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조 1. 모든 사람은 교육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 교육은 최소한 초등기초단계에서는 무상이어야 한다. 초등교육은 의무적이어야 한다. 기술교육과 직업교육은 일반적으로 이용할 수 있어야 하며, 고등교육도 능력에 따라 모든 사람에게 평등하게 개방되어야 한다.
2. 교육은 인격의 완전한 발전과 인권 및 기본적 자유에 대한 존중의 강화를 목표로 하여야 한다. 교육은 모든 국가들과 인종적 또는 종교적 집단간에 있어서 이해, 관용 및 친선을 증진시키고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유엔의 활동을 촉진시켜야 한다.
3. 부모는 자녀에게 제공되는 교육의 종류를 선택함에 있어서 우선권을 가진다.

자명한 권리, 지키지 않는 약속

26조의 대전제는 교육 그 자체가 보편적인 권리라는 것이다. “모든 사람은 교육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는 것에 대해 어떤 국가도 반대를 표명할 이유가 없었다. 너무 자명한 것이었기에 별다른 토론이 없었고, 모든 대표자들의 동의를 받았다.
예를 들어 브라질 대표는 “모든 사람의 교육에 대한 권리는 논란의 여지가 없는 명백한 것”이라며 “인류의 유산을 공유할 권리는 우리 문명의 기초를 형성했고 그 누구에게도 부인될 수 없었다. 교육 없이는 개인이 자신의 인격을 발전시킬 수 없었고, 이 인격은 인간 생활의 목적이자 가장 견고한 사회의 기초”라 했다. 파나마 대표는 “교육에 대한 권리 같은 기초적인 인권이 세계인권선언에 포함되지 않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라는 지지를 보였다. 현실적으로도 당시 40여개 국의 헌법이 무상의무교육의 원칙을 규정하고 있었기에 교육권이 보편적 인권이라는 것에 의심이 없었다.

고용최저연령에 도달하지 않은 아동에 대한 교육은 무상이고 의무여야 한다는 규범에 대한 국제적 합의는 선언 보다 훨씬 이전인 1921년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당시에는 14세 미만 아동 노동 철폐를 얘기했다면 오늘날의 기준은 18세 미만으로 옮겨졌다.

그러나 이렇게 오래되고 확고한 약속인 교육권은 날로 위태로워지고 있다. 말로만 보편적 인권으로서의 교육을 외칠 뿐 정부와 국제사회가 실제로는 교육권 보장을 위한 의무를 지키지 않기 때문이다. 가난하다고 해서 대학에 갈 수 없는 것도 화가 나는데 가난하다고 해서 초등교육조차 위태로운 아이들이 늘어가는 일이 참을 수 없을 만큼 목격되고 있다. 자국에서 교육권을 잘 보장하고 있는 국가들이라고 해서 면죄부를 받을 수는 없다. 교육제도와 서비스를 소위 ‘수출’하고 있는 국가 정부들은 가난한 나라에서 교육을 인권으로 보장하는 데 반대한다. 인권으로서 공교육이 강화되면 자신들이 팔아먹을 상품에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돈을 빌려주는 은행 구실에 충실한 국제기구들도 마찬가지다. 국제무역의 규범에 충실한 상품으로서 교육을 다루고 싶어 하지, 보편적 인권으로서 교육을 고려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이런 태도는 대외 원조나 부채 구제에 대한 결정에서 잘 드러난다. 한 예로 세계은행이 교육에 대한 컨설팅을 해준답시고 500일간 쓴 비용이 그 나라에서 5천명의 교사를 고용하는 것과 같은 비용이었다는 보고가 있다. 그런데 그런 컨설팅을 통해 나온 조언이란 게 공적 서비스로서의 교육을 지지하는 것이 아님은 물론이다. 공교육을 강화하려면 교사의 확충이 중요한데 세계은행은 공공부문의 임금이 늘어나게 될 테니 그걸 하지 말라고 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교육을 빈곤을 줄이기 위한 도구라고 강조한다. 교육을 이런 식으로 도구화하는 것도 문제지만, 빈곤을 줄인다는 명목으로 교육의 양과 질을 국제금융기구와 은행에게 결정하게 한다. 그런 교육의 양과 질은 싼 노동력을 빠른 시간에 대량으로 만들어내는데 치중한다. 이런 식으로 교육이 시장의 상품, 경제의 규모와 효율성에 따라 조절되는 것, 싼 노동력을 빨리 만들어내는 것으로 치부된다면 교육이라는 이름에 걸맞을 수가 없다.

