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조 1. 모든 사람은 식량, 의복, 주택, 의료, 필수적인 사회서비스를 포함하여 자신과 가족의 건강과 안녕에 적절한 생활수준을 누릴 권리를 가지며, 실업, 질병, 장애, 배우자와의 사별, 노령, 그 밖의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서의 다른 생계결핍의 경우 사회보장을 누릴 권리를 가진다.
2. 모자는 특별한 보살핌과 도움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 모든 어린이는 부모의 혼인여부에 관계없이 동등한 사회적 보호를 향유한다.

‘적절한 생활수준’이란 언뜻 보기에 알 듯 말 듯 한 기준이다. 사법부나 정책입안자들은 ‘적절한 생활수준’의 개념을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정의하기 어려우니 권리로 보기 힘들다는 말부터 꺼내려 든다. 하지만 부모의 눈에는 자녀에게 적절한 먹을 것이 어떤 것인지가 구체적으로 떠오를 것이다. 마찬가지로 병치레를 해보거나 병원을 이용해본 사람에게는 적절한 의료가, 학교를 다녀본 사람에겐 적절한 교육이, 지하주거와 전세난과 셋방살이를 겪어본 사람에겐 적절한 주거가 무엇인지가 구체적으로 다가올 것이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생의 중요한 단계마다 인간다운 삶을 위해 반드시 있어야 할 것이 있다. 가능한 건강하게 오래 살 수 있으려면, 수치심이나 불합리한 장벽 없이 사람들과 어울려 살 수 있으려면, 구걸·성매매·강제노동이나 채무노동 같은 방법에 의존하지 않고 삶의 기본적 필요를 충족시킬 수 있으려면 인간생활에 갖춰야 할 근본적인 ‘무엇’이 있다. 이 ‘무엇’은 물질적인 재화와 서비스만이 아니라 인간의 감정과 정신활동에 관련된 것을 포함한다. 이 ‘무엇’을 국제인권법에서는 ‘적절한 생활수준을 누릴 권리’로 표현했다. 세계인권선언 25조는 “식량, 의복, 주택, 의료, 필수적인 사회서비스를 포함하여 자신과 가족의 건강과 안녕에 적합한”이고, 유엔경제·사회·문화적 권리협약 11조에서는 “식량, 의복 및 주택을 포함하여 적절한”이다. 아동권리협약에서는 “아동의 신체적·지적·정신적·도덕적 및 사회적 발달에 적합한 생활수준”이라 했다.

적절성의 의미

‘적절성’을 양적인 지표로 나타낸 예는 많다. ‘하루 몇 칼로리의 영양소가 어린이와 성인에게 요구된다’, ‘1인당 몇 평의 주거공간이 있어야 한다’, ‘기본적인 생활을 위해 얼마 이상의 소득이 있어야 한다’는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이런 양적지표에는 담기지 못하는 것이 많다. 어떤 사람들이 특히 취약하고 차별받고 있는지, 문화적으로 환경적으로 적절한 의식주는 무엇인지, 권리 당사자의 참여가 보장되고 있는지 등을 다루기는 어렵다. 하루 1달러 미만의 소득으로 살아가는 인구가 세계인구의 20%에 달한다는 식의 통계는 빈곤이 광범위하다는 것을 말해줄 뿐 왜 그 사람들이 가난하게 되었는지, 그 사람들의 존엄한 삶에 필수적인 무엇이 결핍되어 있는지를 말해주지 않는다. 그래서 국제사회에서는 양적지표만이 아니라 적절한 생활수준의 질적인 측면을 구체화할 필요성이 제기됐다. 그 결과 주거, 식량, 물에 대한 권리 등 각각에 대하여 ‘적절성’에 대한 상세한 개념 정의가 많이 진전됐다. 이들을 종합해보면 ‘적절한 생활수준에 대한 권리’에서 ‘적절성’의 의미는 ‘경제적·물리적·정보적 접근성, 지속가능성, 차별금지, 안정성, 가용성, 문화적 수용성, 국가의 책임성’ 등이다.

