰았던 때가 있었고, 쫓겨나 방황하는 사람들을 우악스럽게 붙잡아 강제노동 비슷하게 일 시킬 때도 있었다. 노사의 자유로운 거래에만 노사관계를 맡겨뒀다가 개별 고용주의 횡포가 전체 체제를 위태롭게 한다는 판단이 들자, 국가가 나서서 최저임금제나 각종 안전장치를 통해 노사관계의 최소규범을 만드는 시도도 있었다. 노동운동이 본격화되고 대내외적으로 사회주의 운동이 거세졌다. 여기에 양차대전을 치르면서 노동자를 다독일 필요성 등이 합쳐져 노동권은 사회보장권과 함께 인권의 새로운 양상으로 떠올랐다.
기나긴 수난과 투쟁, 억압과 용인의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 노동인권의 의의는 크게 두 가지로 말할 수 있다. 첫째 노동권은 개인의 자유의 회복을 의미한다. 근대 자유방임의 인권체계에서는 모든 사람이 계약자유의 원칙 하에서 자유롭고 평등하다고 했다. 형식으로는 시민일지 모르나 현실에서는 노동자인 사람에게 기본적인 생존조차 보장받기 어렵다는 것은 자유의 상실을 또한 의미한다. 노동자가 시민적 자유를 누릴 수 있도록 자유방임을 교정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 노동권이다. 흔히 노동권이라 하면 물질적 재화의 분배시정만을 떠올리는데 노동권의 진짜 의미는 자유의 평등한 분배를 꾀하는 데 있다. 사람은 스스로 가치 있다고 여기는 종류의 삶을 선택하고 영위할 수 있는 자유를 갈구한다. 이 자유를 누리는 데는 물적 조건이 필수적이다. 이 물적 조건을 수동적인 수신자로서 주는 대로 받아먹는 것은 자유가 아니다. 단결하여 개개인이 갖는 취약성을 극복하고 사회경제적 권력에 대항하여 구체적인 자유의 조건을 만들어 내는 것이 노동자의 결사의 자유다. 노동자의 자유로운 의사가 생존의 기초이며, 노동자의 자유의사를 표출하는 몸뚱이가 결사의 자유다. 노동자의 의사는 영리활동을 위한 자유에 자유를 가둬둘 수 없다는 것이었고, 갇힌 자유에 대한 부정은 기본적 생존요구를 포함하는 구체적 자유의 실현을 추진했다.
둘째 노동권은 사회진보의 수단으로서 기능한다. 노동자의 결사와 집단적인 의사표시, 특히 파업은 정치적 및 경제적 권력에 대한 저항수단이다. 노동자의 의사표시가 집약되는 것이 노동자의 집단행동이요 그 절정이 파업이다. 앞서 살펴본 예에서처럼 노동자의 집단적 의사표시는 전쟁반대를 외치기도 하고 사회적 불평등의 시정을 요구하기도 한다. 방송사 노조 때문에 방송사가 시사고발 프로그램이나마 유지하는 것이고, 병원노조 때문에 병원을 사기업과 똑같이 운영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나마 가능한 것이고, 비정규직 노동자 또는 이주노동자들의 투쟁 때문에 고쳐야 할 사회의 환부가 드러나는 것이다. 노동권을 세계적으로 기본적인 권리라 하는 것은 그것이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과 일치했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어디에서나 독재정권이 먼저 때려잡는 것은 진보적 지식인이나 학생만이 아니라 오히려 노동자였다. 한 국가에서 노동자의 권리지위는 일반적인 인권의 지위를 보여주는 지표이다.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첫째 신호는 흔히 가장 기본적인 노동자의 권리인 결사의 자유에 대한 침해이다. 억압적인 체제는 불가피하게 노동조합을 억압하고 통제하려 한다.

결사의 자유는 기본

세계인권선언에서 노동권에 관한 조항은 앞서 살펴본 20조의 결사의 자유, 그리고 23조와 24조이다. 결사의 자유는 노동권의 핵심이다. ILO 헌장(1919) 서문에서는 “세계의 항구적 평화는 사회정의를 기초로 함으로써만 확립될 수 있으므로, 생산에 참여하는 다수의 사람들에게…결사의 자유 원칙의 승인 등이 급선무이므로”라 했고, ILO헌장의 부속서인 필라델피아 선언(1944)에서도 “표현 및 결사의 자유는 부단한 진보를 위하여 필수적인 것”이라 했다. 세계인권선언이 만들어진 1948년에 국제노동기구(ILO)도 대표적인 협약을 만들었는데 ‘결사의 자유 및 단결권 보호에 관한 협약’(제 87호)이다. 노동자의 단결권이 두 기념비적인 국제문서에 포함된 것은 사회정의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단결권이 필수불가결한 전제조건이라는 점을 분명히 보여준다.
