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인권선언 제29조

1. 모든 사람은 그 안에서만 자신의 인격을 자유롭고 완전하게 발전시킬 수 있는 공동체에 대하여 의무를 부담한다.
2. 모든 사람은 자신의 권리와 자유를 행사함에 있어서, 타인의 권리와 자유에 대한 적절한 인정과 존중을 보장하고, 민주사회에서의 도덕심, 공공질서, 일반의 복지를 위하여 정당한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목적에서만 법률에 규정된 제한을 받는다.
3. 이러한 권리와 자유는 어떤 경우에도 국제연합의 목적과 원칙에 반하여 행사될 수 없다.

29조는 선언에서 의무에 대해 말하는 유일한 조항이다. 인권에 대해 흔히들 하는 비판은 ‘권리만 말하지 의무는 말하지 않는다’이다. 그런데 이런 말을 누가 어떤 상황에서 하는가를 잘 따져봐야 한다. 조건을 따지지 않고 그냥 의무라고 할 때는 인권에 상응하는 의무가 아닌 엉뚱한 번지수의 초인종을 누르는 일이 벌어질 수 있다.

가령 권리를 보장해야 할 국가가 자기 의무를 말하지 말고 시민에게 법부터 지키라고 요구한다. 어린 사람이라고 함부로 대하면서 연장자에게 존대부터 하라고 요구한다. 사회경제적으로 취약한 처지의 사람에게 어떤 착취가 있는지를 얘기하지 않으면서 피해 당사자에게 네 처신부터 똑바로 하라고 요구한다. 이럴 때 의무를 말한다면 그건 음모가 있는 의무론이다. 의무의 번지수를 잘못 찾아서 청구하는 것일 뿐 아니라 진짜 의무자가 도망갈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준다.

의무, 번지수를 제대로 찾아야

권리는 관계 속에서 무언가를 요구하고 금지하고 규제할 수 있는 힘이다. 가령 교육을 받을 권리를 갖는다는 것은 국가편에 무상으로 교육에 접근할 수 있는 조치를 취하도록 할 의무를 수립한다. 고문을 받지 않을 권리를 갖는다는 것은 국가기구와 관련 공무원이 고문이나 비인도적이고 굴욕적인 처우를 하지 않도록 할 의무를 수립한다. 인권이 권리라고 할 때 권리에서 나오는 의무는 이런 성격의 것이다. 교육권의 주체가 인간존엄에 반하는 학교규율을 지킬 의무, 인신의 자유의 주체가 부당한 공권력에 복종할 의무 같은 건 의무란 말이 잘못 쓰인 것이다.

또한 권리에 따른 의무는 자유재량이 아니라 그야말로 강제력 있는 의무이다. 모든 사람에게 사회보장에 대한 권리가 있다면 요구되는 재화와 서비스를 특정 사람에게 제공해야 할 의무가 있어야 한다. 모든 사람에게 그것을 제공할 의무가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특정인이나 기구가 의무자로 지정돼야 의무가 성립된다. 사회보장의 권리에 따른 의무는 지자체나 정부가 져야 인권으로서의 의미가 있다. 사람들이 스스로 상조회를 만들고, 아프거나 가난한 이웃을 방문하고 위로하고 원조하는 것은 자유재량이다. 이 경우 인간으로서의 도덕적 의무를 수행했다고 할 수는 있지만 복지권 주체의 권리에 대응하는 의무는 아니다. 반면 국가가 사회보장에 대한 권리에 따른 의무를 수행하는 것은 자유재량이 아니라 의무이다.

권리는 소유하거나 주어지거나 상실되는 물건이 아니다. 국가가 교육권을 제대로 보장하지 않는다고 해서 내 권리가 상실되는 게 아니고, 독재 권력이 고문을 애용한다 하여 고문 받지 않을 내 권리가 상실되는 게 아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권리와 의무의 주체가 누구인가를 명확히 해야 한다. 흔히들 비판하듯 인권을 보장하고 보호해야 할 국가가 인권침해를 저지를 때가 많다. 그렇다고 해서 권리의 주체가 바뀌는 게 아니고, 아무리 밥 먹듯 인권을 침해한다 해도 그것으로 국가의 의무가 면제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권리 주체가 지는 의무란 것이 착취에 대한 복종이고 악법에 대한 복종이겠는가. 권리주체의 의무는 자기 자신에 대한 의무이다. 빼앗기거나 왜곡된 자기 권리를 찾는 의무가 진짜 의무이다. 인권은 권리 중에서도 특별한 종류의 권리이다. 법적 권리 뿐 아니라 도덕적 권리도 갖는다. 실정법으로 보장될 뿐 아니라 실정법의 정당성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작동하는 것이 인권이다. 따라서 법적 명령 뿐 아니라 경우에 따라 실정법과는 다른 도덕적 명령도 내릴 수 있다. 인권의 주체는 이런 명령을 내릴 수 있기 때문에 인권에 따른 의무주체에게는 복종을 요구하지만 인권의 주인인 자기 자신에겐 인권침해에 대한 저항을 명한다.