적절성의 대표적 요소는 감당할 만한 비용으로 필수적인 생활요소에 접근 가능해야 한다는 것이다. 가령 주거는 생활의 중요한 부분이고 비용도 꽤 많이 차지한다. 그러나 사람은 주거만으로는 살 수 없다. 밥도 먹어야 하고 옷도 낡으면 새로 사 입어야 하며 아프면 치료를 받아야 하고 아이들은 기본적인 교육을 받아야 한다. 집에 너무 많은 돈을 쓰게 되면 다른 곳에 꼭 써야 할 돈을 쓰지 못하게 되어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다. 따라서 주거비용은 개인의 기본적 욕구가 위협당하지 않을 수 있는 수준이어야 한다. 식비, 의료비, 교육비도 마찬가지다. 아랫돌 빼서 윗돌 막고 윗돌 빼서 아랫돌 막는 식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중 어느 하나에 관련된 비용이 다른 기본적 필수품의 획득 및 충족을 위협하거나 제한하지 않을 정도의 수준이어야 한다.

비용이 경제적 측면의 접근성을 얘기하는 거라면, 다른 차원의 접근성도 고려해야 한다. 누구나 고용기회, 의료, 교육 등 필수적인 서비스와 편의시설 등에 접근 가능한 곳에서 살 수 있어야 한다. 차별 없는 접근성도 중요하다. 독립생활을 하는 장애인들은 하나같이 집구하는 것의 어려움을 얘기한다. 비용도 문제고 휠체어를 사용하는 장애인의 경우 편의시설 접근성도 문제지만 집주인들이 장애인이라고 하면 임대를 거절한다는 것이다. 장애인이 혼자 살다가 무슨 문제가 생기면 책임질 수 없다거나 편의시설을 집에 갖추기 위해 약간의 개량을 하는 것조차 꺼려하기 때문이란다. 물리적 접근성 뿐 아니라 차별 없는 접근성은 적절성이 갖춰야 할 대표적 요소이다.

지속가능성이 담보되어야 적절성에 부합

적절성은 당장의 편리만을 생각해선 안 된다. 여기서 나온 개념이 ‘지속가능성’이다. 가령 식량권에서 지속가능성을 생각해보자. 현 세대 만이 아니라 미래 세대에게도 식량권은 중요하다. 당장의 먹을거리를 증산하기 위하여 화학비료를 남발하고, 자유무역과 단일품종, 유전자조작식품 등에 의존하는 체제는 식량권의 지속가능성과는 거리가 멀다. 그래서 세계의 농민들이 들고 나온 개념이 ‘식량주권’이다. ‘식량주권’이란 먹을 것에 대한 권리와 먹을 것을 생산할 권리 둘 다를 포함하는 것이다. 먹을 것에 대한 권리, 즉 식량권이 기본적 인권이라면, 그 식량을 어떻게 얼마만큼 생산하느냐는 정책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어야 하고, 식량 생산을 위한 자원을 스스로 관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그를 통해 문화적 다양성과 환경을 보존하며 초국적 기업농의 유전자 조작 식품과 단일품종, 종자약탈 등의 횡포로부터 벗어나자는 것이다.

적절성의 또 다른 요소는 안정성 또는 안전성이다. 가령 주거권의 경우에 집달리라는 것이 있다. 빚을 못 갚거나 한 사람을 살던 곳에서 내모는 일을 집행하는 사람을 일컫는다. 새벽에 들이닥쳐서 잠에 취한 사람을 엉겁결에 내쫓거나 사람이 일 나가서 없을 때 집을 때려 부수기도 한다. 어떤 조건에서건 갑자기 쫓겨나거나 철거되거나, 그 집에 살 수 없도록 강한 협박과 폭력에 시달리는 경우가 있어서는 안 된다. 갑작스럽게 거주공간을 빼앗기거나 퇴거의 위협을 받는 경우 국가는 피해자들을 보호하는 조치를 취해야 한다.

식량권의 경우에는 안전성이라 하면 일단 해로운 물질이 없어야 하는 게 당연하다. 식량이 불순물 및 불량한 환경위생이나 여러 단계의 공급과정 중의 부적절한 취급으로 인하여 오염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식량안보 및 일련의 보호조치를 취해야 한다. 뻔히 위험한 줄 알면서 무역보복 등을 이유로 특정식품의 소비를 강제하는 일 같은 건 있어선 안 된다. 당장의 해로운 물질 뿐 아니라 장기적인 식품 안정성도 고려해야 한다. 앞서 말한 지속가능성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적절한 식량권을 보장받기 어렵다.

