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명의 쌍용차 해고 노동자가 굴뚝에 오른 지 40일이 넘었다. 스타케미컬 노동자의 굴뚝 생활은 무려 240일이 넘었다. 다행히 쌍용차에선 교섭이 시작된다는 소식이 들려 가슴을 쓸어내린다. 하지만 또 다른 굴뚝들이 도처에 있다. 연일 터지는 노동자에 대한 모욕과 멸시의 사건들, 추락하고 깔리고 폭발하는 노동자의 생명과 안전, 실업의 우울과 불안, 다가올 실업의 공포가 도처의 굴뚝들이다.

이전에도 노동자들은 송전탑이며 광고탑이며, 극한 곳으로 수시로 올라갔다. 어느 날 한 친구가 말했다. “이전엔 지나가면서 송전탑을 의식한 일이 없어. 근데 지금은 사람이 살고 있는 것 같아 올려다보게 돼.” 그렇다. 사람이 둥지 틀 수 없는 곳으로 사람이 내몰리고 있다. 날이 궂거나 바람이 불면 가슴이 답답하고 조마조마하다. 영어의 ‘염려, 고통, 분노’는 모두 같은 어원을 갖는데 그게 협심증의 어원이란 말이 실감난다.

가슴이 죄이는 듯 하는 것은 송전탑이나 굴뚝같은 극단적인 곳을 볼 때만이 아니다. 예외가 아닌 일상이 문제다. ‘수퍼갑질’이 아니곤 문제시조차 되지 않는 일상 속의 존엄성 유린은 자각증세가 없는 만성질병 같다. 특히 일상적으로 노동하는 사람을 멸시하는 일이 어느 때부턴가 공공연한 일이 되었다. 경제사회적 양극화가 정당한 자존감과 자부심 대신에 비뚤어진 우월감과 열등감을 경합시킨다.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것은 존중하고 존중받는 것인데, ‘존중? 그건 어디서 파는 거에요? 얼마에 살 수 있어요?’ 식의 엉뚱한 접근이 퍼져있다.

현대 인권의 초석은 ‘인간 존엄성’이다. 초석이란 타협 불가능한 원칙이란 의미다. 인간 존엄성은 개인의 업적이나 성취에 따른 것이 아니다. 이 존엄성은 단지 ‘인간임’으로 해서 누구나 갖는 것이다. 이 존엄성은 인간의 ‘평등성’에 기반한 것으로 자연적‧세습적인 위계와 귀족주의‧엘리트주의 이데올로기라 할 것을 일체 거부한다. 모든 인간의 존엄한 가치는 비교하여 따지거나 경쟁으로 획득하는 상대적 가치가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의 고유한 절대적 가치이다. 인권의 핵심 가치인 ‘자유, 평등, 우애(연대)’는 이런 인간 존엄성에서 도출한 것이다. 자유란 ‘소비의 자유’가 아니라 위계적 제도가 양산해 낸 ‘사회적 차별에 저항하는 정신’을 말하고, 우애(연대)는 공동체적 삶에 관심을 갖고 참여하는 사회적 관계의 질을 말한다. 평등은 이런 자유와 연대를 위한 전제 조건이다.

‘인간 존엄성’을 ‘존중’한다는 것의 의미는 인간 사회의 제반 활동에서 인간 존엄성을 척도로 삼는 것이다. 가령 인간을 한낱 자원이나 교체 가능한 부품처럼 다룰 때 그것을 거부하고 저항하는 것이 ‘존중’하는 것이다. 인간 존엄성의 원칙은 국제인권법과 헌법 등 법질서 전체에 적용될 뿐 아니라 인간이 만들고 행하는 제도나 정책 등 모든 것에 해당한다. 이러한 ‘인간 존엄성’을 정초한 대표 문서로 흔히 ‘세계인권선언’을 꼽는다. 물론 맞는 말이다. 그런데 세계인권선언(1948)보다 한 발 앞선 존엄성의 전령이 있었다. 국제노동기구(ILO)의 목적을 담은 필라델피아 선언(1944)이다.