의무에 대한 연구는 더욱 발전돼야

앞서도 말했지만 세계인권선언의 기초자들 중 상당수는 국가의 의무를 선언에 명시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렇다고 해서 의무가 사라질 수는 없는 일이다. 선언에 쓰인 구체적 권리들은 권리만을 걸치고 있는 게 아니라 그에 상응하는 국가의 의무를 겹쳐 입고 있다고 봐야 한다. 또한 선언 이후 의무의 구체적 내용들은 국제법전문가들에 의해 발전돼 왔다. 앞서 사회보장권과 관련된 조항에서 살펴본 최소핵심의무, 존중·보호·실현의 의무 같은 것이 그 사례이다.

의무에 대한 연구는 더욱 발전될 필요성이 있다. 가령 국가의 보호 의무를 통해 간접적으로 기업의 의무를 물을 것인지, 기업 등을 직접적으로 규제하는 제도를 만들 것인지가 논란이 되고 있다. 인간의 존엄에 필수적인 것을 무슨 권리로 주장하기는 상대적으로 쉽다. 반면에 그런 권리에 대해 국가가 또는 다른 사회경제적 강자가 어떤 의무를 가져야 하는지를 밝혀내는 것은 훨씬 더 어려운 일이다. 가령 깨끗한 물에 대한 권리 주장은 깨끗한 물을 마시는 것이 생존과 건강에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이면 정당화될 수 있다. 반면에 물에 대한 권리를 민영화하려는 정부에 맞서서 그리고 수익사업으로 여기는 물 회사에 맞서 그들의 의무를 정당화하기는 훨씬 어려운 일이다. 이런 의무를 구체화하는 것이 인권에 대한 연구요 실천활동의 내용이라 할 수 있다.

그럼 29조에서 말한 ‘모든 사람의 공동체에 대한 의무’는 뭘 말하는 걸까. 29조는 사회와는 단절된 이기적 개인의 권리라는 굴레에서 인권을 해방시켜 준 조항이다. 여기서 비판하는 개인주의는 ‘어떤 사람도 수단으로 여겨져서는 안된다’, ‘세상이 모두 ‘예’라고 할 때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단 한 사람의 가치’를 존중하는 개인주의하고는 거리가 멀다. 자기 이익의 계산기를 두드리는 데 유능할 뿐 다른 사람과 공동체의 가치 같은 건 고려하지 않는 개인주의를 말한다. 세계인권선언을 만들면서 사람들은 소중한 개인의 가치가 이런 식의 이기주의로 오해되는 걸 우려했다.

공동체와 국가를 동일시하는 것은 위험

‘공동체에 대한 의무’를 ‘국가에 대한 의무’로 오독해서는 안된다. 선언 기초자들은 개인에 대한 국가의 침해로부터의 보호를 염두에 뒀다. 한 대표자의 말처럼 “인간은 국가를 위해 창조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국가가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가 기본에 깔렸다. 공동체와 국가를 동일시할 위험성 때문에 ‘민주국가’라는 표현도 쓰지 않고 ‘민주사회’라는 표현을 택했다. 따라서 공공질서, 일방의 복지 등 29조에 따른 권리제한의 조건규정들도 이런 전제조건속에서 이해돼야 한다. 국가가 공공질서의 이름으로 자행한 범죄가 많았다는 것을 우려하면서 국가가 이런 문구를 이용해서 자의적 조치에 사로잡힐 것을 선언 기초자들은 우려했다. 이점을 염두에 두고 29조를 봐야 한다.

선언의 목적은 이기적인 개인의 성취를 보장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도덕적 진보를 증대하기 위한 것이다. “그 안에서만 자신의 인격을 자유롭고 완전하게 발전시킬 수 있는 공동체에 대하여”라 한 것은 개인은 인격을 사회구조 속에서만 발전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또한 선언에 규정된 경제사회적 권리가 구체화될 수 있는 조건을 제공하기 위한 시도이기도 했다. 연대와 상호의존성은 모든 인권의 성격이다. 모든 사람은 상호적이고 평등한 권리를 갖는다. 따라서 서로 타인의 권리를 존중하는 동시에 자신의 권리를 모든 타인에게 존중받는다. 인권이 갖는 상호성을 인정함으로써 사회는 공동체를 이룬다. 이런 공동체 속에서만 개인은 자기 인격을 발전시키고 권리를 누릴 수 있다. 공동체에 대한 의무는 국가에 대한 의무가 아니라 동료인간에 대한 의무이다.

