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엘리베이터에서 맨 끝에 탈 때마다 조마조마하지 않니?
B: 너도 나 뚱뚱하다고 놀리는 거야?
A: 내가 널 놀릴 형편이냐? 피차 마찬가진데. 그냥 내가 조마조마하단 소리야. 저번에도 ‘삐’ 소리가 나서 얼마나 무안했는지.
B: 그건 사람이 많이 타서였겠지. 네가 우연히 마지막에 탄 거고. 날씬한 사람만 엘리베이터 타란 법이 있는 것도 아니고. 왜 우린 이렇게 몸무게에 민감한 걸까? 이게 무슨 천형이냐?
A: 그러게 말이야. ‘삐’ 소리에 얼른 내리는 데 뒤통수에 비웃는 화살이 꽂히는 것 같았어. 쓸데없는 생각인 줄 알면서도, 괜한 열등감을 느끼게 되고 그러고 나면 힘이 쫙 빠져.
B: 몸무게를 달 저울은 있어도 내 삶의 무게를 잴 저울은 없어. 왜 외모를 가지고 내 삶을 잴 수 있다고 여기는 걸까?
A: 외모뿐만이야? 그냥 다른 걸 다르게 냅두지 않아. 굳이 위아래, 앞뒤, 정상·비정상을 구분하려는 게 한둘이어야지.
B: 그러게. 구실도 다양하셔라! 학벌, 성, 외모, 장애, 출신, 결혼 유무, 피부색, 나이, 재산 ….
A: 차별은 그런 구실들을 가지고 타인의 삶을 잴 수 있다고 뻐기는 저울이나 줄자 같은 게 아닐까? 그런데 그런 저울이나 줄자는 도대체 누가 어떻게 만드는 걸까?

차별의 구축 과정

B: 거다 러너라는 유명한 역사학자 말로는 그게 과정이 있더라구.
첫 단계, 일단 무수한 다름 중에서 일단 자기네가 원하는 걸 골라잡아. 골라 잡히면 표적이 되는 거야.
A: 하긴, 모든 차이가 차별이 되는 건 아니지. 겉으로는 다양성을 떠들지만, 차이들이 나란히 다양한 게 아니라 차이들 속에 분명히 위계와 서열이 있거든.
B: 맞아. 특정 표적을 골라잡는 이유는 권력이 많거나 센 쪽이 그 권력관계를 유지하고 이익을 보기 위해서거든. 그런 동기를 은폐하기 위해서 두 번째 단계가 필요해. 골라잡은 표적에게 그럴만하다고 여겨질 부정적인 색칠을 할 필요가 있어. 그리고 그 색깔이 표적의 원래 색깔인 양 뒤집어씌워. 이유를 만들어놓고 거기다 표적을 꿰어 맞추는 거야.
A: 편견, 고정관념 같은 걸 만드는 거구나. 하지만 사람들이 그걸 부당하다고 안 받아들이면 되잖아?
B: 그게 간단치가 않은 게, 그 색깔을 이유로 체계적이고 제도적인 차별이 이뤄지거든. 사회적 기회나 자원에 동등하게 접근할 권리, 자기 삶과 사회에 미치는 힘을 행사할 권리를 묵살하는 거야. 그렇게 실제적으로 상당 기간 박탈이 계속되면 어찌 될까? 물론 부정의하다고 느끼고 저항에 나서는 사람들도 있겠지. 슬프게도 차별의 표적이 된 사람은 좌절과 열등감으로 자기에게 씌워진 색깔대로 살게 될 수 있어. 주입된 열등감이 지배세력에게 연료를 공급하는 거지. 그런 과정에서 대개 사람들은 주입된 부정성에 동의하고 그걸 통념으로 갖게 돼.
A: 경쟁 때문일까? 부족한 기회나 자원을 두고 벌이는 경쟁에서 누군가를 떨꿔낼 수 있으니까 그런 과정에 협조하는 게 아닐까?
B: 그러게. 차별로 이득을 보는 쪽에서 그런 경쟁과 분열을 노리는 거겠지. 그러니까 문제는 차이에 있는 게 아니라 특별하게 만들어낸 차이를 구실로 박탈과 지배를 정당화하는 데 있는 거야.

