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인권선언 사회보장에 대한 권리 조항
22조 모든 사람은 사회의 일원으로서 사회보장제도에 관한 권리를 가지며, 국가적 노력과 국제적 협력을 통하여 그리고 각국의 조직과 자원에 따라 자신의 존엄성과 인격의 자유로운 발전을 위하여 불가결한 경제적, 사회적 및 문화적 권리의 실현에 관한 권리를 가진다.

25조 ① 모든 사람은 식량, 의복, 주택, 의료, 필수적인 사회서비스를 포함하여 자신과 가족의 건강과 안녕에 적합한 생활수준을 누릴 권리를 가지며, 실업, 질병, 장애, 배우자와의 사별, 노령, 그 밖의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서의 다른 생계 결핍의 경우 사회보장을 누릴 권리를 가진다.
② 모자는 특별한 보살핌과 도움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 모든 어린이는 부모의 혼인 여부에 관계없이 동등한 사회적 보호를 향유한다.



인권이 밥 먹여주냐? 혹은 자유가 밥 먹여주냐? 이런 물음은 인권에 관심 있는 사람이면 스스로 묻게 되거나 혹은 자주 듣는 질문 내지 원망이다.

“인권은 아침밥과 함께 시작된다”라는 말로 인권을 옹호한 사람이 있었는데, 여기서 “아침밥”으로 표현되는 인권은 무엇일까? 모든 것을 돈 주고 사고팔아야 하는 상품으로 여기는 세상살이 속에서 그런 상품을 살 돈이 없어서 그걸 누릴 수 없다면, 즉 ‘아침밥’에 대한 권리를 얘기하는 것이 인권일 수 없다면, 우리는 ‘인권은 밥을 먹여주지 않는다, 자유는 밥을 주지 않는다’는 결론에 이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른바 아침밥에 대한 권리, 경제사회적 인권을 기본적 인권으로 주장한 어느 학자는 홈리스(the homeless)를 예로 들어 이렇게 말했다. “여러 날 먹을 것 구경을 못하고, 입을 옷이 없어 쓰레기봉투를 엮어 옷을 대신하고, 당뇨병이 진행되고 있는데 치료를 받지 못하는 사람이 표현의 자유에 대한 권리를 누릴 수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너무나 ‘기본적’이기 때문에 의․식․주와 의료는 모든 사람이 나머지 인류에게 할 수 있는 최소한의 합당한 요구이다.”

그럼 세계인권선언에서는 뭐라 말하는가? ‘사회보장’에 대한 권리, ‘경제.사회.문화적 권리의 실현’에 대한 권리, ‘적합한 생활수준’을 누릴 권리를 인권이라 말하고 있다. 여기에는 먹을 것, 입을 것, 쉴 곳, 아플 때 치료받을 것 등이 인권으로 포함돼 있다. 한마디로 말하면 인권은 ‘밥’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인간생활에 ‘기본적’인 것을 누릴 수 있는 권리라는 얘기다.

사진설명세계인권선언 22조와 25조 <출처: UN Photo>


사회보장을 권리로 보장하기까지

선언의 다른 조항들과 마찬가지로 사회보장에 대한 권리 조항의 직접 배경이 된 것은 나치즘의 경험이었다. 물론 그에 앞서 1919년 러시아 사회주의 혁명의 성공과 대공황의 여파로 체제에 위협을 느낀 자본주의 국가들 내부에서부터 사회보장의 중요성은 점차 강조되는 과정에 놓여있기는 했지만 말이다.