가용성은 충분한 양으로 확보해 이용 가능해야 한다는 것이다. 건강권의 경우에는 보건의료자원뿐 아니라 안전한 식수, 적절한 위생시설, 작업시간 사이에 적절한 휴식시간의 보장, 쾌적하게 쉴 수 있는 주거환경 등 건강결정요인이 가용성에 다 포함된다. 주거권의 경우에는 주거 공간이 생활을 할 만한 것이어야 한다. 그러려면 생활에 필요한 필수 시설이 갖추어져 있어야 한다. 집에는 안전하게 마실 물과, 요리와 난방, 조명을 위한 에너지가 있어야 한다. 또 위생을 유지하기 위한 욕실과 세탁 시설, 쓰레기와 하수를 처리할 수 있는 시설, 소방시설 등 비상서비스에 대한 접근성도 있어야 한다.

온 세상 사람들이 적절한 생활수준에 대한 권리를 누려야 하지만 똑같은 것을 먹고 입고 똑같은 집에서 잔다는 의미는 아니다. 두루미와 여우 이야기가 있다. 서로를 식사에 초대하는데 여우는 넓적한 접시에 음식을 내놓는다. 두루미의 긴 부리로는 접시에 담긴 음식을 먹을 수가 없었다. 반대로 두루미가 여우를 초대했을 때는 긴 호리병에 음식을 담아 내놓는다. 두루미는 부리로 음식을 먹을 수 있었지만 여우는 주둥이를 호리병에 넣을 수가 없어 먹을 수가 없었다. 문화적 수용성은 이런 것이다.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 문화의 사람에게 삼겹살을 주면서 먹으라고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생활에 필수적인 요소의 문화적 적절성과 다양성의 보존도 적절성의 중요 요소다. 가령 ‘아파트 숲’은 서울 등 대다수 도시의 당연한 풍경으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주거형태에 있어 다양성이 이처럼 무섭게 소멸되어가고 있는 마당에, 그나마 남은 미개발 구역조차 언제 개발논리에 의해 쓰러질지 모를 일이다. ‘한양주택’ 같은 예쁜 마을이 그린벨트 해제와 뉴타운사업계획으로 무차별 개발된 것이 대표적 침해사례라 할 수 있다.

국가의 책임성과 의무

‘적절한 생활수준에 대한 권리’가 의미를 가지려면 국가가 각 권리의 구성요소를 입법적으로 인정하고 정책으로 드러내는 일련의 조치들을 취해야 한다. 국제사회는 이런 국가의 의무를 측정하고 평가하기 위해 ‘최소한의 핵심의무’와 ‘존중·보호·실현의 의무’라는 개념을 만들었다.

최소핵심의무는 국가의 가용자원의 양 혹은 다른 어떤 요소와 어려움에 상관없이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의무이다. 여기에는 필수적인 식량, 기초의료, 기본적인 주거와 초등교육 등이 해당한다. 가령 물에 대한 권리의 경우에는 어떤 경우에도 물 공급을 끊어버려서는 안된다는 것, 주거권의 경우에는 강제철거로부터의 보호 등이 최소핵심의무의 예이다.

가령 단전단수의 문제를 생각해볼 수 있다. 돈을 못낸다고 해서 전기와 수도를 끊어버린다. 그래서 한겨울에 난방도 못하고 촛불을 켜고 살다가 화재를 당했다는 뉴스가 심심찮게 있고, 세수와 세탁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을 만들어버린다. 끊어버리는 것 말고 분명 다른 조치를 취할 수 있는 방법이 한국의 경제수준에서 과연 불가능한 것이고 자원이 그정도로 부족한 것일까. 독일에서 몇 년을 난민으로 산 친구가 있다. 난민으로서 받는 최저생계비와 간단한 아르바이트로 근근이 살아가던 그 친구에게는 어린 딸이 있었다. 어른은 그럭저럭 겨울 추위를 버텨냈지만, 어린 아기는 계속 감기에 시달렸다. 부부는 아기 때문에 어쩔 수없이 전기스토브를 켰다. 전기비가 생활수준에 비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나왔다. 당국에 설명을 했다. 우리 소득 수준은 이렇지만 아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했다. 그러자 당국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인 걸 이해하고 전기요금을 감면해줬다.