‘나머지’가 아닌 ‘다른’ 사람들

A: 우리 학교 다닐 때 ‘나머지 반’ 얘기를 하는 것 같다.
B: 나머지 반?
A: 왜 성적도 별로, 특기도 별로, 집안도 별로인 얘들끼리 묶어서 ‘나머지 반’이라 하고, 아주 소수정예만 뽑아서 ‘특별 반’이라 했잖아.
B: 맞아. 그 때 ‘나머지’라서 겪었던 설움이 장난 아니었지.
A: 우린 ‘나머지’가 아니라 그냥 ‘다른’ 사람일 뿐인데, 왜 다른 사람으로 봐주지 않고 나머지로 취급했을까?
B: 특별반이 학교생활에서 정상이고 표준이었으니까 그렇지.
A: 우리가 그 정상의 기준에 대들었다면 우리 삶이 달라지진 않았을까? 우린 ‘나머지’가 아니라고 좀 세게 나갔으면 말이야.
B: 그러게. 하지만 우린 오히려 특별 반에 들기 위해 더 노력했지. 나머지 반을 떠나 특별 반으로 옮기는 애를 아주 부러워하고, 나머지 반과 그 속의 아이들을 창피해 했어.
A: 나는 남고 너는 잠깐 특별 반에 간 적 있잖아? 그때 그랬던 거지?
B: 창피하지만, 옛날 얘기니까 고백하자면 그랬어. 나머지 반 애들 갖고 킥킥거리고 얕잡아보는데 더 열심히 꼈지. 처음부터 특별 반이었던 게 아니라 나머지 반 출신이란 거 지적할까봐.
A: 아, 세월이 가도 남는 건 상처구나. 그때 나를 멀리하고 무시한 게 특별 반 애들이랑 잘 어울리기 위한 거였구나.
B: 옛날 얘기라니까! 부당한 구별에 올라타서 잘난 척 했던 게 쑥스러워. 그때 기억이 나한테도 상처로 남아있어. 결국, 지금 우리는 ‘나머지’란 말이 얼마나 부당한지를 공유하고 있잖아.
A: 그래. 그때의 구별이 우리 삶에서 계속 변주되고 있으니까. 재해로 사망하는 노동자를 보면, 살아서만 아니라 죽어서도 차별하잖아. ‘나머지’가 사라지거나 줄어들기는커녕 왜 우리 삶에 더 들러붙는 걸까?
B: 눈에 보이는 공식적·제도적 차별도 문제지만, 근본적으로 ‘같은 사람’으로 인정하려 들지 않는 게 토양이라서 그럴 거야. 그런 토양에선 형식적으론 차별이 금지돼도 실제론 모욕과 무시와 차별이 비온 날 풀처럼 거침없이 자랄 거야.
A: ‘요새 세상 좋아졌다’는 말을 남발하는 사람들이 솔직히 대놓고 사람 무시하지. 자기가 확연히 느낄 수 있는 차별이 없다는 걸 다른 사람도 당연하게 인정하라고 강요하는 것 같아.
친구야, 제도화된 차별이 문제란 건 잘 알고 그것 땜에 화도 많이 나지만, 우리 그걸 방패로 숨지 말자. 우리의 일상에 침투한 은근한 신호들을 무시하지 말자구.
B: 문득 최근 들은 말이 생각난다. <차별론>을 쓴 사토 유이란 학자가 이런 말을 했대. “차별에는 최소 세 명이 필요하다”고.
A: 왜 세 명일까? 차별받는 표적이 된 한 사람, 그 표적을 대상으로 서로 짬짜미해서 한통속이 되는 두 사람을 말하는 거야?
B: 하하, 너 말이 적나라하다. 다른 학자의 표현에 따르면, “차별이란 어떤 이를 타자화함으로써 그것을 공유하는 이와 동일화하는 행위”라네.
A: 네가 특별 반에서 했던 것처럼?
B: 그 얘긴 그만하라니까!
A: 알았어, 알았다구. 그만큼 차별은 위험하다는 거야.

차별의 해악

B: 차별의 해악이야 잘 알려져 있지. 희생양 만들기, 제거하기, 식민 지배, 아파르트헤이트, 제노사이드 등 역사적 증거들이 넘치잖아. 인권을 무시하는 사람들도 히틀러의 나치정권이나 남아공의 극단적인 인종차별정치인 아파르트헤이트는 비난하잖아.
A: 차별 정책을 정치의 근본으로 삼았던 체제가 자국민의 인권뿐 아니라 인류의 인권과 평화를 침해했다는 증거가 넘칠뿐더러, 멀고 남 얘기 같으니까 동조하는 걸 거야. 하지만 가까운 내 얘기에서는 얼마든지 태도를 뒤집잖아. 이로울 때는 글로벌스탠다드를 부르짖다가도 차별금지법 제정을 반대할 때는 세계적인 추세를 거스르지.
B: 굳이 역사적 증거들로 차별의 해악을 설명하지 않더라도, 인간 이하나 비-인간으로 대하는 모욕과 배제가 주는 고통이 인권침해란 걸 부인할 수는 없어. 까놓고 말해 무시나 모욕을 받으면 당장 잠도 안 오고 우울해. 어쩔 땐 심장이 조이고 속을 칼로 긁는 느낌이 들 때도 있어. 난 평소 둔하다는 소릴 자주 듣는데, 무시당하고 주눅 드는 상황에선 그게 말짱 거짓말이더라.
A: 한편에선 인권감수성이 높아졌다고 말하던데, 한편에선 차별에서 파생되는 인권침해가 날로 드세지는 것 같아. 이건 뭔 조화지?
B: 대놓고 차별하는 쪽의 문제야 지적하자면 끝도 없지. 그런데 나는 가끔 차별을 반대하는 목소리에서도 불편함을 느껴.
A: 무슨 소리야? 우리끼리 목청껏 차별을 반대해도 모자랄 판에.