인권의 존중 강화가 교육의 목적

교육권이 필수적인 인권이란 데 반대의견이 없다 했지만, 문제는 무엇을 위한 무엇에 대한 교육인지에 대한 합의가 곤란하다는 것이었다. 각 국은 자신만의 고유 브랜드를 가진 교육을 선호했는데, 그것은 “도덕적 시민의 훈련”, “국가 윤리의 발전”, “조국애, 조국의 민주제도에 대한 사랑, 그것을 위해 투쟁한 이들에 대한 사랑” 등으로 표현됐다. 이중 어떤 것이 보편적인 시민 교육의 상이라고 정할 수도 없거니와 국가가 필요하다고 느끼면 무엇이든지 국민에게 주입하도록 내버려둘 수도 없었다. 국가 권력의 남용을 방지하기 위해서 교육을 지배하는 핵심원칙과 목적이 무엇인지를 대략이라도 써야할 필요성이 제안됐다. 그 결과가 2항에 담긴 교육의 정신이다.
26조 2항에 담긴 교육의 목적은 “인권과 기본적 자유에 대한 존중의 강화”이다. 여기에도 반대의 여지는 없었다. 세계인권선언 자체가 그러하지만 교육권 조항은 전쟁 경험의 영향이 크게 작용한 조항이었기 때문이다. 교육권 조항에서 전쟁 경험이라 함은 히틀러 체제하에서 독일 청소년에게 저질러진 세뇌(brainwashing)를 떠올린 것이다. 나치는 교육을 아주 강조하고 놀라울 정도로 잘 조직했지만, 그 체제하의 교육은 히틀러의 표현대로 “인종적 정서와 인종적 감정을 청소년의 본능과 지능으로 바꾸는 것”이었다. 고분고분하게 전쟁을 준비하고 전쟁에 몰두하도록 하는 것이 교육의 기능이었고 그 결과 파국을 맞았다. 따라서 ‘인권존중의 정신을 강화’하는 교육을 강조하는 것이 필요했다.
히틀러 체제에 대한 반감은 2항에서만이 아니라 3항의 부모의 선택권에서도 마찬가지로 작용했다. 3항에서 ‘부모는 자녀에게 제공되는 교육의 종류를 선택함에 있어서 우선권을 가진다’고 한 것은 나치체제가 국가 통제로 오염된 학교에 모든 아동을 등록하게 함으로써 부모의 권리를 강탈했다고 봤기 때문에 삽입한 것이다. 이런 배경에 대한 이해 없이 부모의 선택권을 더 비싸고 더 대학가기 좋은 학교에 보낼 수 있는 자유로 해석하는 것은 큰 오해이다. 여기서는 국가 권력의 남용을 반대한 것이지, 교육권의 공공성과 공적의무를 방기할 의도는 없었다.

교육은 ‘과정’이다. 이 과정 속에는 교육을 제공하는 사람, 교육을 받는 사람, 교육을 받는 사람에 대해 법적으로 책임지는 사람 등 다양하며 때론 서로 갈등·대립하는 교육 주체들이 포함돼 있다. 교육권의 역사는 이들 다양한 교육주체들의 이해관계 속에서 공정한 균형을 취하기 위한 시도로 이뤄져 왔다. 세계인권선언에서 교육권에 대한 의사결정은 국가와 부모 사이에 이뤄지는 것으로 돼있는데 이것은 아동이 교육권의 주체라는 개념이 자리 잡은 지금에는 구시대적인 것이다. 인권으로서의 교육권을 생각한다면 이들 관계 속에서 가장 약자의 처지에 있는 아동의 입장에서 생각할 것이 요구된다.

인권교육의 이상 담은 교육권

2항에 담긴 또다른 교육의 목적은 “인격의 완전한 발전”이다. 원래는 “인격의 신체적, 지적, 도덕적, 정신적 발전”으로 제안되었으나 몇 개의 수식어로 교육의 모든 목적을 요약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완전한 발전”으로 고쳐졌다. “모든 국가들과 인종적 또는 종교적 집단 간에 있어서 이해, 관용 및 친선의 증진”과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유엔의 활동을 촉진”시킨다는 목적은 ‘국제적 친선의 증진’이라는 단순한 표현에서 구체화된 것이다. 특히 유엔의 임무가 언급된 것은 ‘평화유지’라는 유엔의 목표 달성을 위해서는 교육받은 대중여론의 지지가 필요하다는 인식에서 나온 것이다.