한국과 독일보다 경제사정이 열악한 국가들의 상황에서는 어떨까. 이런 국가들의 최소핵심의무에는 이런 사례가 있다. 모든 아동은 무국적을 방지하고 사회속의 신분을 획득할 수 있도록 출생과 동시에 이름과 국적을 가질 권리가 있다. 이를 위해서는 출생신고가 돼야 한다. 그런데 행정망이 발달하지 않은 가난한 국가들은 이런 등록의 의무를 방치한다. 가령 당장에 동네마다 동사무소 같은 걸 만들 돈이 없으니까 어쩔 수 없다는 식이다. 사회적으로 어떤 신분도 없는 존재인 이들 아동은 인신매매의 표적이 되거나 착취적인 노동에 시달리거나 교육에 접근할 수 없는 등의 인권침해 위험성이 크다. 이에 대해 유엔아동권리위원회는 최소핵심의무를 위반했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방법으로 제시한 것은 이렇다. 당장의 자원의 부족 때문에 이름과 국적을 가질 아동의 기본적인 권리를 침해해서는 안된다. 당장 동사무소를 지을 돈은 없을지라도 지금의 경제형편에서라도 트럭 몇 대는 갖출 수 있지 않은가. 자력으로 안되면 국제사회의 원조를 받을 수도 있다. 트럭에 이동사무소를 설치하여 방방곡곡을 돌면서 아동의 신분등록을 받으면 인신매매나 아동노동 등 이차적인 아동에 대한 인권침해를 막을 수 있다고 했다. 최소핵심의무란 건 이런 것이다.

국가에 지워진 인권의 존중·보호·실현의 의무

적절한 생활수준에 대한 국가의 의무를 더 구체화한 기준이 존중·보호·실현의 의무다. 존중의 의무란 국가가 직접 인권을 침해해서는 안되고 인권을 누리는 데 방해요소를 만들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가령 비정규직의 확대를 꾀하는 법을 만들고 통과시키는 일은 노동권과 차별받지 않을 권리를 침해하며 고의적으로 인권을 후퇴시키는 조치에 해당한다. 보호의 의무란 국가가 인권을 존중할 뿐 아니라 제3자(가령 기업)에 의해서도 인권침해가 일어나지 않도록 할 의무이다. 가령 가정에서 벌어지는 아동학대에 대해서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는 일, 고리대금업자가 폭력과 위협을 행사하도록 내버려 두는 일, 기업이 산업안전조치를 취하지 않거나 노동자를 함부로 해고하게 내버려 두는 일 등은 보호의 의무위반에 해당한다. 실현의 의무란 국가가 인권의 충분한 실현과 향상을 위한 목표를 설정해야 하고, 그것의 실현을 위해 합리적으로 계획된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법률·행정·예산·사법조치가 모두 포함된다. 그리고 그 성취의 결과에 대해서도 따져봐야 한다. 의무가 이행되지 않았을 때에는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경우인지를 국가가 증명할 책임도 있다. 예를 들어 태풍 때문에 교육기관이 일시적으로 문을 닫았다면 국가의 통제를 벗어난 경우인 반면, 적절한 대책 없이 가장 취약한 사람들에 대한 의료보호체계를 축소했다면 의무 이행의 의지가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주거권을 사례로 존중·보호·실현의 의무를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강제퇴거와 철거는 존중의 의무 위반

방글라데시의 한 도시에서는 사전 예고 없이 비공식 거주민들이 쫓겨났고, 그들의 집은 불도저로 철거됐다. 이에 대해 인권단체와 주민들이 소송을 제기했다. 대법원은 비공식 거주민들은 불운과 자연재해의 피해자이며 고용기회·식량·주거가 빈곤한 농촌지역에서 이주한 사람들이라는 점을 인정했다. 또한 빈민지역 거주자들이 국가 경제에 상당히 기여했음을 인정했다. 이에 다음과 같이 명령했다.
“정부는 빈민지역 거주민들의 재정착을 위한 정책 지침을 개발해야 한다.
철거는 대안적 주거를 찾을 수 있는 사람의 능력에 따라서 그런 능력이 갖춰진 단계에서 허용되도록 해야 한다.
철거 전에 합리적인 시간이 주어져야 한다.
안전상의 이유로 철로변과 도로변의 빈민촌이 정화돼야 한다할지라도, 거주민들은 정책지침에 따라 다른 곳에 재정착할 수 있어야 한다.”