1940년 여름 정책적으로 “노인, 정신질환자, 불치병자, ‘쓸데없이 밥만 축내는 이들’은 특별기관으로 옮겨졌고 거기서 죽었다”(전쟁범죄에 관한 유엔 보고서 중에서)
"자신의 건강을 위해 싸울 기력이 더 이상 없다면 이 투쟁의 세계에서 생존할 권리는 끝난다“(히틀러의 『나의 투쟁』중에서)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 특히 경제사회적 권리의 보장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전후 사람들의 머리와 가슴을 지배했다. 그렇지 않으면 나치즘과 같은 악몽이 언제든지 재발할 수 있다는 두려움이 컸다. 인권의 존중, 대규모 실업과 빈곤으로부터 인간생활을 지켜내는 것(루즈벨트 미 대통령의 이른바 ‘결핍으로부터의 자유’에 해당한다)이 ‘나치즘과의 전쟁’ 수행과 전후 재건을 위한 이념으로 등장했다. 인간의 존엄성을 생각한다면, 인간을 존중한다면, 기본적인 생존권을 인권으로 보장해야 한다는 생각이 각광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사회보장에 대한 권리는 생존권을 구체화하기 위한 기본적인 권리 가운데 하나로 자리 잡았다.

그렇지만 사회보장에 대한 권리에 동의를 표시한 국가 대표들의 생각이 한결 같았던 것은 아니다. 선언을 기초할 당시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 대부분이 헌법에 주거권과 의료권을 보장하고 있었다면, 북대서양 국가들 중 어디도 이들 권리를 헌법에 포함하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이들 국가들은 전통적 인권과는 분명히 다른 이들 ‘새로운’ 권리들을 인권으로 채택하는 데 주저했다. 국가가 제공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획득할 기회’를 보장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여겼다. 사회보장의 필요성은 인정했지만 그것에 대해 국가가 비용을 지불하거나 의무를 져야 한다는 것으로 해석되길 두려워했다. 반면에 적극적으로 이들 권리를 요구한 측에서는 경제사회적 권리는 19, 20세기에 인류가 성취한 사회진보의 결과이며 보편적인 생각이 되었다고 강조했다. 인간이면 누구나 누려야 할 근본적 권리이기 때문에 국가가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것이 정의의 이념과 합치된다고 했다.

결국 선언에는 ‘사회보장’의 의미가 무엇인지 누가 얼마만큼 책임져야 하는지에 대한 구체적 얘기는 없다. 선언을 어떻게 ‘이행’할 것인가의 문제는 언급하지 않기로 한 것이다. 또한 ‘사회보장’이라는 단어는 그것 자체가 의미를 가지거나 목적이 될 수 없는 것이고, 사회보장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나타내는 구체적 목록과 함께 있어야 그 의미가 규정된다. 선언에서 우리는 간접적으로 ‘의식주, 의료, 필수적인 사회서비스’를 통해 그 의미를 짐작할 뿐이다.


최소화, 간략화가 낳은 결과

선언 내에서도 22조에서 말하는 ‘사회보장’과 25조에서 말하는 ‘사회보장’의 의미가 다르다. 22조의 사회보장은 막연하지만 넓은 의미의 권리(“인간존엄성과 인격의 자유로운 발전을 위한”)를 말한다면, 25조의 사회보장은 실업, 질병, 장애, 노령 등의 특정 상황에서 인간존엄성을 보장하기 위해 어떤 걸 고려할 수 있는지를 얘기하는 ‘최소한의 예시’일 뿐이다. “인간존엄성과 인격의 자유로운 발전”을 위해 필수불가결한 사회경제적 권리가 무엇이며, 그걸 보장할 수 있는 경제사회체제는 무엇이며, 어떻게 집행할 수 있는지는 각국의 재량 사항에 남겨진 것이다. 이 부분을 조금이라도 구체화하려는 제안들은 ‘“거짓된 희망”을 불러일으키지 말자’거나 ‘나라마다 상황이 다르다’는 제지를 받았다.

이에 선언 22조에는 “각국의 조직과 자원에 따라”라는 표현이 있다. 이 표현은 사회보장에 대한 권리를 제공받을 수 있는 곳에 대해 상대적인 것으로 만든다. 그러나 권리를 그 사람이 살고 있는 사회나 국가에서 제공할 수 있는 것에 국한한다면 다른 곳에선 먹을 것이 넘쳐나고 있는 한편에서 식량에 대한 인권 없이 굶어죽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국제협력”을 언급한 것은 사회권이 국제적 권리라는 의미이다.