이상의 교육의 목적을 정리하면 그것은 곧 인권교육의 이상이라 할 수 있다. 유엔은 인권교육에 대하여 “지식을 제공하는 것 이상이며, 모든 발달 단계에 속하는 사람과 모든 사회 계급의 사람들이 타인의 존엄성에 대한 존중을 배울 수 있고, 민주주의 사회에서 존중을 보장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는 포괄적인 전 생애 과정”이라 했다. 교육권을 보장할 의무가 있는 국가는 이러한 교육의 목적을 충족시키기에 충분한 질과 내용의 교육을 제공해야 한다.

인권교육을 흔히 ‘역량강화교육’이라고도 한다. 이에 대비되는 것은 ‘은행저축식 교육’이다. 은행저축식 교육개념에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것으로 여겨지는 사람들에 대해서 스스로 아는 것이 많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일방적으로 지식을 주는 것이다. 즉 학생은 무지하고 교사는 안다는 것이다. 이런 개념은 학생들이 스스로 배우며 학생들이 또한 교사를 교육하기도 한다는 측면을 무시한다. 또한 탐구 과정으로서의 교육과 지식을 무효로 한다.

반면 역량강화 교육은 ‘스스로 배우고 더불어 배운다’고 한다. 교육은 사람이 자신의 삶을 스스로 결정하고 자신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결정을 통제할 수 있는 역량을 증대시키는 과정이다. 여기서 지식은 억압적인 사회, 정치, 경제 조직의 유형을 이해하고 의문시할 수 있는 것이고, 비판적 의식을 획득하도록 자극하는 것이다. 비판적 의식을 통해 역량강화된 사람들은 억압적인 관계를 변화시킨다. 억압적이지 않은 새로운 방식으로 인간존엄성을 보호하고 증진할 수 있는 조직과 활동양식을 계획하고 발전시키는 능력을 추구한다.

역량강화 교육이 되어야

인종, 성별, 언어, 종교, 계급, 재산 등에 따른 차별 금지를 26조에서 구체적으로 열거하고 있지는 않다. 이미 세계인권선언 2조에 그런 규정이 있기 때문이다. 구체적 열거는 없더라도 교육에 있어 차별을 금지한다는 점은 분명하다. “모든 사람”이라는 표현이나 “일반적으로 이용할 수 있어야”하고 “평등하게 개방되어야”한다는 구절에서도 반복되는 점은 교육상의 차별금지이다.
교육에 대한 접근에서 차별을 정당화할 수 있는 요건이란 없다. 유일한 기준으로 언급된 것은 고등교육에서의 ‘능력(merit)’이다. 정부의 공식번역본에서 ‘능력’이라 쓰고 있지만, ‘장점’이라는 표현이 더 나을 듯하다. 여기서의 능력 내지 장점이란 특정 부문의 교육에 열중할 수 있는 관심이나 소질을 말하는 것이지 과도한 비용을 감당할 능력이나 천재 소리를 들을 만한 능력을 말하는 것은 분명 아니다.

한국에서는 요원한 무상 교육

의무교육의 전제조건은 ‘무상’이다. 무상교육이 아니라면 의무일 수 없다는 생각에서다. 무상이라는 전제에서 초등교육이 ‘의무’로 규정돼 있는 것이기에, 여기서 의무라 함은 국가가 무상교육을 보장할 의무를 말하는 것이고, 돈 걱정 없이 자녀를 학교에 보낼 수 있는 조건이 충족된 상태여야만 부모가 자녀에 대한 의무를 방임할 수 없다는 의미이다.
‘무상’에 대한 유엔사회권위원회의 해석은 수업료 등 직접적인 비용을 부과하는 것은 물론이고, 간접적인 부과, 예를 들어 의무적인 기부금, 상대적으로 비싼 교복 착용 등도 안된다는 것이다.

