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가 왔다. 챙겨보진 않았지만, 늘 그랬듯이 각종 언론은 새해에 태어난 첫 아기의 울음소리를 섞어 새해가 돼서 달라질 것들, 좋아질 것들을 편집해 희망을 노래했을 것 같다. 하지만 연말부터 메아리쳤던 ‘안녕하십니까’란 물음에 꿈쩍도 않는 정치와 불통에 새해는 꽁꽁 얼어붙었다.

신생아의 울음소리가 아니라 정치적‧사회적 타살이라 할 죽음의 통곡소리가 연달아 들려온다. 이제 좀 멈춰줬으면 좋겠는데 계속되는 송전탑 공사와 밀양주민 패대기치기, 공공의 것을 사유화하려는 질주, 청소년부터 청소노동자까지 입 다물 것을 강요받고 위협받는 상황…….

위 사진:2013년 12월 10일 세계인권선언 65주년 맞이 기자회견

2013년 말, 인권단체들은 인권의 날(12월 10일)을 맞아 “인권의 그날들을 기억하는 우리, 불평등에 맞서는 연대로 인간의 존엄을 선언하다”란 기자회견을 했다. 해마다 갖는 행사였지만 그날따라 “인간의 존엄을 선언하다”란 말이 참 사무쳤다. 밥상에 으레 오르는 줄 알았던 ‘김치’가 어느 날 ‘금치’가 되듯, 무감각하게 나열하던 ‘인간존엄성 존중’이란 말에 목이 메이는 시절이다. ‘이익이 걸려 있으니 안타깝지만 존엄성 훼손을 어쩔 수 없다’고 민망해하는 수준도 아니라 ‘이익을 위해선 존엄성 따윈 따질 거리가 못 된다는 뻔뻔함이 미세먼지처럼 자욱하다.

알다시피, 인권의 날은 세계인권선언의 제정(1948년)을 기념하는 것이다. 1947년 1월, 유엔인권위원회가 그 첫 회기를 가졌고 그 목표는 세계인권선언을 만드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데올로기와 철학적 차이가 너무 심해서 진행이 되질 않았다.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간의 갈등을 축으로 해서 개인이 먼저냐 사회가 먼저냐, 권리냐 의무냐, 자유냐 평등이냐 등의 논쟁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유네스코는 ‘인간 권리의 철학적 원칙들에 관한 위원회’를 통해 문제 해결에 기여하려 했다. 오늘 읽어볼 인권문헌은 이 유네스코 위원회의 최종보고서이다. “인간 권리의 철학적 원칙들에 관한 보고서”란 거창한 제목을 달고 있지만 읽어보면 밋밋하기만 할 뿐이다. 어떤 세련되고 유려한 철학이나 지식적 체계를 거의 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밋밋하기만 한 문서에 담긴 보석이 있으니 그것은 ‘인간 존엄성에 대한 신념과 인정’이다.


인간과 사회의 본성에 대한 입장이나 형이상학적 논쟁에 갇혀 있어서는 인권선언이 실현 불가능하다는 것, 너무나 다양한 사상과 철학을 종합한다는 불가능한 과제가 아니라 인류애의 실천을 위한 공통의 토대에 합의하자는 것이 이 보고서의 목표였다. 이에 유네스코는 인권의 철학적 원칙들을 연구하는 위원회를 만들고 전 세계 약 150여명의 사상가들에게 질문지를 보내 답변을 받았다. 이 조사를 토대로 영국의 역사가 E.H.카를 의장으로 작성한 것이 이 보고서이다.

다양한 철학적 접근과 해석 하에서 가능한 합의의 근거가 무엇인가를 한마디로 추린 것이 ‘존엄성’이었다. 이론에 대한 합의가 아니라 실천을 위한 공통의 토대에 합의하자는 정신이었기에 ‘왜 존엄하냐?’는 존엄성의 근거에 대해서도 합의하지 않았다. 즉 인간이 이런저런 본성을 가졌으니까 존엄하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 대신 존엄성을 존중해야만할 이유에 대해서 합의한 것이고 인류 앞에 놓인 정치‧경제‧사회적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합의한 것이다.

인권의 토대를 ‘인간존엄성’으로 삼은 것은 이전 시대의 인권과 현대의 인권을 구분하는 표지석이다. 여기서 인간존엄성은 신 또는 자연이 부여한 것도 아니고 이성 또는 여타의 능력이나 자질로 인해 갖는 것도 아니다. ‘인간존엄성’은 인류간 대화를 통해 합의한 인권의 토대이다. 어떤 학자는 인간 존엄성에 대한 합의를 여타 합의의 정당성을 따지는 잣대로 봤다. 예를 들어 나치의 통치는 철저히 합의에 근거한 것이었지만, 그런 합의를 민주사회에서의 합의가 아닌 것으로 배척할 이유는 나치의 합의에는 인간존엄성 존중이 결여됐다는 것이다.