세계인권선언에서는 20조에서 뿐만 아니라 23조에서도 다시 한 번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가입할 권리’를 말한다. 이에 대해 반대 의견도 있었다. 선언에서 이미 결사의 자유를 언급했는데 노동조합 결사의 자유를 또 명시할 필요가 있느냐는 의견이었다. 노동조합 결사의 자유를 옹호한 편에서는 이런 주장을 펼쳤다. “다른 형태의 결사들은 오랫동안 인정받아 왔지만 노동조합은 많은 반대를 겪어 왔고 결사의 자유의 형태로서 받아들여지게 된 것은 극히 최근이다”, “노동조합 인정 투쟁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으므로 노동조합에 대해 구체적 언급이 돼야 한다”, “현대 경제생활에서 노동조합활동의 특별한 중요성 때문에 포함시키는 것이 현명하다”는 것 등이다.이런 논쟁만으로 노동조합 결사권이 선언에 포함된 것은 아니었다. 세계의 노동조합들이 노동조합에 대한 권리를 세계인권선언에 넣자고 촉구하는 캠페인(“The Campaign for Trade Union Rights")을 강력히 펼친 후에야 가능한 일이었다. 세계노동조합연맹은 유엔 경제사회이사회에 전후 노조의 곤경을 분석·보고한 장문의 비망록을 보냈다. 경제사회이사회는 이 문제를 다루는 데 곤란을 느껴 ILO의 조언을 구했고, 국제노동기구는 세계인권선언에서 노동조합 결사권을 다루는 것이 타당하다고 제안했다. 선언의 기초자들은 이런 제안을 받아들였다. “노동조합의 정당한 요구가 음모로 간주되던 시기는 지나갔다. 노동자의 결사를 음모로 보는 것은 20세기가 아닌 19세기의 개념이다. 이 조항은 노동조합을 통해 노동자가 자기 권리를 사수할 가능성을 제공하는 것이다.”가 선언기초자들의 합의였다.
그런데 한국 정부는 ILO의 ‘결사의 자유 및 단결권 보호에 관한 협약’(제 87호)을 비준하지 않고 있다. 노동자의 단결을 19세기식의 음모로 보는 시각이 여전하지 않고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비준을 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의무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한국은 ILO 회원국이다. ILO는 모든 회원국에게 필수적으로 챙겨야할 종합선물세트를 안겼다. 1998년 6월 ILO총회는 ILO가 제정해온 수많은 협약과 권고 중에서 8개 협약을 모든 회원국이 지켜야 할 기본협약으로 선언했다. 즉 한국이 87호 협약을 비준하지 않았더라도 ILO 회원국이라는 바로 그 사실만으로 이 기본협약에 내포된 원칙들을 준수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한국이 이 기본협약 가운데 비준하고 있는 것은 절반이다. 아동노동철폐와 관련된 것으로 한국정부가 부담 느끼지 않을 소위 만만한 것들만 비준했다. 노동권의 보장과 직접 관련된 ‘결사의 자유 및 단결권 보호협약’(제87호), ‘단결권 및 단체교섭 협약’(제98호), ‘강제노동협약’(제 29호), ‘강제노동철폐협약’(제105호)은 어느 것도 비준하지 않았다.

노동은 상품이 아니다

23조와 24조가 규정한 권리는 일할 권리, 자유로운 직업선택, 공정하고 유리한 노동조건, 실업에 대한 보호, 차별 없이 동등한 노동에 대한 동등한 임금, 정당하고 유리한 보수,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가입할 권리, 여가시간과 합리적인 노동시간을 가질 권리, 유급휴가를 가질 권리이다. 이 모든 권리에 깔린 핵심 생각은 인간 노동은 착취되거나 가능한 한 싼값에 살 수 있는 상품이 아니라는 것이다. 원래 선언을 만들 때 이 조항은 “인간 노동은 상품이 아니다”라는 문구로 시작됐다. 우여곡절 끝에 이 문구는 삭제됐지만 지금 있는 조항이 갖는 메시지는 마찬가지다.
그런데 23조와 24조에 담긴 권리를 총체적으로 부정당하는 것이 비정규직 노동자의 현실이다. ‘쓰다 버린다, 더 싼 것으로 바꾼다, 빌려 쓴다, 잡음이 없을수록 좋다’는 게 인간의 노동에 적용되고 있다. 노동권이란 게 노동자라는 존재를 인정해야 가능한 것인데, 노동자를 노동자라 하지 않고 사용자를 사용자라 하지 않는 관행이 판치고 있다. 사실 ‘비정규직’이란 말은 법조문에도 없다. 단기 계약직 노동자, 외주화로 인한 파견․용역 등 간접노동자, 특수고용노동자가 있는 것이다. 정규직 일자리는 줄어들고 기존 정규직도 이런 비정규직이나 영세빈곤자영업자로 전락해가는 것이 현실이다.