동료인간에 대한 의무를 현대적 화법으로는 ‘연대’라 할 수 있다. 연대의 화법은 어떤 것일까? ‘나는 000가 아니지만 당신이 탄압받는다면 그에 반대 하겠다’는 식의 화법이 소극적 관용의 수준이라면, 연대의 화법은 ‘내가 000다’라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나는 정규직이지만 비정규직 운동을 지지한다’가 아니라 ‘내가 바로 비정규직이다. 비정규직은 인간의 존엄에 반한다’라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연대와 상호의존성

공동체에 대한 의무로서 우리가 버려야 할 것은 ‘뺄셈의식’일 것이다. 누군 이래서 안되고 누군 저래서 안되는 식으로 인권에서의 배제를 용인하고 합리화하는 것이다. 뺄셈의식을 버리고 가져야 할 것은 차별과 착취에 대한 분노를 느끼는 공통감각이고 그 문제를 나의 것으로 느끼는 연대의식일 것이다. 적대의 대상은 나와 다른 인간이 아니라 우리 모두를 괴롭히는 개인적이고 구조적인 반인권의식과 조치일 것이다. 적대의 대상을 명확히 하여 가지는 그런 연대의식이야말로 진짜 우리편 의식이다. 우리편 의식을 설파한 연설문 한 구절을 소개하고 싶다.

“나는 여전히 무슬림이다. 그것이 나의 개인적 신념이다. 나는 여전히 무슬림이지만, 나의 종교를 논하러 여기 온 게 아니다. 당신의 종교를 바꾸라고 여기 있는 것도 아니다. 나는 우리의 차이점에 대해 논쟁하기 위해 온 게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차이점을 가라앉히고 우리가 같은 문제, 공통의 문제를 갖고 있다는 것, 당신이 불교도이건, 감리교도이건, 무슬림이건, 민족주의자이건 간에 당신을 지옥에 빠뜨린 문제를 우선 보는 것이 최상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할 때이기 때문이다. 당신이 교육받았건 일자무식이건, 큰 길가에 살건 뒷골목에 살건, 여러분은 나처럼 지옥에 빠질 것이다. 고통 받고 있는 우리 모두는 정치적 억압과 경제적 착취와 사회적 강등으로 고통받아왔다. 우리는 착취에 반대하고 강등에 반대하고 억압에 반대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차이점이 있다면 그 차이는 벽장 속에 내버려두자.”(흑인 해방 운동가 말콤 X의 연설문 중에서)

이주노동자들이 사냥개에게 쫓기는 약한 동물들처럼 인간사냥 당하는데서 우리가 떠올릴 수 있는 게 뭔가. ‘재들은 우리 시민이 아니잖아. 우리가 낸 세금으로 같이 살아갈 수는 없잖아. 피부색도 다르고 먹는 것도 다르고 종교도 다르고, 뭔가 다른게 존재하는 건 불안해.’ 한국은 동질적인 사회이고 그래야만 한다는 생각에서는 인권이 숨 쉴 수 없다. 이주노동자들은 이 사회에서는 시민권이 없다. 시민권은 나누고 분리하는 개념이다. 세금을 낸 시민이 정부 주식회사에서 주주의 권리를 행사하는 것이 시민권이라면 그리고 뺄셈을 잘하는 것이 시민권이라면, 인권은 포괄하고 더하는 개념이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어디에서나 사람으로 대접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주노동자처럼 확실하게 비시민인 사람들, 겉으로는 시민이지만 사실상 시민대접을 받지 못하는 차별받는 사람들을 중심에 놓고 설계해야 하는 게 인권의 개념이다. 시민권 개념 안에서 인권을 바라보면 창문 안에서 밖을 바라보는 것과 같다. 창문(window)의 어원은 ‘바람의 눈’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한다. 이 뜻을 따르면 창문은 안에서 바깥을 바라보는 게 아니라 온 세상을 자유롭게 휘젓고 다니는 바람의 눈으로 안을 들여다보는 게 된다. 시민권 안에서가 아니라 밖에서 들여다 보는 것, 즉 인권의 눈으로 우리 사회를 들여다보는 것, 그것이 인권을 가진 모든 사람의 공동체의 의무가 아닐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