‘막연한’ 용어 대 ‘구체적’ 용어의 대결은 결국 ‘막연한’ 용어의 승리로 끝났다. “싸고 접근 가능한”, “특히 빈곤층 또는 노동자에게 적절한”, “국가가 비용을 지불하는” 식으로 조항을 만들자는 주장은 지금 선언에 쓰인 용어대로 “사회보장”에 대한 권리면 충분하다는 주장에 용해됐다. 또한 주거권, 의료권 등 구체적인 각각의 권리에 대한 조항으로 하자는 주장은 간략하게 ‘합치자’는 것으로 결론지어졌다.

이런 간략화와 합치기의 폐해는 크다. 인간생활에 기본적이고 필수적인 권리들이 사회보장에 대한 권리로 수렴되는 듯한 인상을 줄 뿐 아니라 사회복지․의료 등에 대한 권리들이 공적(公的) 부조를 중심으로 한 좁은 의미의 사회보장으로 축소돼버린 것이다. 예를 들자면 주거에 대한 권리는 사람이면 누구나 인간다운 주거를 누릴 권리인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는 사정으로 그렇지 못할 경우 자선이나 구제 수준의 도움을 받을 정도의 권리가 돼버린 것이다. 인간다운 집에 대한 권리를 가지는 것인가, 집이 없을 경우 쉼터 등에 수용되거나 약간의 보조비를 받을 권리를 가지는 것인가의 차이는 크다. 사회보장은 경제.사회.문화적 권리의 실현에 달린 것이지 이것과 똑같은 수준으로 취급될 수는 없다.


사회보장권과 구빈과의 근본적 차이

이처럼 선언에서 아무리 소극적인 의미를 띤다 할지라도 ‘사회보장에 대한 권리’는 이전 시대의 구빈이나 자선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구빈차원의 사회부조에서는 수급자의 권리를 부인하고, 베풀어준다는 은혜성과 그에 따른 굴욕적 조건을 달았다면 권리로서의 사회보장은 다르다. 개인의 잘잘못이 아니라 이 체제 속에서는 ‘어쩔 수 없는’(세계인권선언에서의 표현은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서의”) 생활 곤궁이나 불능 상태를 전제로 사회보장의 권리가 인권으로 구체화된 것이다. 이 권리는 개인의 기본적 인권이기 때문에 수급자의 기여에 의존하지 않고 전적으로 국가의 공적 부담에 의해 이뤄지는 게 그 성질상 당연하다. 그리고 권리이기 때문에 구빈의 차원을 벗어나 법적 권리로 인정하는 단계로 발전한 것이고, 사회는 자기 내부에서 발생하는 위험으로부터 구성원을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회보장에 대한 권리는 ‘인간 존엄성’과 ‘인간의 자유’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기에, 시혜를 이유로 여타 인권에 대한 국가 개입을 맘대로 강화하게 한다든가, 자유와 교환하자는 식으로 여겨져선 안 된다. 사회보장에 대한 권리를 이행하기 위해 국가가 적극적으로 활동할 의무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의 어디까지나 정의의 원칙에 부합돼야 하며, 국가의 적극적 활동이 여타의 기본권 침해를 합리화할 근거는 될 수 없다. ‘자유가 밥 먹여주냐’가 아니라 ‘자유가 밥 먹여준다’가 맞는 말일 것이다. 사회보장의 이행에서 충분히 예상 가능한 국가 개입의 강화가 여타 인권의 침해로 연결되지 않도록 하는 방패막이는 표현의 자유, 결사의 자유 등 기본적 자유의 강화이다.

인간은 서로 의존하며 살아간다. 인간은 서로 연대해야 한다. 이러한 사회적 연대를 권리로 표현한 것이 ‘사회보장에 대한 권리’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사회적 연대를 이해하는 방식을 둘러싸고도 상부상조의 미덕을 강조하는 소극적 해석에서부터 국가의 의무를 강조하는 것까지 다양한 입장들 사이의 충돌이 존재하고 있다. [류은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