대기업이 나라를 먹여 살리는 것처럼 큰소리치지만 실상은 감원과 인건비 절약을 통한 돈벌이에 푹 빠져 있지는 않은가. 기업들은 일자리를 늘려 노동자를 고용하지도 못하고, (매일 가족처럼 일하자고 해놓고)있는 식구도 내쫓고, 일시키면서 노동자 취급을 안 하고 어디서 빌려온 연장쯤으로 여기고, 법을 악용해 2년마다 갈아치우는 식으로 돈벌이 한다. 여기에 인간으로서 노동자가 저항하는 것이 노동권의 행사인데 국가는 이를 보호해주는 것이 아니라 구속, 수배, 형벌, 손해배상, 가압류 등 손톱을 세우고 할퀴어 댄다.
파업은 노동자가 그 주장을 실현하기 위해 사용주를 압박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다. 세계인권선언은 파업권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지만 그에 대한 토론이 없었던 건 아니다. 파업권을 지지한 국가들은 많았지만 이 문제를 추상적인 선언에서 다루기 어렵다는 이유로 결론을 내리지 않았을 뿐이다. 강력하게 파업권을 지지한 대표적인 국가는 스웨덴이었는데, 그 입장은 이랬다. “파업권은 노동조합이 노동자의 이익 보호를 위해 가져야 할 도구이다. 모든 사람은 기존의 또는 제공되는 경제 조건에서는 일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여길 때 노동을 그만둘 권리를 갖는다. 기존의 또는 제공되는 경제 조건에서 더 이상 일해선 안 된다고 느낄 때 개별 노동자가 일하는 것을 그만 둘 자유가 있어야만 결사의 자유는 시민의 자유로서 의미를 갖는다. 노동조합의 권리가 정당한 보수와 합리적 노동시간의 권리를 이행하기 위한 수단이라면 파업권은 노동조합의 권리를 이행하는 수단이다. 파업권 없이는 노동조합의 권리가 무의미하다. 나치 독일과 파시스트 이탈리아에서 노동조합은 계속 존재를 허용 받았지만 파업권이 없었다. 파업권 없는 노동조합의 자유는 환각이었다.” 선언에는 없지만 ILO 협약이나 유엔경제․사회․문화적 권리협약에는 파업권이 명시돼 있다. 또한 한국처럼 파업 자체를 이유로 노동자를 체포하거나 구금하는 예는 거의 없다. 노동자가 가진 건 노동력뿐이고 자기 의사대로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인데, 파업을 형벌로 처벌하는 것은 자신의 노동력을 제공하지 않겠다는 최소한의 자유조차 부정하는 것이다. 그런 물리력을 동원하지 않고서는 사회경제적 갈등을 해결할 수 없는 지배 권력의 무능함을 보여줄 뿐이다. 그리고 무능함을 감추기 위해 입만 열면 법치주의를 강조한다. 법대로는 파업이 불가능하고 법대로는 그냥 직장에서 내쫓겨야 하고 법대로는 항의조차 할 수 없는데 그런 법을 지키라는 것은 고장 난 신호등이 파란불을 가리키고 있다고 해서 차에 치어죽을 줄 알면서 파란불이니까 무조건 건너야 한다는 것과 같다.
노동자를 상시고용하고 직접 고용하라는 요구, 비정규직 고용의 고용사유를 엄격하게 제한하라는 요구, 파견․용역회사 뒤에 숨지 말고 사용자면 사용자답게 처신하라는 것, 노동자는 노동자이지 정규직․비정규직이 그 본질은 아니라는 것, 따라서 노동권은 모든 노동자에게 보장돼야 하고 그 기본은 단결권을 인정하는 것은 상식적 요구다. 상식을 무시하는 기업과 정부, 그리고 사법당국에게 상식을 알려줄 수 있는 것은 모든 시민이 노동인권에 대해 깨인 눈과 연대의 정신을 갖는 것이다. 노동인권을 무시하고 모든 것을 금전적 이윤이라는 목적아래 종속시킬 때 정부는 절대왕정의 모습을 띠게 되고 진짜 주권적 힘을 갖는 것은 기업총수와 금융총수가 될 것이다.

