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홀로 존중?

A: 너, 요즘 얼굴 보기가 힘들다. 왜 사람들과 통 어울리질 않아? 전엔 안 그랬잖아?
B: 창피하고 힘들어서
A: 뭐가 창피해?
B: 내가 내세울 것도 없으면서 있는 척했던 것 같고, 다른 사람들이 날 그냥 끼어주는 척 했던 걸 날 진짜 받아들인 걸로 착각한 것 같고, 뭐 여러 가지로…. 한마디로 주제파악을 못했던 것 같아.
A: 그래서 혼자 뭐 하는데?
B: 응, 자존감을 좀 키워 보려구
A: 자존감? 그걸 혼자서 어떻게 키우려고?
B: 뭐, 열심히 공부도 하고, 운동도 하면서 나부터 돌봐야지. 돈 쓰는 습관도 바꾸고. 목표를 세워 하나씩 성취 해내야지. 내 주제를 모르고 오지랖을 떨었던 것 같으니까, 날 책임질 줄도 모르면서 남 걱정 하는 것 그만둘래.

A: 에효, 네가 내 거울 같았는데 난 어쩌라구.
B: 거울?
A: 그래. 거울을 보고 매무새를 가다듬듯이, 난 네 눈과 생각에 비친 나를 통해 나를 봐왔거든. 네가 날 칭찬해주면 난 그런대로 괜찮은 사람이라 뿌듯해하고, 네가 지적하는 내 언행을 곰곰이 씹어보고. 무엇보다도 내가 무시당했다고 여길 때마다 네가 날 응원해줬잖아.
B: 그게 뭐 대단한 거라구.
A: 나한텐 대단하거야. 네가 보여주는 그런 반응들 때문에 난 적어도 의미 있는 존재다, 나는 존중받고 있다, 그런 느낌을 가졌거든.
B: 나 말고도 너한테 반응을 보여줄 사람들은 많잖아?
A: 맞아. 너와 같은 사람들이 있어서 내게 어떤 반응을 해주기 때문에 내가 무시 또는 존중을 체험할 수 있는 거지. 너 또한 그랬잖아. 그래서 네가 혼자 자존감 키우겠다는 그게 걱정돼.
B: 왜? 타인의 눈을 의식하기 때문에 날 좀 자랑스럽게 만들어보겠다는 데.
A: 존중은 날 존중해줄 타인 또는 타인들을 필요로 해. 그런데 너는 존중보다는 평가를 의식하는 것 같아. 골방에서 기술을 연마하는 것처럼, 실적을 달성하는 것처럼 존중감을 만들어보겠다는 것인데, 사실 네가 키우고자 하는 것은 위신, 실력, 뭐 그런 거 아닐가? 또 네가 받고자 하는 것은 네 존엄성에 대한 존중이 아니라 위신과 실력 같은 것에 대한 평가와 인정이 아닐까? 그런 업적이나 실력 같은 건, 남을 의식하는 것 같으면서도 한편으론 남에게 무관심할수록 잘 키울 수 있을지 몰라. 반면에 존중은 사람사이에서 만들어지는 거잖아. 너 홀로 수련하겠다는 건, 상호존중을 표현할 줄 아는 존엄성과는 거리를 두려는 것 같아.
B: 그럼, 나한테 어쩌라구. 여러 관계에서 계속 주눅 들기만 하는데.

존중의 상호성

A: 딱히 해줄게 없어서 나도 속상해. 나도 날 평가할 때마다, 타인에 대한 알량한 관심보단, 보란 듯이 성공해서 베푸는 게 더 낫지 않을까란 생각을 가끔 해.
B: 나 때문에 너까지 주눅 드는 것 같아 미안하네. 우린 존중에 왜 이리 인색한 걸까? 존중이란 게 맘껏 표현한다고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나에 대한 존중이 깍이는 것도 아닌데
A: 맞아. 내가 아이를 존중하지 않는다고 해서 어른으로서 내 가치가 높아지는 게 아니고, 내가 비-한국인을 존중하지 않는다고 해서 한국인으로서 내 가치가 높아지는 게 아닌데, 왜 타인에 대한 존중을 부정하면서 자기 존중이 가능하다고 여기는 걸까?
B: 비교와 평가와 배분이 너무 지배적이어서 아닐까? 안 그러려고 해도, 자꾸 ‘이겨야지’란 생각에 집착하게 돼. 이겨야만 나와 내가 속한 집단이 인정받을 수 있고 몫이 커진다고 생각하게 돼. 남과 비교해서 우수한 평가를 받아야만 대접받을 만한 것이라 여겨져.