적절한 주거권에 대한 존중의 의무는 국가와 그 기관이 단독으로나 제3자와 결합하여, 주거·서비스·관련된 물질과 자원에 대한 권리를 침해하거나 접근을 가로막는 여하한 관행, 정책, 법적 조치를 수행하거나 지원 또는 관용하는 일을 삼가는 것이다. 평등하고 비차별적인 원칙에 기반하는 주거권에 대한 존중의 의무는 국가가 불리한 상황에서 살아가는 집단을 특별히 고려하여 그들에게 정당한 우선순위를 두는 것을 포함한다. 이같은 존중의 의무에서 가장 분명한 침해에 해당하는 사례는 강제 퇴거와 철거이다.

보호; 인권침해를 방지할 국가의 의무

아프리카 인간과 인민의 권리 위원회(the African Commission on Human and Peoples' Rights)는 오고니족(나이지리아의 소수민족)의 땅에서 다국적 석유회사와 나이지리아 국영기업이 석유채취와 관련하여 저지른 각종 인권침해에 대한 인권단체의 제소에 대해 다음과 같이 결정했다.
“석유채취 활동을 모니터하지 않았고, 의사결정에 지역사회를 참여시키지 않음으로 인해 착취(외국의 경제 착취를 포함하여)로부터 거주민을 보호할 국가의 의무를 위반했다. 또한 부와 천연 자원의 박탈로부터 보호할 의무를 위반했고, 석유착취에 대해 지역민에게 물질적 혜택을 제공하지 않은 것 또한 침해이다. 주거권과 강제철거로부터 보호받을 권리가 주거파괴와 주민에 대한 괴롭힘으로 침해됐다. 이에 위원회는 오고니족에 대한 공격을 중단할 것, 책임자를 조사하고 기소할 것, 피해자에 대한 보상을 제공할 것, 장차 환경영향평가 및 사회적 영향 평가를 분비할 것, 건강과 환경적 위험에 대한 정보를 제공할 것을 나이지리아 정부에 명령한다.”

적절한 주거권에 대한 보호의 의무는 국가 자신, 개인들, 사적인 주체, 여타의 비국가 행위자들에 의해 저질러지는 주거권 침해를 국가와 그 기관이 방지하는 것이다. 주거권 침해에 대해서는 조사가 이뤄져야 하고, 침해자들을 기소하고, 법적 및 기타의 구제가 피해자들에게 제공돼야 한다.

실현; '제공'과 '촉진'의 의무

남아공 헌법재판소는 국가의 주거권 실현의무에 대해 이런 결정을 내린바 있다.
“국가는 입법적 및 기타의 조치를 취할 필요가 있다. 입법 조치 그 자체만으로는 헌법의 준수라 할 수 없다. 단순한 입법만으론 충분치 않다. 국가는 의도된 결과를 성취하기 위해 행동할 의무가 있고, 행정부는 적절하고 잘 짜여진 정책과 프로그램으로 당연히 입법조치를 지원해야 한다. 이런 정책과 프로그램은 개념으로나 이행으로나 합리적이어야 한다. 프로그램의 형성은 국가의 의무 실현의 첫단계일 뿐이다. 프로그램은 합리적으로 이행돼야 한다.
일련의 조치들이 합리적인가를 판단하는데 있어서, 사회적·경제적·역사적 맥락에서 주거문제를 고려하고, 프로그램 이행에 책임을 지는 기관의 능력을 고려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프로그램은 균형 있고 유연한 것이어야 하며, 주거 위기와 단기 및 중장기적 기간의 필요에 유념하여 적합한 제공을 해야 한다. 사회의 상당 계층을 배제하는 프로그램은 합리적이라 할 수 없다. 조건은 정적인 채로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기에 프로그램은 지속적인 검토를 필요로 한다.”

실현의 의무는 ‘제공’의 의무와 ‘촉진’의 의무로 생각할 수 있다. 어떤 개인이나 집단이 그들이 통제할 수 없는 이유로 인해 자신들이 가진 수단으로는 적절한 주거권을 향유할 수 없을 때에 정부는 주거권을 직접적으로 제공할 의무가 있다. 이를 위해서는 현재의 주거정책과 프로그램에서 주거취약계층에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 또한 국가는 적절한 주거권을 보장하기 위한 자원과 수단에 대한 접근과 이용을 강화하기 위하여 사전 대책을 강구하여 의도적인 활동을 기울여야 한다.

인권에 기반을 둔 접근이란?