유엔 인권위원회는 이 보고서를 받아들고 처음에는 냉대했다. 유네스코 위원회의 월권이라는 불편한 심기가 작동하기도 했고 각자의 이데올로기를 고수하고 싶은 태도가 계속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론은 ‘실천을 위한 공통의 토대’로서 ‘인간존엄성에 대한 존중’에 합의하게 됐다는 것이다. 세계인권선언 이후 모든 국제인권법의 바탕에는 존엄성 존중이 깔려있다. 인권학자들은 이것을 인간존엄성의 ‘수립적 기능’이라고 말한다. 뒤에 나오는 모든 것들은 그 어떤 내용이 됐든 ‘인간존엄성’의 그물 안에 걸려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의 국가인권위원장 격인 영국의 ‘평등과 인권위원회’의 반 부에렌(Van Bueren) 위원장은 ‘내핍의 시대에서 존엄성, 평등, 인권의 의미’에 대해 연설한 바 있다. 그녀는 존엄성에 대한 법적 권리 말고, 즉 추상적인 개념 말고 우리의 감정과 가치에 호소하는 존엄성에 대해 말해보겠다고 한다. 그러면서 예로 든 게 엘레인 맥도날드란 여성이다. 엘레인은 발레리나였는데 뇌졸중으로 쓰려졌다. 그 후 장애를 얻어 한밤중에도 여러 번 화장실에 가야만 하고, 화장실에 가다가 자주 넘어지고 병원신세를 져야하는 일도 있었다. 엘레인은 야간 돌봄을 포함하여 상당한 돌봄 서비스를 받아야 할 필요가 있는 것으로 판단됐다. 그런데 그녀가 거주하는 지자체 당국은 재정긴축을 이유로 야간 돌봄을 철회했다. 엘레인이 기저귀를 차면되니까 야간 돌봄에 대한 청구가 필요치 않다는 이유로 말이다. 엘레인은 그 결정을 당연히 거부했다. 왜냐하면 그 결정의 의미는 다음날 아침 8시 30분에 그 다음 활동보조인이 올 때까지 하루에 12시간을 배설물 위에 꼼짝없이 앉아있어야 하는 삶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부에렌 위원장은 질문한다. 엘레인의 경우에 그녀가 경험하는 존엄성 상실은 첫째 자기 삶을 통제할 수 없는 것이다. 돌봄 서비스를 축소하는 결정에 대해 당사자인 그녀에게 아무도 물어보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랬다. 두 번째의 존엄성 상실은 그 결정으로 인해 엘레인이 겪게 된 모욕적인 상황이다. 배설물에 젖은 기저귀를 차고 하루의 절반을 보내야 되는 삶 말이다.

이 사례에서 부레엔 위원장이 던지는 핵심 질문은 이것이다. “경기후퇴를 이유로 한 존엄성의 축소가 가능한 것이냐?”고 말이다. 바꿔 말하면, 존엄성의 훼손을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는 결코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5백여 일이 넘게 차가운 지하도에서 장애등급제와 부양의무제 폐지를 요구하며 농성해온 한국의 장애인들은 이런 질문을 던질 것 같다. “경기가 좋을 때조차 우리의 존엄성을 존중해준 적 있는가?” 정리해고 되거나 비정규직으로 차별받는 노동자들은 이런 질문을 던질 것 같다. “얼마나 우리의 존엄성을 짓밟아야 그놈의 경쟁력은 만땅이 되는 것이냐?” 개발이니 국책사업이니 몰아붙이기만 하는 공권력의 폭력에 짓밟힌 주민들은 이런 질문을 던질 것 같다. “누구의 이익을 위해 우리의 존엄성은 희생제물이 되어야 하는 것이냐?”

존엄성은 누구나 가진 것이고 존중은 그것에 대한 인정이다. 즉 인간이 서로를 보는 관점과 대하는 태도에 관한 것이다. 모든 인권의 밑바탕에는 존엄성 존중이 깔려있다. 물론 현실에선 경제적 합리성 또는 이익, 법적 강제 등이 더 큰 목소리를 낸다. 이런 것들을 논하지 말자는 게 아니라 그 논의와 실행이 적어도 벗어나서는 안 되는 기본궤도 안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불통의 정치가 합의를 강요하지만 그것은 사실 복종에 대한 강요이다. 존엄성에 대한 합의를 제외하고 합의할 수는 없다. 왜곡된 고용으로 노사관계조차 받아들이지 않는 자본가나 화장실에서 밥 먹을 것을 강요하는 노동조건과 합의할 수 없다. 공공의 것을 사유화하려는 시도와 합의할 수 없다. 권력의 평안을 위해 입 다물라는 선도와 계도에 합의할 수 없다. 음주측정기나 대기오염측정기가 각각의 구실을 하듯이 우리의 측정기는 인간 존엄성에 대한 존중이다. 존엄성 존중이 빠진 원칙, 법, 합의 따윈 없다.