A: 존중의 핵심은 상호성인데, 상호적이지 않고 뺏고 빼앗는 경쟁을 통해 쟁취하는 ‘몫’으로 생각해서일거야. 몫에 대한 평가에 익숙해지다 보니 지위나 위신을 챙기는 것과 존중을 혼동하게 된 것 같아. 목표달성과 상호존중은 다른 거야. 상호존중은 너와 내가 지금껏 해왔던 방식으로 서로 표현하고 반응하는데서 만들어지는 거야.
B: 네 말에 동의하면서도, 나도 능력을 인정받고 싶어. 인정받고 싶고 우러름 받고 싶은 것과 존중이 왜 다를까?
A: 인간은 여러 모로 불평등하지. 대표적으로 능력이 불평등하다고들 말해. 몫의 배분을 위한 평가에선 능력을 기준으로 삼는 게 공정하다고들 해. 그게 왜 얼마나 공정한지 따져 봐야할 게 많아. 설령 능력을 공정한 기준으로 삼을 수 있다 할지라도, 평가를 위해 늘 계산을 하고 비교를 하는 게 왜 일부 특수한 관계가 아니라 일반적인 관계 전반에 적용돼야 할까? 왜 다양한 능력 중에서도 특정 능력에 대해서만 몰아주기가 지나칠까? 그런 비교와 평가와 배분은 이미 지나치게 많은 관계와 제도를 장악하고 있어. 우리가 그런 기준을 죄다 무시해버릴 수는 없겠지만, 그런 불평등조차도 사람간의 평등한 존엄성을 바탕으로 구성됐다는 걸 기억했으면 좋겠어.

존엄성은 존중을 통해 드러난다

A: 저 뉴스 저거 뭐야? 또 손님이 종업원의 무릎을 강제로 꿇렸다고 하네.
B: 짜증나. 무릎 꿇리는 게 무슨 유행인가 봐. 그렇게 하면 자기 위신이 높아지는 줄 아는 걸까?
A: 아무리 실질적으로 불평등하다고 해도 사람들은 원칙상 평등한 거니까 그런 식으로 타인의 인격을 직접적으로 해치는 일은 금지돼야 하는 거 아냐?
B: 그러게. 그럴 때마다 나오는 ‘목구멍이 포도청’이란 말이 난 정말 싫어. 일하러 갈 때마다 자존감을 항아리에 두고 나간다는 무슨 드라마 대사도 있었어.
A: 살려고 하는 일인데, 살려는 게 존엄성을 포기해야 하는 거라니. 살기 위해 죽으라는 말처럼 들려.
B: 아이구, 답답해. 존엄성을 끄집어내 보여줄 수도 없고. 우화속의 토끼 간처럼 꺼내 쓸 수 있는 척이라도 했으면 좋겠다.
A: 사실 우린 그런 ‘척’을 하고 있는 거야.
B: 무슨 말이야?
A: 우리가 모든 사람은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존엄하다고 할 때, 그 존엄성을 모든 사람들 속에 내재된 가치로 본거라고 했잖아.
B: 그랬지. 사회적 지위나 위계로 인한 명예는 그럴만한 특별한 사람에게만 주어진 것이지만, 존엄성은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갖는 것이니 평등하다 했지.
A: 그런 평등한 존엄성은 인간의 어떤 속성을 본질로 한 게 아니야. 그러니까 존엄성의 증거 같은 건 없는 거야. 우린 서로를 존엄한 ‘셈 치는’ 거야.

B: ‘척’을 하고 ‘셈 치는’ 거라면, 우리가 존엄성에 대해 서로 뭔가 짜고 있다는 거야?
A: 평등한 존엄성에 대한 인정은 서로를 존엄한 사람으로 대하기 위한 실천의 약속이라고 했잖아. 네가 ‘착한’ 속성을 가졌기에 존엄하다고 한 게 아니라, 네가 나와 같은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존엄하다 합의한 거야. 이제 너와 내가 할 일은 서로의 관계에서 끊임없이 그걸 인정하고 표현하는 거야.
B: 표현하지 않는 감각은 감각이 아니라던 광고 문구 같네. 존엄성을 어떻게 드러내지?
A: ‘존중’을 통해 드러내는 거야. 존중이란 한마디로 누군가를 사람으로 여기고 사람으로 대하는 거야. 우리 서로가 사람대접을 하고 받음으로써 사람다워지는 거지. 이건 사회적 상호관계의 모든 순간에 늘 요구되는 거야. 끊임없이 표현돼야 하는 거지.
B: 사람을 사람으로 대한다? 솔직히, 누가 사람의 범주에 들어가는지 부터가 문제네.
A: 그렇지. 생물학적으로 인간이라고 해서 누구나 사람대접을 받는 게 아니라는 게 아픈 현실이지. 사회마다 자기네 구성원으로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방식에서 존중을 표현하지 않고 정반대의 표현을 고집할 때가 많아. 가령 특정 사람(들)이 자신을 사람으로 드러내는 방식을 거부하고 인정하지 않아. 그런 사람들은 성원으로서 인정과 불인정의 경계 위에서 숨죽이며 눈치를 봐야 돼.
B: 능력 격차를 따져서만이 아니라 단지 주류와 다르다는 것만으로 존중받지 못하는 경우도 많잖아?
A: 존중은 타인에 대해 내가 이해하지 못할 영역이 있고, 나 또한 타인으로부터 그런 영역이 있다는 걸 인정받는 거야. 비교해선 안되고 비교를 통해 우열을 나눌 수 없는 그런 게 있다는 걸 서로 인정해줘야 해.