ILO는 일찍이 1919년의 창립 헌장에서 “항구적인 평화는 사회적 정의의 기초 위에서만 가능하다”고 밝혔다. 하지만 인류는 그런 정의를 추구하는데 실패했고 또 한 번의 세계대전으로 치달았다. 인간을 사물처럼 취급하고 경제성장의 수단으로만 대하는 질서가 계속되는 한 전쟁은 언제나 일어난다는 것이 “경험적으로 완전히 증명되었다”. ILO는 전후의 삶과 국제질서를 이끌어 갈 원칙을 재확인해야 했다. 그 재다짐의 내용은 인간 존엄성을 모든 것의 정초원리로 삼는다는 것이었다. 그것의 실현은 시장의 횡포를 사회 정의에 무릎 꿇도록 만드는 제반 조치들을 취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재확인‧재천명한 원칙을 담은 것이 ‘ILO의 목적에 관한 필라델피아 선언’이다. 필라델피아에 모여 만들었기에 그 도시의 이름을 딴 것이지만, 그 도시의 이름이 ‘우애’를 뜻한다는 것은 우연치고는 반가운 것이다. 우리가 형제애와 자매애, 즉 우애의 정신으로 서로를 대하는 것이 모든 것의 출발점이란 것을 이름 자체가 깨우쳐주기 때문이다.

“노동은 상품이 아니다”
필라델피아 선언의 으뜸 원칙이다. 인간을 존엄하게 대한다는 게 한마디로 뭐겠는가? 사람을 사물 취급해선 안된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노동자를 ‘인력’이 아니라 ‘인간’으로, 노동력의 거래를 다른 물건처럼 ‘사고 파는’ 문제가 아니라 ‘사람과 사람의 관계’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노동자는 ‘인력’으로서 ‘경제적 보상’만 받으면 되는 존재가 아니라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존중’받아야 하는 인간이다.

물질적 존중은 그때그때 일한 만큼의 대가가 아니라 인간다운 생활의 안정과 지속을 위한 생활의 보장으로 실현돼야 한다. 정신적 존중은 구성원으로서의 자존감, 소속감, 연대감을 가질 수 있는 환경의 보장이다. 자신의 일에서 통제력과 재량을 발휘할 수 있고, 동료와 안정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고, 노동자 개인과 조직의 목소리와 행동으로 더 넓은 사회와의 연대감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한다.

물건과 달리 인간은 말을 하고 저항한다. 노동자의 물질적‧정신적 권리의 충족은 결과적으로 ‘그냥 주어지면’ 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의 참여 속에서 추구할 권리이다. 단순한 혜택과 권리로서의 보장은 다르다. 권리로서 향유하기 위해선 노동자의 개인적 및 집단적 자유가 중요한다. 따라서 “표현의 자유와 결사의 자유는 … 필수불가결한 조건”이다. 필라델피아 선언은 이런 내용들을 ‘사회 정의’의 구체적 내용으로 규정했다. 이런 사회정의의 추구가 목적이라면 경제는 그것의 실현을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이 선언을 유념한다면, 목적과 수단의 뒤집힘을 지적하고 경계하는 것이 실천과제이다.

오늘도 우리는 도처에서 벌어지는 노동자의 저항과 고난을 본다. 우리의 눈은 목적과 수단의 전도에 착시현상을 일으켜선 안된다. 사회정의를 굴뚝 삼아야 한다. 시장 우위의 폭력성과 인간 존엄성 유린의 연기를 빼내야 한다. 그 연기에 눈물콧물 쏟고 있는 노동자들의 말에 귀 기울여야 한다. ‘왜 극한투쟁을 하느냐? 그것밖에 방법이 없느냐?’는 말은 안 듣겠다는 말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무릎 꿇려야 할 것은 사람이 아니라 폭력적인 구조이다.

마틴 루터 킹 목사도 ‘왜 말로 하지 않고 극한투쟁을 하냐’는 공격을 자주 받았다. 킹 목사는“협상이야말로 우리의 행동이 원하는 궁극 목표”라고 답했다. “비폭력 직접행동은 위기와 긴장감을 조장시켜, 협상을 거부하는 사회를 곤경에 빠뜨리고 더 이상 협상에 응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데 그 의의가 있다. 즉 사회의 쟁점들을 본격적으로 부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