휴식의 권리

“우리는 노동하는 사람들로서 우리 자신의 노동, 건강, 시간과 삶을 스스로 통제할 권리를 되돌려 받으려 한다. 우리의 핵심 요구는 모든 사람이 생활임금을 받는 주 40시간 노동의 권리다. 우리가 요구하는 바는 우리 시간에 대한 통제력을 요구하는 것이다. 40시간이 넘는 노동시간에 대해 'No'라고 말할 수 있는 권리, 주당 40시간 노동의 일부로서 보상을 받으면서 집에서 다음 세대를 양육할 시간을 가질 권리다. … 금융 자본가들과 고용주들은 어떤 책임도 지지 않으면서 다운사이징, 하청, 아웃소싱, 일시적이고 불안정적인 노동을 이용하여 우리에게서 거대한 부를 쥐어짜고 있다. 우리는 점점 더 긴 시간을 노동하고 있고 그로 인해 부상과 직업적 질병이 초래된다. 의료적 치료, 보상, 휴식과 회복에 대한 우리의 인권은 점점 더 침해당하고 있다. 이러한 노동착취 체제는 우리가 직업 외에 하는 일, 예를 들어 아이를 기르는 일 같은 고된 노동에 대해 보상하고 있지 않다. 이는 우리의 자유와 삶을 강탈하며, 우리를 사용하고 버릴 수 있는 기계로 바꿔놓고 있다.”(노동착취공장에 저항하는 전국행동 The National Mobilization Against Sweatshops 성명 중에서)
외국의 한 웹사이트에서 본 문구이다. 이들의 캠페인이 장기 목표로 내세우고 있는 것 중에는 시간에 대한 통제를 기반으로 하여 인간의 잠재성의 증진을 최우선으로 삼는 새로운 가치를 가진 문화를 창조하는 것, 어머니의 노동을 포함하여 여성의 노동을 인정하고 지지하는 것 등이 들어있다.
여기서 우리는 휴식과 여가의 권리란 것이 단지 일을 했으니까 ‘쉰다’, 다음 노동을 위해 ‘준비’한다는 의미가 아니란 걸 알 수 있다. 노동시간의 제한을 둘러싼 투쟁은 노동자 편에서는 노동착취를 깨려는 투쟁이고 자본가 편에서는 더 많은 이윤을 취하려는 투쟁이다. 노동절의 유래도 하루 8시간 노동을 쟁취하기 위한 파업에서 유래됐고 많은 생명과 자유가 희생됐다는 건 잘 알려져 있다.
앞서 살펴봤듯이 오늘날 노동권의 처지가 열악하다보니 노동과 연계된 휴식과 여가의 처지도 딱할 수밖에 없다. 한국에서는 주 40시간 노동을 도입하고도 전체 노동시간이 줄지 않고 있다 한다. 그 이유는 임금이 너무 낮기 때문이다. 노동시간이 줄어든다는 게 진짜 휴식과 여가의 의미를 가지려면 임금이 보전되는 시간단축이어야 한다. ILO 협약 중 주 40시간 관련 규정에는 생활수준 저하를 동반하지 않은 주 40시간 노동을 말하고 있다. 즉 임금을 줄이지 말라는 것이다. 그런데 사측은 시간과 함께 임금을 줄이려 들고 노동을 둘러싼 환경이 열악한 상황에서는 사실상 임금이 삭감된다. 그래서 노동자들은 줄어든 임금을 보충하기 위해 사실상 더 많이 일할 수밖에 없다. 소위 ‘자발적’으로 장시간 노동을 하게 되는 것이다. 잔업이다 특근이다 해서 제 몸 망가지는 줄 모르고 일을 한다. 다른 나라에 비해 기본급 수준이 엄청 낮을뿐더러 간접임금이라 할 사회보장 수준도 열악하다. 그러니 더 오랜 시간 일을 해서 수당으로 부족한 부분을 채워야 하는 것이다. 세계인권선언을 만들면서 노동자의 휴식과 여가의 권리가 어떤 방식으로 이행되느냐에 대한 다양한 의견이 있었다. 선언에서 이를 모두 포함시킬 수는 없었기에 “휴식과 여가에 관한 권리”라는 말만 남게 된다. 하지만 단 하나의 조건, “유급”이라는 것은 반드시 포함돼야 했다. 임금 없는 휴식의 권리는 아무 의미가 없다는 의미였다. 선언에 쓰여 있지는 않지만 그 배경 토론에서는 휴식이 갖춰야 할 도덕적 요구가 있었다. 자본의 ‘강탈’에 의해 왜곡되지 않는 휴식, 외국인이나 사회취약계층을 배제하지 않는 휴식, 휴식이 요구될 때 사회의 잘못되고 불충분한 여건으로 인해 왜곡되지 않는 휴식이다. 세계인권선언에 노동권 조항이 만들어질 당시에 노동자들이 유엔에 제출했다는 비망록에는 노동조합의 기반을 파괴하려는 시도들에 대한 성토가 가득 담겼다고 한다. ‘노조의 모임 장소를 대여할 수 없게 한다’, ‘단체협약을 맺는 것이 불가능하다’, ‘노동자에게 강요된 불의를 고칠 수단이 없다’ 등, 정말 어디서 많이 듣던 소리 아닌가? 세계인권선언의 노동권 조항은 노동자들 손아귀에 잡힐 때를 아직도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