고정된 선 지우기

B: 음, 정확하게 말하긴 어려운데, 가끔은 불평등해지기 위해 평등을 요구하는 게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어. 더 많은 기회와 자원을 놓고 시합을 벌이면서, 그 시합의 규칙에 국한해서만 차별반대를 외치는 게 아닌가 싶어. 그렇게 해서 더 많이 갖게 되면 평등이 성취되고 차별은 사라지는 걸까?
A: 그게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의 방식이잖아. ‘정당함’과 ‘부당함’을 구별하는 방식이 경쟁의 공정함과 능력에 따른 대우인 거고. 너 무슨 유토피아를 꿈꾸냐?
B: 재능과 장점이 그에 걸맞은 대우를 받는 걸 아예 부인하자는 게 아냐. 난 그저 그런 분배만이 유일하게 정당한 것인지 의문이 든다는 거지. 정당한 것과 유일하게 정당한 건 다르잖아. 나는 정당한 분배에 앞서 사람으로서 같이 누리는 기본값이 커졌으면 좋겠어. 특성과 조건을 따지기 전에 사람이라면 당연히 받는 기본적인 대접이 동등했으면 좋겠고, 그 동등함의 범위가 넓고 깊어졌으면 좋겠어. 그러려면 반차별과 평등의 관심이 기회의 균등이나 공정한 분배에 너무 눈을 돌리지 않았으면 좋겠어.
A: 네 말 듣고 보니 나도 찜찜한 게 있었어. 내가 차별을 반대하지만, 내가 피해자라는 점을 너무 의식하고 강조하는 건 아닌지, 피해자임을 강조하다 보니 피해에 늪처럼 빠져드는 게 아닌가 싶을 때가 있어. 난 늘 약자니까 특별하게 고려돼야 한다고 사정하는 느낌이 드는 것 같아. 사정하는 게 아니라 난 당당하고 싶거든. 사정이 아니라 정당한 권리와 사람으로서의 대접을 원하는 건데, 왜 특별대우를 받는 것처럼 낙인 찍혀야 하지? 왜 자주 되풀이해서 피해를 말해야 하지?
B: 말하고 또 말하는 것도 힘들지만, 그 말이 내 입에 안 맞을 때가 많아. 무슨 무슨 차별의 피해자라고 누군가 날 묘사할 때면 성질이 날 때가 있어. 왜 자기 말로 나를 묘사할까 싶어서.
A: 그런데 내가 나와 다른 범주의 차별 피해자를 묘사할 때는 늘 내 말로, 내 방식으로 설명틀을 만들어내지?
B: 아까 왜 특정 차이가 차별로 만들어지는지 얘기했잖아. 차별을 엮어내는 고리 자체를 바꾸는 걸 목표로 삼을 순 없을까?
A: 위아래, 앞뒤, 정상·비정상을 구분하는 선 긋기 자체를 바꾸는 것? 우리, 몇 해 전에 회 먹으러 갔던 해변 기억나?
B: 밀물과 썰물의 차이가 대단했지. 저 멀리 있던 바다가 순식간에 코앞에 해안선을 그려서 깜짝 놀랐잖아.
A: 그치. 모래사장과 바다의 경계가 순식간에 허물어졌지. 간밤에 보았던 해안선과 아침에 보았던 해안선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었어.
B: 그뿐이야? 파도는 늘 넘실거리면서 우리가 그리거나 새긴 것들을 지웠잖아. 우린 또 다시 그리고 또 지워지고.
A: 차별을 만들어내는 범주와 경계에 고정되지 말고 우리도 넘실거렸으면 좋겠다.
B: 날은 덥고 바다는 생각나고, 비·회·술·벗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우리 ‘나머지 반’끼리 번개 해볼까?
A: ‘나머지’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라고 정정하면, 생각해볼게.