어렸을 즉 읽은 얘기다. 한 백인 중산층 소녀가 빈민가에 사는 친구 집에 놀러갔다. 자기가 사는 곳과는 너무 다른 환경에 소녀는 충격을 받았다. 그 집은 거의 동물우리같은 수준이었고 친구의 아픈 엄마는 치료도 못받고 침대에 누워만 있었다. 소녀는 제 딴에 최선을 다해 생각해낸 것이 “사회보장 급여를 받을 수 있도록 제가 부모님께 말씀드려 신청해 볼게요”였다. 그런데 그 말을 들은 친구의 엄마는 눈물을 흘리며 반대했다. “싫어요. 우리 형편이 어렵기는 하지만 그런 걸 받아야 할 만큼 비참하지는 않아요.”였다.
난 이해가 안됐다. 사회보장 급여를 받는 게 왜 싫다는 거지? 그런데 곧 그 심정을 이해하게 됐다. 온갖 낙인을 감수하면서 쥐꼬리만한 도움을 받느니 자존감을 지키고 싶다는 심정 말이다. 내가 6학년 때의 일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학교에서는 불우이웃돕기 성금이라는 명목으로 돈을 걷는다. 보통은 그렇게 걷은 돈을 양로원 등에 보내곤 했는데 그 해에는 우리 반에서 제일 형편이 어려운 아이를 남녀 한명씩 골라 성금을 처리한다고 했다. 제일 형편이 어려운 친구는 반 아이들이 추천했다. 모두가 있는 교실에서 ‘쟤요, 쟤요’라고 지목하는 식으로 하는 추천이었다. 여학생 중에 추천된 건 나였다. 그래서 반 아이들이 모두 보는 앞에서 불려나가 공책과 연필, 뭐 그런 것들을 ‘친구들의 마음의 선물’이란 말과 함께 담임선생님께 받았다. 그런데 하나도 고맙지가 않았다. 그날 이후 하교길에 같이 다니던 친구들이 나를 멀리했다. 나도 같이 가는데 달갑지 않고 혼자인 게 맘 편했다. 난 가난하니까 구제받아야 할 아이로 완전히 찍힌 거였다.

적절한 생활수준에 대한 권리는 물질만으로 채워지는 것이 아니다. 공책 몇 권을 주는 것이 아니라 차별과 배제를 느끼지 않고 학교에 다닐 수 있는 환경이 초등학교 6학년 여자아이에게 요구되는 것이었다. 자선이 아닌 권리라는 데 핵심이 있다. 권리의 핵심은 존엄성을 해치지 않고 존엄성을 발전시킬 기본 역량을 강화하는 것이다. 그것들이 발휘되지 못한다면 도대체가 인간의 삶이라고 할 수 없을 그런 최소한의 기본적 역량의 발휘는 무조건적으로 보장되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권리이다. 이걸 목록으로 표현한 것이 적절한 생활수준에 대한 권리이다.
적절한 생활수준에 들어가는 목록은 역사적으로 변해왔다. 옛날에 ‘빵과 자유를 달라’ 했을 때는 정말 빵만을 생각했다면, 주거, 의료, 교육 식으로 적절한 생활의 요소는 강화되어 왔을 것이다. 오늘날에는 물에 대한 권리, 공공운송, 문화적 시설 등이 떠오르고 있다. 문제는 이런 것들을 어떤 방식으로 해결하느냐이다. 한국 같은 곳에서는 자력구제의 성격이 강하다. 따라서 노동자들이 임금인상 투쟁을 할 때 그걸 그냥 ‘임금’으로만 봐서는 안된다. 사회적으로 적절한 생활수준의 권리를 뒷받침해주는 것이 부족하기에 노동자들은 ‘임금’으로 적절한 생활수준을 해결봐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임금으로 적절성을 해결 보는 것은 대다수 노동자에게 어림없는 일일뿐더러 사회보장의 의미도 퇴색된다.

사회보장에 대한 시각과 그걸 보장하는 방법은 사회에 따라 아주 다르다. 어떤 사회에서는 자력으로 생존에 실패한 사람들이 구차하게 받아야 하는 것으로 여겨지고, 어떤 사회에서는 그 사회에 거주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보편적으로 누릴 수 있는 공기 같은 것이다. 적절한 생활수준을 어떻게 확보하느냐에 따라 그 사회의 인권수준이 드러난다. 되는 사람은 임금을 통해 해결하고 노동에서 밀려난 사람들을 잔여적으로 처리하는 방식이냐, 사회적 연대의 정신에서 필수적인 것을 같이 해결하느냐는 그 철학과 접근 방식이 아주 다를 수밖에 없다.