인간 권리의 철학적 원칙들에 관한 유네스코 위원회 보고서(1947년 7월 31일)

…… 자유와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은 인간의 내재된 존엄성에 대한 신념에 기반해 있다. 인간 존엄성을 더욱 더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이 존엄성이 보다 완전하며 지속적으로 높은 수준에서 성취될 수 있는 조건을 만들기 위한 노력을 취하지 않는다면, 유엔은 헌신하기로 약속한 위대한 목적을 이룰 수가 없다.

문화가 다르고 서로 다른 제도들 위에 세워져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엔의 구성원들은 확실한 위대한 원칙들을 공통으로 갖고 있다. 우리는 온 세상의 모든 남녀가 출몰하는 빈곤과 불안의 공포로부터 자유로운 삶을 살아갈 권리를 가졌다고 믿는다. 우리는 인류의 노력으로 고통스럽게 세워진 문명의 유산에 대해, 그 유산의 모든 양상과 차원에서, 전 인류가 보다 완전하게 접근할 수 있어야만 한다고 믿는다. 우리는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모든 남녀가 어떤 종류의 차별도 없이 누리는 평화와 복지에 한결같이 헌신하기 위해 과학과 예술이 결합해야만 한다고 믿는다. 우리는 국가들 간의 선의에 기초해, 그들 수중에 있는 권력이 이전 시대보다 훨씬 신속하게 인류의 복지 성취를 진전시키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유네스코 위원회의 견해 속에 담긴 것은 바로 이러한 신념이다. …… 인간의 권리 개념을 옛 부터 광범위하게 받아들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법률 체계로 일부 인권을 보호하려는 장치의 오랜 발전에도 불구하고, 인권선언의 체계적인 선포는 최근의 일이다. 인권, 존엄성, 인류의 형제애, 위대한 사회속의 인간의 공통된 시민권의 역사는 오랜 것이다. …… 인간 존엄성에 대한 신념과 철학자들이 준비한 인간 행복을 위한 정식에도 불구하고, 인류에게 인권을 보장하기 위한 사회적 및 정치적 제도 속에서의 이행이 요구됐다. …… 우리 시대의 철학들은 그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인간 존엄성에 대한 신념을 심화시키고 인류의 행복을 위한 정식을 확대했다. 하지만 철학들의 차이는 다양하고 심지어 대립되는 기본권에 대한 해석을 낳았고 철학들의 실천적인 수용이 보다 중요해졌다.

…… 유네스코 위원회는 권리, 자유, 민주주의에 대한 해석들의 미묘함을 탐색하진 않았다. 이 용어들의 해석의 차이는 심화된 정의를 다각화할 수 있을 경향 속에서 훗날의 검토를 위해 남겨둘 것이나, 작동하고 있는 이 용어들의 정의에 대한 합의는 가능하다고 본다. ‘권리’라고 할 때 그것의 의미는 삶의 조건이다. 어떤 역사적 단계의 사회에서나 그것 없이는, 인간으로서 자기를 실현할 수단을 박탈당한 것이기 때문에, 인간이 그 공동체의 능동적 구성원으로 최선을 다할 수 없는 삶의 조건을 말한다. ‘자유’라고 할 때 그것은 단지 제약이 없는 상태 그 이상을 의미한다. 자유란 인간이 그 안에서 사회의 능동적 구성원으로 최대한 참여할 수 있고, 그 사회의 물질적 발전이 허용하는 최고의 수준에서 공동체의 복지에 기여할 수 있는 사회적 및 경제적 조건의 적극적인 조직화를 의미한다. 이런 자유는 오직 민주적인 조건하에서만 의미를 가질 수 있다. 민주주의 안에서만 자유가 일부 사람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한 기회를 만드는 평등의 맥락 속에서 작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민주적인 자유란 한 사람의 권리와 또 다른 사람의 권리 간에 연령 또는 성별, 인종 또는 언어 또는 신념에 의한 구별을 하지 않는 것이다.

유네스코 위원회는 이렇게 작동하는 정의들이 아주 다양한 특별한 해석들의 영향을 받기 쉽고 따라서 아주 모호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위원회는 인권선언과 관련된 철학적 문제들은 어떤 주의(교리)에 대한 합의가 아니라 권리에 관한 합의를 성취하는 것이며, 또한 권리의 실현과 방어를 위한 행동에 관한 것이라고 확신한다. 이런 합의는 아주 다양한 주의들을 근거로 해서도 정당화될 수 있다. 따라서 인권의 전개와 그것의 성격과 상호관련성에 관한 이론적 차이에 대한 위원회의 논의는 그 차이들을 단일한 정식으로 축소시키는 지적인 구조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기본권에 관한 합의를 얻고 지적인 차이에서 나올 수 있는 인권 이행의 어려움을 제거하는 것이다.

…… 개별 인간, 국가, 국제기구들이 그것의 성취를 위해 노력하고, 자신들의 모든 권위와 힘을 그것을 지지하기 위해 사용할 것을 고취시켜야만 하는 것이 인권이다. 인권은 개인으로서의 인간이나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인간 본질에 내포돼 있으며, 근본적인 살아갈 권리로부터 나온 것으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