존중의 표지판

B: 솔직히, 모든 인간은 존엄하니까 존중해라! 그렇게만 명령한다고 누가 듣나? 표지판 없이 안전운전하란 말과 같아. 사람이 존엄을 유지하려면 말로만이 아니라 존엄을 지킬 수단이 보장돼야 하는데, 그런 수단에는 신경 안 쓰고 각자 알아서 ‘나는 존엄하다’고 주문을 외우라고 시키는 것 같아.
A: 그렇지. 차선도 긋고 신호체계가 있어야지. 사람을 사람답게 대하는 것이 뭔지를 확인시켜주는 표지가 필요해.
B: 어려운 것 말고, 우리가 늘 걷는 거리, 부딪치는 사람들 사이에서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걸로 생각해보자. 음, 가령 사람들 사이에 주고받는 신호, 표지판 같은 걸로 말이야.
A: 사람들 사이에선 서로의 얼굴을 존중해야 하는 거잖아. 그러니까 그 사람이 여기 있는 걸 인정하고, 그 사람이 있는 듯이 행동해야지. 가령 인사를 한다든가, ‘고맙습니다’ 또는 ‘실례합니다’ 등의 말을 주고받는다든가.
B: 음, 그렇다면 ‘투명인간’ 취급은 정반대의 표지겠네. 특정 사람(들)에 대해 그들이 여기 없는 듯 행동하고, 있어도 ‘감정’ 등 인간성의 중요한 요소를 빼놓고 ‘기능’만 존재하는 것처럼 취급하는 것 말야.
A:사람들 관계에서만 그런 게 아니라 제도적·구조적으로 없는 사람 취급하는 일도 많아. 그런 제도 속에서 사람들의 상호작용만으로 ‘같이 여기에 있는’ 사람 만들기에는 한계가 있지.

B: ‘투명인간’ 취급 말고도 사람이 아닌 듯 대하는 건, 존중하지 않는 거겠지? 가령 사람을 물건 또는 기계처럼 다룬다든가, 의존이나 미성숙을 이유로 온전한 사람대접을 안 한다든가, 사람 이하로 취급 하는 거.
A: 물건 버리듯이 하루아침에 문자로 해고 통보를 날리는 거?
B: 복지 수급을 받는다고 해서 사람 구실을 못한다고 무시하는 거?
A: 또 있어. 사회적 약자라고 하면 보살핌을 받기만 해야지 자기 삶의 조종 장치를 쥘 생각을 갖지 말 것, 주는 쪽의 인내심을 시험하지 말 것, 뭐 이런 요구들
B: 우리가 언급한 경우에서마다 그게 만약 나였다면, 이 사회에서 없는 존재나 군식구 취급을 받는 느낌일거야. 그럴 때, 존중의 표현을 받지 못했다고 따질 기준이 있어야 하는 것 아냐? 말로는 존엄성을 설교하면서 무시나 경멸을 없는 듯 연기하는 사람들한테 들이 밀 레드카드 같은 게 있어야지.
A: 그런 표지가 인권이잖아. 인권은 최소한의 사람대접을 설명해주는 합의된 기준이야. 한 사회의 구성원이 사람다움을 유지하려면 사회가 무엇을 보장해야 하는지를 지시한 거지.
B: 존중은 개인적·사회적 차원 모두에서 표현돼야 존엄성을 드러낼 수 있는 거겠지. 나와 너 같은 관계에서의 상호존중 만이 아니라 여러 관계들의 상호존중을 북돋을 수 있는 환경이 필요해.
A: 그런 환경을 만드는데 자신을 출현시키는 것, 참여하는 것 또한 존엄성의 표현, 즉 존중이야. 너 인제, 골방에서 홀로 존엄성을 쌓겠다는 말은 하지 않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