“최소한” 초등교육이 무상이어야 한다는 선언의 규정은 다른 단계의 교육에도 확장되는 원칙이다. 선언을 만들 때 초등교육만이 아니라 고등교육을 포함한 모든 교육이 무상이어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다. 그 근거는 무상이 아니라면 재능에 기초하여 교육에 평등한 접근권이 있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런 주장에 동의하면서도 각 국의 경제사정을 고려해야 했기에 최소로 합의한 것이 초등의무무상교육이었다.
세계 10위권이라는 경제력을 갖춘 한국 같은 나라에서 초등무상교육을 하는 것은 결코 자랑이 될 수 없다. 소득수준은 사교육비 지출과 비례하고 또한 학업성적과 비례하고 있다는 지적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사회경제적 불평등을 고치기 위한 교육이 불평등 유전의 원천이 되고 있는 것은 심각한 인권침해이다. 교육의 불평등을 염려하는 교육단체나 언론 은 한국이 대학교육까지 무상교육을 실현하는 일은 결코 불가능이 아니라고 얘기해왔다. 가령 GDP 대비 6%의 교육재정만 확보해도 초등학교에서 고등학교까지 교육비를 충당하고도 수조원이 남으며, 이것을 대학에 투자하면 무상교육의 ‘꿈은 이루어진다’고 했다. 한국이 중학교까지 달성했다는 무상교육도 진짜 의미의 무상 공교육이라 볼 수 없다. 법적으론 무상일지 모르나 실제로는 너무 많은 돈을 요구한다. 당사자가 사적으로 지불해야만 하는 교육비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한국의 사교육비 지출이 천문학적 수준이라는 것을 누구나 안다. 대학만이 아니라 무상교육단계에서부터 그렇다.

유엔 교육특별보고관은 이것을 “공교육의 민영화”(privatization of public education)라 비판했다. 거죽은 공교육일지 모르지만 속은 사교육비로 채워져 있기에 이런 교육을 공교육이라 부를 수는 없다고 했다. 사교육비를 지출하지 않는 학부모와 학생이 ‘맘 놓고’ 학교에 다닐 수 있는가 물어봤을 때, 그게 아니라면 교육은 권리가 아니라 돈 주고 사는 상품인 것이다.

교육의 자유

또하나 경계해야 할 것은 자유권과 사회권의 도식적 구분이다. 흔히들 26조에 있는 교육권을 사회권으로 분류한다. 세계인권선언의 전반부를 자유권으로, 22조부터의 후반부를 사회권으로 분류하는 것이다. 그러나 교육은 고도의 정신적 가치를 지닌다는 점에서 기본적인 정신적 자유권의 하나이다. 교육권은 정신적 자유권을 바탕으로 하면서 사회권적 요소를 지닌다. 사회권으로서의 교육권은 국가가 교육의 모든 단계에서 무상의 비종교적 공교육을 조직할 의무를 진다는 것이다.

근대 자유주의의 교육권과 현대적 인권으로서의 교육권이 구별되는 이유가 이러한 사회권의 요소이다. 교육은 돈이 있는 자가 자기 돈을 내고 자녀를 교육시키는 일이라고 이해되던 시대에는 교육의 ‘자유’만으로 충분했다. 그러나 현대의 교육권은 국가에 대해 의무교육의 실시나 교육시설의 정비 등을 요구할 수 있는 권리를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다르다. 돈이 없는 사람도 균등하게 ‘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다는 것은 국가가 그 권리를 실질적으로 보장할 의무를 진다는 점을 당연히 그 권리 속에 포함한다. 이런 국가 활동 없이는 현대의 공교육이 성립될 수 없다.
자유에 대한 불간섭과 적극적인 국가 행동 둘 다를 요구하는 주장의 결합이 세계인권선언의 26조에 나타난다. 정신적 자유권을 기반으로 하는 교육권은 자유의 실질적 보장을 위한 측면에서 국가 활동을 요구하는 것이지, 정신활동에 대한 개입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자유권 또는 사회권 어느 한편으로 교육권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일을 경계해야 한다.

국가의무의 4요소; 가용성, 접근성, 수용성, 적응성

유엔 교육특별보고관은 교육권 보장을 위한 국가의 의무로서 4가지 요소를 지적한 바 있다.
첫째, 가용성(availability)이다. 모든 학령기 아동이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모든 아동이 공립학교에만 다니는 것은 아니므로, 공립학교를 포함한 모든 교육기관은 아동의 교육권 보장을 위해 최소한의 일치된 성격을 보장해야 한다. 뭐가 일치돼야 하느냐면 국내외적으로 금지된 차별이 없어야 하며, 초등무상교육의 원칙이 보장돼야 한다. 정부는 모든 교육기관이 최소 기준을 충족시키도록 보장해야 하며 차별과 배제 없는 통합교육을 보장하도록 해야 할 의무가 있다. 교육기관을 설립하고 감독하고 재정 지원하는 것은 국제인권법에 부응해야 한다. 모든 교육기관에서 교사들의 지위는 노동조합의 권리를 포함하여 국제적으로 보장된 권리를 누려야 한다.