‘인권에 기반한 접근’이란 이런 문제의식에서 나온 개념이다. 기존의 경제발전구조에 덤으로 사회적 지출을 덧붙인다는 의미가 아니다. 발전계획 자체에 인권을 중심요소로 앉히는 것을 의미한다. 경제발전이 중요하지 않은 게 아니라 적극적인 경제·사회·정치정책이 있지 않으면 권리는 결코 보장되지 않는다. 발전의 핵심 목적은 가장 소외되고 취약한 사회구성원의 역량강화이다. 결과만이 아니라 과정을 강조한다. 인권을 발전에 추가요소로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발전정책의 발판으로 여기는 것이다.

인민이 권력과 역량을 가져야

핵심은 자선에 반대하고 인민이 권력과 역량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설문조사식의 형식적 참여가 아니라 능동적이고 자유롭고 의미있는 참여가 가능해야 한다. 의미있는 참여란 결정과정에 참여하고 그 결정의 결과에 같이 책임을 진다는 것이다. 가령 거주지에서 밀려나 이주비 보조를 받는 수준이 아니라 부동산정책과 개발계획에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한다. 인권영향평가가 모든 발전계획, 정책, 예산, 프로그램에 적용될 것을 요구해야 하고, 경제지표만이 아니라 불평등지표, 빈곤지표, 성평등관련지표 등이 측정과 평가항목이 돼야 한다. 적절한 생활수준에 대한 권리는 사회적으로 생산된 잉여의 재화를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니라 부족한 재화라도 그것을 정의롭게 분배하는 차원과 관련된 문제이다. 그리고 기본권의 실현은 평등하게 권리를 가진 사람들의 자율성을 활성화하는 것과 병행되는 과정이다.

적절한 생활수준에 대한 권리에 대한 흔한 오해 중의 하나는 복지예산을 늘리면 된다는 것이다. 물론 절대적인 투입의 양을 늘리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인간의 존엄성과 자율성을 고려하지 않을 때는 복지반대론자들이 걸핏하면 입에 올리는 ‘거지근성이다, 밑빠진 독에 물붓기다’식의 문제만 눈에 띄게 될 것이다. 인권에 기반한 접근은 ‘단지 더 많은 재화와 서비스를 얻으면 된다, 단순히 사회보장, 교육, 의료에 들어가는 지출을 늘리면 된다’는 식의 해결방식을 넘어설 것을 요구한다. 지출만 늘린다고 되는 문제가 아니라 그 권리의 당사자가 얼마나 참여하여 진정한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는지, 스스로의 삶의 주인이 될 수 있는지가 중요하다. 발전활동이 자동적으로 인권존중을 증진시키지 않고, 단지 건강, 교육 등의 지출로 인해 증진되지 않는다. 인권에 기반을 두지 않는 경제발전정책은 힘들게 생산한 부가 편중·낭비되고, 특정집단이 오히려 차별받는 것으로 잘못 수행될 수 있다. 불평등은 지구적 아파르트헤이트(인종분리차별정책)라 불린다. 국내에서도 불평등의 심화는 ‘신인종분리정책’이라 볼 수 있다.

이런 기준에 비추어 빈곤을 다시 생각해보자. 얼마 전까지도 해도 빈곤은 최소한의 재화와 서비스를 구매하기에 불충분한 소득으로 정의됐다. 오늘날에는 존엄하게 살 수 있는 기본적 역량(capabilities)의 결여로 이해된다. 빈곤은 굶주림, 빈약한 교육, 차별, 취약성, 사회적 배제와 같은 특성을 갖고 있다. 세계인권선언 등의 시각으로 볼 때 빈곤은 적절한 생활수준에 대한 권리 뿐 아니라 여타의 인권을 누리는 데 필수적인 자원, 능력, 선택, 안전 및 권력을 지속적이거나 만성적으로 박탈당한 인간 상황으로 정의될 수 있다. 따라서 단순히 소득만 늘리거나 소비할 수 있는 재화와 서비스의 양만 늘리는 방식의 접근이 아니라 비차별과 평등 원칙의 강화, 빈민 당사자의 참여, 국가책임성의 구체화 같은 것이 고려돼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