둘째, 접근성(accessibility)이다. 선언에서는 교육이 모든 사람에게 “평등하게 개방되어야”한다고 표현했다. 접근성과 밀접한 문제는 교육비이다. 직·간접적인 교육비용, 통학비용 등의 장벽이 제거돼야 한다. 의무교육 이후의 교육에서도 비차별적이고 감당할만한 수준의 교육접근성이 보장돼야 한다. 교육은 결코 상품으로 취급돼선 안되며 시장이 실패하면 국가가 개입한다는 식으로 접근해서도 안된다.
비차별은 즉각적으로 완전 보장돼야 하는 원칙이다. 가령 장애아동의 경우 학교 건물이나 교실이 그들의 접근을 불가능하게 만든다면 실질적으로 배제되는 것이다.

셋째, 수용성(acceptability)이다. 교육은 교육 참여자들이 용납하고 수용할만한 것으로 확인된 최소한의 기준을 보장해야 한다. 최소한의 기준에는 교육의 질, 안전, 건강한 환경이 포함돼야 한다. 학교 규율과 교수방법은 인권을 존중하는 것이어야 한다. 가령 교육 참여자의 평등권, 프라이버시, 인격의 발전을 침해하는 처벌과 규제는 안된다. 억압적인 환경에서 자란 아동은 억압에 제대로 맞설 수가 없다. 억압과 비교될 수 있는 대안적인 시스템을 전혀 모르기 때문에 억압이 사라져도 언제든지 억압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 민주주의와 인권은 교육과정에서 습득하고 실현해보는 가치여야 한다. 배우는 과정은 또한 물리적 장벽의 제거를 요구한다. 가령 교육을 방해하는 빈곤, 교육에서 채택한 주류언어로 인한 차별, 장애로 인한 교육 장벽이 제거돼야 한다.

교육권 위협하는 상품으로서 교육

넷째, 적응성(adaptability)이다. 아동 최선의 이익을 위해 교육내용과 과정은 변화에 적응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이 개념에서 특히 주목한 점은 일하는 아동을 위한 교육이 무엇인가이다. 극단적 형태의 아동노동, 아동노동에 대한 착취를 금지하는 것은 물론 필요하다. 그래서 기초교육을 마치는 나이와 고용, 결혼, 징병, 형사책임을 묻는 나이를 일치시킬 필요가 있다.
또한 일하는 아동에게 교육이 제공돼야 한다는 적극적 측면의 고려도 있어야 한다. 많은 지역과 가정의 현실은 아동이 일해야만 생존할 수 있다. 학령기 아동은 무조건 일을 하지 않고 학교에 있어야 한다는 방식의 접근으로는 아동의 교육도 노동도 보호될 수가 없다. 이런 상황에 교육이 적응하지 않으면 안된다. ‘일하고 배운다’, 우리식으로 표현하면 ‘주경야독’의 접근법이 요구된다. 한 예로 고용된 아동의 하루 노동시간을 6시간 정도로 제한하여 적어도 2시간 이상의 교육과 병행하도록 하고, 그 비용을 고용주에게 지불하도록 한 국가도 있다. 빈곤한 가정이 아동을 학교에 보내는 동안에는 최소한의 소득을 보장해주는 시도도 있다. 교육이 적응성을 갖는다는 것은 학교 밖의 교육도 적극 고려해야 한다는 의미다. 자유를 상실한 아동, 난민아동, 국내실향민, 일하는 아동 등 교육기관에 접근할 수 없는 범주를 위한 교육이 적극 고려돼야 한다.

또한 공식 교과과정이라는 것이 아동의 실제 삶과는 상관없이 다음단계의 상급교육과정(사실상 많은 아동이 갈 수 없는)으로 진학하기 위한 내용으로만 채워져 있는 것도 문제이다. 직업교육을 진학교육보다 열등한 것으로 보는 인식의 변화가 필요하다.
교육 내용의 적응성은 교육을 통한 인권보장을 염두에 둔다. 다른 세계와 문화, 역사, 성역할 등에 대한 공정한 정보를 제공하고 불평등·편견·차별의식과 싸울 수 있는 교육이 요구된다.

교육권은 흔히 인권 중의 인권으로 얘기된다. 유엔교육특별보고관은 “교육은 여타 인권을 풀어내는 열쇠”라고 했다. 세계인권선언에 교육권을 넣을 때는 ‘자명’한 것으로 합의했지만, 실천에서는 그 열쇠가 제대로 맞지 않을 때가 많다. 교사 100명당 적어도 150명 정도의 군인이 있는 것이 현세계이다. 거래하고 소비하는 상품으로서의 교육이 교육권을 위협하고 있는 것도 현실이다. 인권을 풀어내는 열쇠를 그런 식으로 소진해버려서는 안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